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론-
수필에서의
허물벗기와 미로 찾기
한상렬/
문학평론가
1. 고정관념에서 물러나 보기
1968년 여름,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미국 최대의 스타가 나뒹굴었다. 그는 복부를 감싸 안고 응급실로 옮겨졌다.
목숨만은 다행히 건졌다. 며칠 후 초췌한 낯빛으로 그가 병원 밖을 빠져나왔다. 펜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워홀이 살았다!
그에게 총을 쏜 사람은 놀랍게도 늘씬한 몸매의 여자였다. 워홀이 제작한 영화 <나, 남자>에 출연하기도 한
여배우 발렐리 ･ 솔라니스가 그의 작업실인 ‘공장’을 찾아가 느닷없이 총질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내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쳤어요.” 이것이 그녀가 경찰에게 진술한 살해 의도였다. “남자는 여자가 되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다. 그들은 생물학적 사고로
태어났기 때문에 평화를 위해 제거해야 한다.” 그녀의 이렇게 주장했다.
워홀은 가장 미국적인 슈퍼스타이자, 순수미술의 테러리스트였다. 팝 아티스트이기도 했던 그를 그 어떤 말로든 적실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나는 기계이고 싶다.”고 외쳤고, 대중은 “작품을 공장에서 마구잡이로 제조하는 아트 비즈니스업계의 망나니”라고 했다.
그는 가짜의 정체에 주목하였고, ‘짝퉁’의 사회 심리학에 몰두했다. ‘키치’에 대한 열광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의 복제 작업은 망설임이 없었다.
유명인의 이름과 얼굴을 천명했다. 익명의 초라한 존재인 대중은 유명인의 이름과 얼굴을 소유함으로써 현명(顯名)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려 했다.
수작업이 빚어낸 순수 미술의 신비성과 존엄성은 뒷전이었다. 노골화된 욕망의 대체제(代替製)를 생산하는 데 진력했다. 현대미술의 허물벗기일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미로 찾기의 모티브가 수도 없이 등장한다. 이런 상상력은 에코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과 같이 도서관을 미로로 형상화하게 했다. 여기 미로 찾기는 일종의 암호를 푸는 일과도 흡사하다. 미국의 작가 에드거 ･ 앨런 ･
포의 작품은 두 가지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추리력과 논리를 바탕으로 현대 탐정소설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반면, 비정상적인
심리와 초현실적인 현상을 묘사하기를 즐겼다. 1843년에 출간된 소설《황금풍뎅이 The Gold-Bug》는 이 두 가지의 성격을 절묘하게
조합하고 있다. 잔인한 해적선장은 귀걸이, 반지, 시계 등 약탈품을 비밀 장소에 숨겨둔다. 장소를 가리키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나무에 매달린
해골의 왼쪽 눈에서 빠져나온 무엇인가가 땅에 닿는 곳이 그 지점이라는 것이었다. 리그랜드는 해변에서 양피지로 만들어진 오래된 문서를 발견하고
암호문을 풀어낸다.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미로로 보았던, 뒤렌마트는 미로에서 빠져나가려면 벽 위에 올라가 “미노타우르스에서 오줌을 내리 싸야
한다.”고 가르쳤다. 미로에서 벗어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유아의 천진함, 다름 아닌 창조성이다. 때문에 천진함이 없을 때 인간은
영원한 미로에 갇히게 된다.
미로 찾기는 숨은 그림 찾기와 흡사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동감했던 나우만은 단어와 철자의 교환과 조합,
동음이의어에 의해 예기치 않은 문구들을 만들어내어 우리들이 지나치기 쉬운 단어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 임의성에 주목하게 하였다. “얼굴은
풍경이다.”라고 한다. 그림에 담겨 있는 세계의 올바른 파악은 바로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하듯, 새로운 각도와 시선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물구나무를 서서 보든, 그림을 회전시켜 보든 새로운 시각의 차이에서 의미의 다양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바로크 예술은 그 어원 자체가
‘괴상하다’에서 유래하였다. 사실에 가까운 뒤러의 풍경과 달리 인형풍경은 왜곡과 과장을 인위적으로 연출하여,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풍경화도
되고, 인물화도 된다. 이른바 중의성이다.
시각적 관습에 사로잡힌 이들의 눈으로는 세계의 모든 사물이 늘 동일하게 느껴진다. 구름에서 구름을 보고, 바위에서
바위를, 풍경에서 풍경을 본다. 이런 지각의 상투성에 사로잡히면 사물을 제대로 인식해내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에게 때로는 어린이와 같은 시선이
필요하다. 바로 상상력이다. 세계 자체가 거대한 숨은 그림인데, 그 안에 진실을 보는 눈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수필문학의 질적 저하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다. 문제는 외적 요인보다 수필을 창작하는 작가 자신, 내적 요인이
더 크다는 데 있다. 이런 허물을 벗기 위한 문학의 정체성 찾기와 실험정신은 그 길이 될 것이다. 정체성의 축이 구심력이라면 장르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면서 문학적 지배 영역을 확충해 가는 실험정신은 원심력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수필문학은 그 동안 이런 변화의 수용을 위한
실험정신에 민감하게 대응해오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이는 일종의 수필쓰기에 대한 저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저항이 수필창작에 새로움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되었음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수필 쓰기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실험적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수필에서의 문학적 낯설게 하기
수필의 일상성은 그저 일상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지만, 일상성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수필은
상식으로 상식을 극복하고, 관습을 통해 관습의 근거를 파악하고, 일상 언어를 통해 일상성 이상을 탐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것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 제어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는 이를 위한
조치를 취하곤 했다. 이는 문학이 변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익숙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동시에 일성성에서의 벗어나기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변화의 한 축을 형성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문학적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수필은 그 소재를 생활 속에서 찾아낸다. 따라서 생활이 곧 수필이고, 수필이 곧 생활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너무도 낯익어서,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무심한 눈에는 아무것도 띄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으려면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순간, 그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설음이 자기 마음속에 어떤 느낌을
안겨주게 된다.
