<참 인간> -밝은 소리
작은 소망 작은 행복 / 丘仁煥
가을이 익어간다. 산과 계곡이 온통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작고 큰 들에 황금이
물결치는 仲秋佳節이다. 붉게 매달린 감나무와 집 앞의 오동나무의 넓은 잎, 채전의
무와 배추가 살쪄 가는 마을, 바쁜 손길에 개들만 꼬리치는 길 가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꽃잠자리와 같이 가을의 찬가를 부른다. 강원도 옥수수가 여물어 가고
산록의 산도라지가 코발드색으로 하늘을 닮아 가는 계절, 내 고장 사과가 붉게 물둘
어 가는 가울이 풍요한 잔치를 벌리고 있다.
이런 가을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축복된 일이다. 감방에서는 조그
마한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을 그리며, 탐광의 지하에선 푸른 하늘을 꿈꾸며 3천미
터의 외로움을 달래는 것을 보면 푸른 하늘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단풍의 아름다움
에 취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도회에선 이런 복된 삶을 더욱 풍요하게
성숙시키기 위하여 산으로 바다로 시골 마을로 소요와 동경의 나들이를 한다.
어디 그뿐인가. 김미연과 박세리가 골푸의 정상에 오르고, 박찬호가 10승 고지를 넘
으가고,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업계가 호황으로 수출의 호조라는 즐거운 낭보에 고무
된다. 경제 성장 8플로 넘는다고 외국 평가가 날라 오고 추석 대목으로 시장이 활기
를 띠며 과소비를 염려할 정도로 백화점이 붐비고 있다. 이런 한국에서 하늘이 높아
지고 말이 살찌는 가을에 오손도손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고마운 축복
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세상이 아무리 가파르고 모질다고 해도 나만은
바람을 타지 않고 평안하게 살면서 부귀다남하기를 원한다. 개인이나 가정의 행복은
물론 나라의 평화와 부강에 의한 행복을 바란다. 위로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 아이들
을 기르며 아내와 같이 단란하게 사는 것이 행복의 출발이다. 또한 자기 능력에 따
라 마음껏 전력을 다하여 일하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성취하여 삶을 기쁨을 느
끼며 나날을 즐겁고 보람있게 살아 가는 것이 행복이다. 흔히 오복(五福)을 갖춘 복
된 삶을 기리고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도 바로 독일의 문호(文豪) 괘테가 말한
대로 인생은 행복의 추구자이기 때문이다. 부(富) 귀(貴) 수(壽)와 덕을 베푸는 유호
덕(攸好德) 주어진 명대로 사는 고종명(考終命)의 다섯 가지 오복은 누구나 누리고
싶은 축복이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며
족하도다'라고 스스로 만족하던 선인들의 호연의 모습이 부럽고, '족함을 모르는 사
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여도 부유하다'라는 성인의
말에 쉽게 따르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실은 누구나 마음대로 오복을 누릴 수 없는데 문제가 있다. 사람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세파에 휩쓸려 동으로 서로 뛰어 다녀야 할 현실에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귀하게 오래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
물며 이 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 가파르고 모진 세상에 덕을 베플며 명대로 산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사실 한국같이 먹거리가 푸짐하여 잘 먹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넓고 쾌적한 주택 공간에서 사는 나라도 그리 많지 않다. 일본은 20평 아파
트가 맨션이요 구라파에서는 17평이 중산층 아파트다. 이텔리 사람은 일생에 꼬냑
한 병 먹는 것이 소원이고 인도나 필립핀 사람들은 주거가 시원치 않은데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유네스코에서 조사한 삶의 만족도에서 필립핀이 95프로인데 비하
여 한국은 35프로에 지나지 않다. 한국은 훨씬 잘 살면서도 75프로가 불만족하다.
물론 불만족의 갈등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에 불타는 면도 있지만, '부유함은 바다물
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라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엘의 말대로
끝없는 욕구로 불만 속에 살게 된다. 한국사회의 혼탁은 이 지나친 욕심에 기인한
다. 인도나 마닐라에 가 보면 한국보다는 훨신 못살아도 거리를 나 다니는 사람들
의 얼굴이 안온하고 평안하게 보인다. 종교의 힘이라고는 해도 인도의 거지들은
평온 속에 이승의 삶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너무 큰 행복을 찾으려고 하고 한 번 잡은 행복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행복은 반듯이 큰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또 영원이 한 곳에 남아 있지는 않는
다. 행복은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살며시 빠져 나간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 행복을 간직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행복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가족이 모두 건강한 것, 탈없이 다 각기 일을 잘하
고 있는 것, 하루 일을 무사히 마치는 것,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고 있는 것 등 작
은 소망(素望)을 성취하여 그것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다. 바로 그것이 작으면서 열
매가 풍성하게 여는 개자씨의 행복이다. 그러기 위해선 세상을 잘 될 것이라는 긍
정적인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나 우리만을 사는 이기적인 자세가 아니고 나
도 우리도 이웃과 더불어 잘 산다는 자세가 절실하다.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인다.
기왕 한 번 살다가 가는 세상이니 소망을 성취하고 행복을 누려야 할 것이 아닌
가.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살며시 왔다가는 슬며시 빠져 나간다. 또한
나만의 행복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 풀라톤의 말대로 남을 행복하
게 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을 얻는다. 이웃과 더불어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우리
의 삶을 가꾸어야 한다.
-14.8매
丘仁煥(소설가.서울대명예교수 문학과문학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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