형식주의를 표방한 쉬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를 문학성의 요체로 보고 있다. 언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문학의 형식적 요소인 소리, 이미지, 리듬, 구문, 음보, 운, 서술기법과 같은 장치들이 모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문학 언어는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며 문학 언어를 다른 담론談論 형식들과 구별해 주는 것은
그것이 일상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뒤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문학 장치들의 압력을 받고 변형된 일상 언어는 낯설게 되고 생소화 된
언어이다.” 라고 하였다.
문학에서의
‘낯설게 하기’(Verfremdung)의 구조는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걸려있는 흰색의 직사각형 그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위르겐 링크는 그의
저서 《기호와 문학》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찰자는 비스듬하게 걸려진 실제의 그림만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걸려 있는 모습도 상상 속에서 동시에 인지한다.
모든 낯설게 하기 구조의 이 두 가지 근본 요소를 자동적 영상과 새로운 상이라고 한다. 관찰자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비교하면서 자동적
영상(테제:These)과 새로운 상(안티테제:Antithese) 사이의 차이점을 확인한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질적 차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여기서 관찰자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인지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하나의 새롭고 복합적인 기호가 탄생하며, 이 기호는 낯설게
된 기호 또는 낯설게 하기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필문학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런 문학적 낯설게 하기가 응용될 수 있을까.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을 필자가
주간으로 있는 격월간문예지 『수필시대』에 최근 실험수필로 발표된 작품들을 통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2-1. 언어 기표의 낯설게 하기
문학의 본질은 사물의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조나단 킬러(Jonathan
Culler)의 말과 같이 신문기사도 마치 시처럼 배열해 놓으면 문학적 책읽기를 유발할 수 있고,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했듯, 전통적인 것만이 만능일 수는 없다. 따라서 문학과 비문학의 차이는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일상어는 자동화, 타성화, 상투화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일상어에서 벗어나 언어적 차원에서의 낯설게 하기는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의 도치나, 낯선 강조의 기법, 독특한 언어나 문체를 사용이 독자를 낯설게 하면서 미적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언어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낯설게 하기는 이들 기표와 기의 어느 하나, 또는 모두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기표에서 이루어진 예를 찾아본다.
언어적 미감을 살린 시각적 표현은 수필에서는 다소 생소하다. 시각적 미감을 살린 수필 남홍숙의 <비비비 ⁄⁄>(『수필시대』, 2008.7-8월호)는 전통적 수필쓰기와는 이질적인 기법이다.
번다한 수식을 피하고 간결, 압축, 요약을 통해 언어가 지닌 비유와 상징을 바탕에 깔아 언어가 지닌 표피적 의미보다는 내재된 본질을 통찰하려는
작가의 창작태도를 보게 한다.
낯선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호수 옆을 지나는데 떨어지자마자 호수의 물과 하나
되는 비가,
투명하게 친근감을 주는 상큼한 기호로 다가온다. 버스 안이 아니라면 빗속에 뛰어들어 흠뻑 비를 맞고 싶다. 그러나, 저 빗속에
들어가면 나도 비와 하나가 될 수 있을지….
비는 실처럼 가는 모습으로 떨어져
실비라 불리지만 한 줄기씩 잘 따져보면 유연한 것만은 아니다. 내려오면서 물러서거나 우회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는 직선코스의 날카롭고 저돌적인
자세다.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내리는 비는 글자인 비와 닮았다. 이슬비가 내리는
날은 비, 장대비가 내리는 날은 비다.
―남홍숙의 <비비비 //>, 『수필시대』, 2008.7-8월호, 30-31쪽
화자는 비를 하나의 기호로 대치한다. 이슬비가 내리는 날은 비요, 장대비가 내리는 날은 비다. 비의 굵기에 따라 글자꼴도
그와 닮았다. 버스 안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빗속을 뛰어들어 흠뻑 맞고 싶은 마음.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실비의 생김새가 암팡지다. 내려오면서
물러나거나 우회하는 일도 없이 직선코스 그대로 날카롭고 저돌적이다. 그래 그에게는 비가 삶의 기호이다.
그의 내적감각에는 존재의 문제를 상정하고 있다. 수필문학의 본령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는 기호가 갖는
미묘한 맛과 멋을, 그리고 비 내리는 날의 정경을 시각화함으로써, 마치 그림을 보듯 그림과 언어의 교합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남홍숙의
수필은 전통의 파괴가 아니요, 새로운 수필적 인자를 배합함으로써 얻어지는 메시지 전달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로트만(Jurij Lotman)에 의하면 언어예술은 언어학적 기호로써 표현과 내용의 차원 사이의 자의성을 극복하려 한다고
하였다. 도상(圖上)의 경우 기호학자 퍼스(peirce)는 사물을 찍은 사진과 같이 기호가 나타내는 닮은꼴로 보고 있다. <비비비 ⁄⁄>의 경우가 그러하다.
정여송의 <세상 나누기>는 흥부네 박 하나가 두 동강이로 갈라져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상품광고를 화소로 하여 특이한
발상을 일으킨다. 작가의 창의성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박을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 다섯 조각으로 가를 때마다 상호 모순된
상극의 조화, 셋이 이루는 어울림, 넷이 어울리어 만들어내는 포용력과 통찰력, 다섯이 만들어내는 다층적 울림을 보여준다.
“대박 터졌다!”
커다랗게 부푼 흥부네 박 하나가 두 동강이로 갈라져 나둥그러진다.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다. 박을 켜던 사람들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두 쪽’이란 생각에 잡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떤 상품광고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
음양(陰陽), 선악(善惡), 명암(明暗), 흑백(黑白), 진퇴(進退), 천지(天地), 미추(美醜), 진위(眞僞),
주야(晝夜), 종횡(縱橫), 강산(江山)……
(…)
희노욕구우(憙怒慾懼憂),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 지신인엄용(智信仁嚴勇), 황백적홍청(黃白赤紅淸),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한열풍조습(寒熱風燥濕), 시청후미촉(視聽嗅味觸)…….
-정여송의 <세상 나누기>, 『수필시대』, 2008.9-10월호, 37-38쪽
‘음양(陰陽), 선악(善惡)’과 같은 2자 성어, ‘천지인(天地人), 의식주(衣食住)’와 같은 3자 성어,
‘천지일월(天地日月), 동서남북(東西南北)’과 같은 4자 성어, ‘희노욕구우(憙怒慾懼憂),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과 같은 5자 성어의 조합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 나누기이다. 낯선 소재지만, 단어의 조합생성의 원리를 통해 그 이미지를 통합함으로써 갈등과 분열을 통합하는 현실비정과
교훈이라는 주제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또한 언어 기표상의 낯설기 하기일 것이다.
2-2. 언어 기의의 낯설게 하기
오차숙의 <장르를 뛰어넘어>는 언어 기호가 갖는 기의의 낯설게 하기로부터 출발한다. 때문에 그의 수필을 읽어내려
가기에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쉽게 씌어지지 않은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는 언어가 갖는 기의에 대한 통찰이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 한 그루가
그 거리에 서서 울고 있다
그 거리에 서서 웃고 있다
도심과 도심 속에 무릎과 관념 내장(內臟)까지도
깊숙이 숨긴 채 그 흔적 그 형상 개미똥 만큼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삭히며 울고 있다 검붉은 입술을 앙 당문 채 해오라기 형상으로 웃고
있다
한 줌의 영혼으로만 넘실거린다
천 년 가까이 침묵을 등에 업은 채 존재하고 있다
늘 상 햇살 속에 가려진 채 그림자로만 기웃거리고 있는 안개 속의 그 형체 그 냄새
술래들이 다가가면 썰물처럼 도망치고 바람으로만
구름으로만 술렁이고 있다
두 눈을 조용히 감아 환상의 키(key)를 눌러
본다
역시 나는 기억 상실 자에 불과하다 자색목련이라는
미명아래 채색된 이름을 번쩍이며 여행가방을 풀어 본 기억이 없다 배시시 눈 꼬리를 흘려가며 홀로 서 있는 나무를 흔들어 본 기억이 없다 붉은
정념을 훌훌 풀어 조금만 건드려도 툭툭 터질 것 같은 천 년된 향나무를 끓게 한 기억이 없다
-오차숙, <장르를 뛰어넘어>,
『수필시대』, 2008. 7-8월호, 37-38쪽
나무 한 그루가 서서 울다가 웃다가 한다. “도심과 도심 속에 무릎과 관념 내장까지도 깊숙이 숨긴 채” 흔적을 드러내지 않고
나무는 속으로 삭히며 울고 있다. 아니, 해오라기 형상으로 때로 웃기까지 한다. 도무지 무엇을 하려함인지 분별이 서지 않는다. 미궁이요.
미로찾기일 게 분명하다. 인내와 끈기가 없는 독자는 이내 달아날 일이다. 하지만 끈기 있게 그의 언어를 추적해 간다. 아, 그는 지금 환상의
키(key)를 누르고 있구나. 그의 언어는 전체가 은유로 되어 있다. 사실의 추적보다는 현상의 상징과 은유를 통해 언어가 지닌 기표를 지극히
낯설게 한다. “순수한 열정과 붉은 정열이 도심 속 거리를 응시하며 군화 짝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다. 문어발 같은 묘묘한 꼬리를 하늘과
땅 사이에 휘두르고 있다.” 이런 애매모호한 언어 기표는 내적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추상화하면서 언어 기의를 낯설게 하고 있다. 그래
“삶은 모험의 강강술래-예술의 무대는 아이러니한 춤사위-영(靈)적 놀이는 삶의 대 극치”라고 하였다. 비로소 손아귀에 잡히는 창작의도를 간파하게
한다. 화자의 이종결합, 탈장르적인 자각의 의지를 읽게 한다. 바람의 통증이 올인(all in) 할 때까지, 구름의 통증이 올인(all in)할
때까지.
현상학을 미학에 본격적으로 적용한 로만 잉가르덴(Roman Ingarden)은 ‘순수지향적 대상’에서 ‘실재적
대상’으로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보였다. 그는 문학작품을 4개의 계층적 구조로 보고 있다. 첫 단계는 문학작품의 표피에 해당하는
‘언어적 음성 형상의 층’이요, 두 번째의 층은 전체 작품의 구조적 골격이 되는 ‘의미 단위의 층’으로 무의미한 음향들이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의 층은 ‘묘사된 대상성의 층’으로 작품 속에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여 얽히고설킨 사건을 만들어내며, 네 번째의
층은 ‘도식화된 시점의 층’으로 인물과 사건이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감각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드가(Degas)의 그림의 경우, 무용수의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채워지지 않은 성질’로, 순수 지향적 대상의 빈곳을 채워 넣어야 하는 바, 이런 작업을 ‘구체화’라
하였다.
180⁰가 싶고 싶은 작가,
그가 바로 한경화이다. 그의 수필 <나도
180°가 되고 싶어>를 보자.
90°보다 작다.
선거
후보의 거리 유세가 듣기시험에 방해가 되었다고, 모의고사를 치르고 온 아이가 투덜거린다. 조용한 학교 앞에서의 기본 예의도 모르는 그런 후보는
낙선될 거라는 말까지 한다.
인사를 하는 선거 출마자의 머리는 땅에 닿을 듯 몸이 90°로 꺾인다. 아파트입구에서 후보용 띠를 어깨에 두르고는 외출하는
나를 향해 인사를 한다. 잠시 후 귀갓 길에 부드러운 미소를 안고 그가 또 인사를 해 겸연쩍다. 오고 가는 차에게도 깍둑깍둑 인사한다.
운전자에게 하는 건지 차에다 하는 건지. 그러던 그 사람도 당선되면 굽혀졌던 허리가 180°로 곧추 세워지고 부드러웠던 미소는 권위가 잔뜩
들어간 표정이 될 것이다.
길거리에서 처음 본 사람이 인사하는 것도, 간혹 기본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나라 살림을 맡는다는 것도
미덥지가 않다. 난 그런 후보에게는 표를 던지지 않는 180°로 곧추 선 유권자다.
지방 선거에 나가시는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이른 아침인데 노랫소리와 상기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 너무
소란스럽게 유세하지는 마세요.” 하는 말을 내 가족이기에 할 수 없는 난, 선거출마자의 자세 90°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경화,<나도 180°가 되고 싶어>.『수필과비평』, 2008.11-12월호
제도와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길 소망하는 화자는 이를 180⁰라는 각도로 의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찮다. 소망과 욕구는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항상 갈등
요인으로 작용한다. 자유인의 해방을 구가하려 하지만, 때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야 한다. 조화의 묘미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 중용의 덕은 그
중간자이다. 규범이란 경고장 앞에서 그는 90⁰가 된다. 하지만 그는 여유를 갖고자 한다. 자유요, 해방이다. 규범으로부터의 탈출이요,
초월이다. 하지만 CCTV는 이런 자유마저 제어한다.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대중의 시선이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다. 하여 그는
90⁰와 180⁰ 사이에서 흔들린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180⁰이고 싶다. 언어가 갖는 기의의 낯설기의 실험이라 하겠다.
2-3. 언어 기표와 기의의 통합적 낯설게
하기
기표의 측면에서의 낯설게 하기와 기의의 측면에서의 낯설게 하기를 서로 결합함으로서 얻어지는 효과로 음성적 의미적 동형체의
특별한 경우는 형태소나 어휘소가 중복되기도 한다. 김희수의 <어떤 관계>는 이런 측면에서의 낯설게 하기로 볼 수 있다.
한 세상은 어떤 관계로 어울리며 돌아가는가.
․ 나는 그 사람의 앞바퀴 + 그 사람도 나의 앞바퀴 = 서로
주고받는다.
(나를 돕는다) (내가 돕는다)
․ 나는 그 사람의 뒷바퀴 + 그 사람도 나의 뒷바퀴 = 서로
주고받는다.
(내가 돕는다) (나를 돕는다)
․ 나는 그 사람의 뒷바퀴 + 그 사람은 나의 앞바퀴 = 내가 주기만
한다.
(내가 돕는다) (내가
돕는다)
․ 나는 그 사람의 앞바퀴 + 그 사람은 나의 뒷바퀴 = 나는 받기만
한다.
(나를 돕는다) (나를
돕는다)
* 인간관계는 자전거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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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와줄 사람 나 나를 돕는 사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며 살아가는 일 하나만 잘 해도
인생은 포근해진다. 인간관계는 복잡한 공식을 요한다. 이 공식에 서투르면 만나서 괴로운 사람이 생기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공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눈이 열리고 가슴이 열려 사랑이 충만해진다. 복잡한 공식이란 첩첩산중을 넘는 인간사와 같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고 난해해도
공식의 답은 하나로 모아진다. 정신이든 물질이든 주게 되는 관계와 받게 되는 관계이다.
누군가와 맺은 관계에서 쉽게 풀리지 않는 실마리는 섭섭함이다. 나는
그를 위해 이만큼 해주었는데 돌아오는 건 작은 보상이나 상처뿐이라면 얼마나 힘이 빠지는가. 여기에서 갈등관계가 벌어지는데 놓을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있다. 사주명리학에서 얘기하는 대운(大運)이란 사회에서 활동하는 시기를 말한다. 10년마다 바뀌는 대운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변해간다.
-김희수의 <인간관계>, 『수필시대』, 2008. 7-8월호, 27-28쪽
목야 선생의 이론을 그는 자전거에 응용하였다고 그 동기를 밝히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함께 페달을 밟고 있다. “페달은 두
발이 한 조로 움직인다. 밟고 올라가고 올라가며 뜻을 같이 한다. 한쪽 페달은 나와 동거하는 가족이나 제일 가까운 사람에 해당한다. 서로 마음이
맞으면 힘차게 달리지만 불협화음이 일어나면 자전거는 멈춘다.” 여기서 그는 관계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개인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다. 세상은 돌고 도는 이치에 있다고 한 화자의 메시지는 고정관념의 허물을 벗고 미로를 찾듯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2-4. 패러디 형식의 복합적 낯설게 하기
패러디가 성립하는 필요충분조건은
패러디 ‘된’ 작품(원전)과 패러디 ‘한’ 작품의 이중구조로 패러디는 모방의 형식이면서 해석의 형식이고, 또 비평의 형식이기도 하다.
언어학에서는 “문학적 낯설게 하기가 또 하나의 새로운 낯설게 하기를 만들 경우 이 문학적 낯설게 하기는 자동적 영상으로 이용되어 복합적인 문학적
낯설게 하기를 만들어낸다.”고 보고 있다.
조재은의 은 일상적 형태의 허물을 벗고 대화체를 사용하여 이종결합하면서 패러디 형식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 남자는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C를 잡은 남자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희고 가는 몸매가 고혹적이다. C를 잡는 순간 손끝이 따뜻해지고, 향기가 전해지자 남자는 자신의 손을 애처롭게
바라본다.
C가 묻는다.
C
: 당신은 왜 나를 좋아해.
남자 : 입 안에 도는 맛과 혀에 닿는 감촉이 섹시하고 때로는 철학적이거든. 너를 잡고
있으면 네게만 몰입할 수 있어. 네가 나를 독점하는 순간 젖어드는 희열이 너를 놓지 못하게 하지. 제일 좋아하는 네 모습은 네가 사라질 때야.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떠나지 않고 무한히 변화해. 너는 불안할 때 안정을 주고 마음 상하는 일이 있을 때 위로해 주거든. 눈을 감고 너를
음미하면 마치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같이 온 몸에 휘감기는 너를 느끼지.
너는 소유하는 사람에 따라 수많은 얼굴을 드러내.
천하게 보이다가 어느 순간 최고의 품위를 지니기도 하지. 네 모습을 새삼스레 느낀 날은 깊은 가을이었어. 유자향이 짙게 나던 날, 너는 참
고고했지. 커피나 술에 잘 어울리던 네가 순수한 유자향에 어울리는데 놀랐어. 그날 너의 겉모습은 차가운 흰색이지만 속은 빨갛게 타고 있었지. 그
순간 너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너만으로 충만했어. 어떤 반주도 없이 그 자체가 완성인 바흐의 무반주 첼로 선율 같았어. 그런 날의 바흐는
화려한 요요마의 연주가 아닌, 로스트로포비치의 격조 있는 연주가 더 어울리지. 음악과 어우러지는 네가 첼로 같은 여자로 느껴졌어.
너를 좋아하는 이유를 대답은 했지만, 만나는 동안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은 적은 없어. 누구를,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없지. 이유가 있는 만남은 오히려 헤어지기 쉬워. 느낌
없이 타성이 붙어 습관적으로 만나는 것이 더 무서운 거야.
C
: 내 성격은 누구와 한번 관계를 맺으면 쉽게 떨어지지
않아.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거의 커피를 마시는 실내였는데 오늘은 왜 강가에서 만나.
강물이 햇빛에 튕기듯이
보인다.
남자 : 어느 소설가가 강가에서 너를 만나면 촉촉한 수분 때문에 다른 곳보다 훨씬 더
깊은 맛이 느껴진다고 해서. 사실은 … 음~ 쿨럭 쿨럭.
-조재은의 ,
『수필시대』, 2008. 7-8월호, 39-40쪽
여기서 C는 담배를 지칭한다. 이 수필은 남자와 담배인 C와의 대화를 통해 담배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힘들겠지만 이젠 결단을 내려야하는 절박함이 “남자는 심하게 쿨럭 거리며 자신을 끈질기게 놓지 않고 괴롭혀 온 건강을 저당잡고
있던 유혹의 잔재를 본다.”라는 언술이 보여주는 행간의 의미에 천착하게 한다. “삶은 아이들의 블록쌓기 놀이 같다. 블록은 여러 모양이 있어
서로 섞여야 모양이 잘 만들어지는데 나는 그 법칙을 실생활에는 적절히 적용 시키지 못한다. 나의 블록놀이는 네모와 세모를 구별해 놓고, 다른
모양이 섞이면 안된다는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놓아 다양한 모양을 만들지 못한다.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다. / 고정관념은
견고한 돌로 쌓여 진 것이 아니고 연기같이 형상만 있는 경계선일텐데, 스트레스에 서서히 질식하면서도 그 선을 못 넘는다. 한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틀 안에서 허우적거린다.”라는 메시지는 통상적인 수필의 문법을 벗어나 고정관념의 허물을 벗어버리려는 창작의도를 간파하게 한다.
권현옥의 패러디 형식의 낯설게 하기는 더욱 패러디한 형식의 구체화를 보여준다. 그의 <시트콤 아파트>는 13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관음증 환자는 아니지만 관음증 증세는 있다.
들여다보이는 것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다.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재미있다. 인생은 하나님도 즐기시는
시트콤situation comedy이 아닌가. 그만그만한 일상도 웃고자 하는 방청객이 있어서 코미디가 된다. 나도 가끔은 웃음 효과를 내는
방청객이 되고 싶다.
1층
가장 궁금한 집이 1층이다. 처음에 대한 관용적慣用的인 정서이며 눈높이에 있어서다. 불행하게도, 버티컬은 밤낮으로 완벽한
경호를 한다. 막이 오르기 전 무대의 거만함처럼,
우리는 1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약 오를 건 없다. 그들 역시 밖의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2층
남자가 골프 퍼팅 연습을 한다. 여자가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어느 여기자는 그랬다. “여자들이여, 제발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는 남자 밑을 기어 다니면서 걸레질 하지
말라.”
아는 여자가 그랬다. “아무도 없을 때 부지런히 일하지 말라.”
식구가 보는 앞에서 일하라. 가정일이 저절로 되는 건 줄 알더라.
(…)
5층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집만 보인다.
공간이 넓을수록 서로 숨결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마련이다. 한 번도 살이 닿지 않는 넉넉한 거리. 목소리를 놓여야 들리는
거리. 돌아누우면 남자가, 돌아누우면 아기가 잠들어 있는 살 붙는 거리. 13평일 때가 따뜻했다.
[…]
13층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지 조명이 근사하다.
여자가 재미있으면 남자가 흥미 없어 하고, 남자가 흥미 있어 하면 여자가 시큰둥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면 어른들은
시시해서 돌아눕고, 어른들이 잘된 영화라 하면 아이들이 그 의미를 모른다. 한 가족이란 이런 상태가 정상적인가 보다.
-권현옥, <시트콤 아파트>, 『수필시대』, 2008.11-12월호, 앞서가는 작가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저마다의 삶의 양상을 통해 현실적 사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파해낸 이 수필은 그 발상의 전환이
압권이다. 진부한 일상의 이야기를 배제하고 장면 묘사를 통해 낯설게 함으로써 메시지의 강렬함을 더하게 한다.
김정화의 수필 <여> 또한 수필문학에 희곡형식을 결합하여 패러디함으로써 수필형식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 수필은 현대시를 수필문학으로 퓨전하는 과정에서 그 형식에 패러디를 통한 낯설게 하기를 실험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미당(未堂)의
<무등을 바라보며>를 빈처와 빈처 모(母)의 대화를 통해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해석하고 의미화 하는 과정이 탁월하다.
프롤로그 -
서정주님의 <無等을 보며>를 읽으며
내 ‘바다의 無等’을 생각하다.
빈처貧妻: 어.머.니.
나보다 더 오랜 잠에서
잠시 깨어나 보셔요. 오늘처럼 잔월이 뒤늦게 핀 꽃을 비추는 밤이면 으레 그날이 생각나곤 합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아득한 옛일이지만 잊을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었지요. 그 사람의 전갈을 받고 담담하게 옷매무시를 가다듬었으나 쉴 새 없이 요동쳐 내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진땀을 흘렸지요.
빈처의 母: (???)
빈처貧妻: 그는 높고 귀한 주인집 양반이라
소작인의 딸은 눈길조차 마주치기 어려
웠어요. 신분뿐만
아니라 열두 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간극이 컸었지요. 나를 데리러 온 늙은 행랑아범은 남포등을 정성스레 비춰주며 말이 없었지요. 낮은 흙담 아래서
얼마간의 돈을 몰래 쥐여 주던 북두갈고리 같은 어머니 손을 잡은 것도 마지막 날이 될 줄 예감하지 못했어요.
빈처의 母: (……)
빈처貧妻: 운명은 시작되었어요. 문중
어른들의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
었지요. 재산과 명예를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 사람의 심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히 짐작할 수 없었어요. 그날은 참으로 먼 길을 걸었어요. 흙밥을 드러낸 겨울
강을 보면서 다가올 계절에는 인연을 풀어내는 봄물 소리를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빈처의 母: (∞)
빈처貧妻: 돌이켜보니 마치 모서리가 낡은
오래된 시집을 들여다보듯 눈시울이 침침
해져 옵니다. 서정주
시인이 無等의 능선을 보며 가난을 이겨내듯 우리는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혹풍을 견뎌야만 했지요.
-김정화, <여>,『수필시대』2008. 9-10월호, 33-34쪽
현대화된 문자기호를 사용하여 의미소의 확대와 함께 희곡형식과의 이종결합으로 ‘가난’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고들고 있다. 이
수필은 그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일상의 옷을 벗어버린 전통적 문법의 파괴라는 장벽 허물기를 통해 새로운 수필의 창작을 실험하고 있다.
2-5. 의미 동위체의 낯설게 하기
글 전체의 의미 구조로 보아 의미 동의체가 낯설게 되는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즉 핵심 의미소들이 그를 뒷받침하는
문맥소에 의해 하나의 의미 동위체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핵심 의미소를 연속하여 보여주는 경우일 것이다. 이 경우 개별체로서 암호와도
같이 개인이나 소수의 개인에 한정되는 비밀스럽게 느껴지는 텍스트일 경우, 개별체로 의미의 낯섦에 이바지하게 된다.
권현옥의 수필 <넙치와 함께 지하철을>은 퀀터 그라스의 <넙치>에 대한 감상문이다. 하지만 이 글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독후감상문 형식과는 전혀 이질적이다.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내려야 할 역에 빨리
도착하게 했다. ‘넙치’에 홀려 소란스런 소리와 빛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있을 때 ‘넙치’를 문 사이로 들이 밀었다.
책을 끼우면 문이 열리리라 생각했는데 문은 책을 삼키지도 뱉지도 않고 꽉 물고만 있었다.
지하철 안에는 맞춤석인 양 모두 앉아 있고 나
혼자 서 있어 시선이 집중되었다. 뒤돌아서지도 못하겠고, 혹시라도 문이 열리면 책을 잃을까 책을 붙잡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밖이라야 어둠뿐이다. 손을 살짝 놓아 보았다.
문짝은 ‘넙치’ 허리를 꽉 문 채 빛과 어둠이 순식간에 교차하는 터널 속으로 아득히 가고 있었다.
표지에 그려져 있는 넙치의 삐뚤어진 눈은 전동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흘겨보기 아주 알맞은 눈이었다. 웬일인지 곧 능청스런 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었는가.
빛이 번뜩번뜩 지나갔고 ‘찌지직’ 하는 철길의
마찰음에서 광속이 느껴졌다. 넙치는 팔딱거리며 움직여 삐드득 문 사이에서 허리를 빼고 있었다. 꼬리까지 미끄러져 나오자 파르르 몸을 한번 털고는
가운데로 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그가 책 속에서 언제나 ‘말하는 넙치’였듯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권현옥, <넙치와 함께 지하철을>,
『수필시대』, 2008. 9-10월호, 29-30쪽
여기는 나는 바로 넙치이다. <넙치>라는 소설 읽기이다. 그 공간은 지하철이다. “나는 그림 형제의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에서, 어부에게 잡혔다가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어부의 아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 바 있는 ― 은혜를 갚을 줄 알고
희망과 재미를 주는 ― 넙치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가 여성을 비하한 남자들의 판본이라고 해서(여자들은 너무나 많은 걸 원하는 존재로
비춰졌으므로) 내가 조금 소침해져 있었지만 퀸터 그라스에 의해 다시 태어났지요. 문명을 일깨운 잔소리꾼으로, 충고자로, 조언자로, 그리고 비난
받을 자로서 문명과 함께 다시 태어난 거죠.” 이 수필은 전개에 있어 글 속에 내포된 작가인 넙치의 시점에서 본 인간 존재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미에서 다시 현실로 귀환하여 전동차 안으로 시점의 변화가 나타난다. “밖에서 빛이 들어왔다. 곧 정차할 거라는 방송이 들려오자
넙치는 당황하여 말이 빨라졌다. 잘 들리지 않았다. / 이곳-계신―여자분들-지금 이제 돌-가면 넙치 한 마리―바짝 구워 남자―먹이십―. 그리-내
방식―침대―가든 말―결정― 보시길 바랍―. 죄송―니다. 또 참견―했―. / 찌지직. 전동차가 멈추기 시작했다. / 넙치는 어느새 책표지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책이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았고 문이 열렸다.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능청스런 넙치의 주둥이가 내 손을 간질이고
있었으므로.” 기이하고 엉뚱한 발상에 독자는 잠시 긴장하지만 이내 그 내적세계의 낯섦에 몰입하게 한다.
2-6. 주제 해석의 낯설게 하기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미로(迷路)로 보았고, 현실 역시 언어로
이루어진 미로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언어로 미로를 짓고, 동시에 세상 또는 현실이라는 그 미로에서 출구를 찾아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서도 그는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상징적인 도서관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박양근이 우주를
‘문자도’로 본 것과 어쩌면 닮아 있다. 서구의 도서관은 층 마다 육각형의 방으로 되어 있고, 책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결국 한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진리를 찾는 혼란의 미로인 도서관에는 인류 역사의 모든 기록이 서가書架에 진열되어 있다. 마치
<문자도>에서 작가가 찾고자 하는 삶의 진리가 만다라처럼 펼쳐져 있듯, “단언하지만 도서관은 끝이 없다”라고 보르헤스는 말하고 있다.
또한 “광대한 도서관에 동일한 책이란 없고, 동시에 모든 책들은 또 동일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보르헤스가 보는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는 도서관은 박양근에게 있어서는 ‘문자도’요, 이런 ‘문자도’에는 세상과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가 도서관처럼 들어 있다.
보르헤스에게 책이 현실이자 환상이요, 우주라면, 그에게서는 ‘문자도’가 바로 우주며 현실이 된다.
요즘 나는 별 자리에서 일깨운 문양을 다른 곳에서 찾곤 한다. 유전자
지도며, 동식물의 세포 그림을 들여다보거나, 문양을 가진 돌도 나름의 생명지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 꿈꾸기도 한다. 세상은 문자와 기호로 엮어진
지도이고 우주는 만다라라는 생각도 해본다. 작가는 문자도에 얹혀 기어가는 달팽이 순례자가 아닐까 싶다.
-박양근수필집 <문자도>, 교음사,
2007
그의 창작 의도는 분명하다. [세상은 지도요, 우주는 만다라]라는 작가 박양근의 탁월한 발상의 근거를 확인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을 해체하려던 보르헤스의 포스트모던적인 발상이 박양근에 이르러, 구체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는 모더니즘의 종언(終焉)을 선언하고
새 시대에 맞는 참신한 문학 양식을 모색한 존 바스(J. Barth)의 <고갈의 문학>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세상은 문자와
기호로 엮어진 지도이고 우주는 만다라라는 생각도 해 본다."는 수필 <문자도>의 의미화는 잉가르덴이 문학을 위한 4성 대위법으로 본,
네 번째 단계의 층인 ‘도식화된 시점의 층’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우리에게 삶의 나침판이나 지렛대가 필요하듯, 작가 박양근에게서는
‘문자도’를 떠올리게 한다. 주제 해석의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최이안의 수필집 『각트의 가벼움』은 앞서의 작품과 맥을 같이 하는 주제 해석의 낯설게 하기를 보여준다.
각트는 가벼움을 추구해야 해. 다방면에서 가벼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해. 가벼움만이 아름다움이자 초월로 향하는
길이야.
우선은 몸이 가벼워야 해. 군살은 미련함과 게으름, 욕구불만의 증거이거든. 온갖 다이어트 식품과 운동기구, 요법과 수련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래도 살이 안 빠지는 부위는 병원에서 주사기로 지방을 뽑아내면 돼. 마른 몸매는 사회적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이고, 신분을 나타내는 척도야. ‘뚱뚱함’이란 표현은 ‘날씬함’의 단순한 반대 의미가 아닌 혐오와 무능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되었어. 몸이
가벼워야 세 상을 더 흥겹게 살아갈 수 있어.
인간은 각트일 뿐이니까.
-최이안,<각트의 가벼움>, 『수필시대』 앞서가는 작가, 2008. 5-6월호, 49쪽
구어체의 문장으로 후렴구를 사용하여 경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각트GACT'란 인간의 몸을 이루는 4가지 유전자
기호인 Guanine, Adenine, Cytosine, Thymine의 첫 글자의 합성어다. 신조어의 조작으로 된 어휘상의 문제도 그러려니와
화자가 가벼움을 주장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작가의 교묘한 이중 장치이다. 기존의 인식을 뒤엎을만한 기상천외한 발상은 아니어도 운재천의
말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상징적 기호인 언어를 통해 일정한 공간 위에 정착시킨”것으로 볼 수 있다.
심선경의
<코믹심청>의 발상은 이른바 사고의 역전을 보여준다. 독자의 뇌리 속에 관념화된 고정관념으로는 심청은 효녀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뒤집어 불효녀 심청을 그리고 있다. 새 시대의 도덕적 관점으로는 심청이 반드시 효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고의 뒤집기를 통한 주제 해석의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카드사 직원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간다.
놀부 : 그나저나 카드 빚 또 받으러 올 텐데
어떡하냐? 내 동생 흥부가 그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짜식이 얼마나 조잔하게 그는지 형님인 나한테도 피자 한 판 안 시켜준다.
심청이 : 기분도 꿀꿀한데 수영이나 하러 가자. 물에는 노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니 따라올려면 오고 싫으면 말고!
놀부 : 그래, 너는 수영 하나는 최고지. 어
옛날에 인당수에 빠졌을 때도 잠수 최고 기록 세웠잖냐. 수영선수로 뽑혀서 올림픽 나가면 금메달도 딸 수 잇을 거야.
심청이 : 그런 방법도 있었네. 둔한 머리가 오늘은 제법인데.
놀부 : 얼른 연습하러 가자.
-심선경수필집,《파로호에 잠긴 초록별을
낚다》,2008. 94-95쪽
흥부와 놀부를 함께 무대에 올림으로써 심청을 희화화하고 있다. 희곡적 수필로 창작된 제4막의 일부이다. 경찰관과 카드사
직원, 방속국 직원, MC 등 이 놀부와 흥부, 심청이를 등장시켜 현대화된 인물과 함께 패러디와 해학을 동반하고 있다. 수필이 갖는 소재의
도덕성을 뒤엎어버리는 파격을 통해 문학적 상상의 폭을 확대하고 있다. ‘코믹 심청’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 수필의 재미를 한껏 살린 수필로
주제해석의 낯설게 하기를 실험한 수필이라 하겠다.
이은희의 <버선코>는 발상이 낯설다.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시선의 변화, 착상의 변화가 돋보인다. 그의 수필은 전통적 문법이나 통상적인 언술의 구조를 뒤틀어보거나 아니면 미시적 관찰을 통한
해석과 의미화로 존재 파악에 천착하고 있다. 사유의 깊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진지함이다. 이는 하이데거(Heidegger)의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 그의 수필은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문제를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본래적 자신’으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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