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괌에 뜬 그믐달
김 순 재
이곳은 괌.
아들 딸의 식구에 묻혀 여행을 왔다. 아쉬운 것 없이 호사를 누리는데도 젊어서 남편과 함께 왔을 때와는 달리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하다. 힘차게 퍼덕이는 자식들의 푸른 지느러미에 밀려 자꾸만 소외되는 기분이다.
창을 열고 하늘을 보니 유월 스무 여드레 그믐달만 떠있다. 망망한 바다에 수박껍데기 한 조각이 버려져 있는 것 같다. 풍성하던 속살은 다 파 먹히고 이제는 빈 껍데기로 이지러진 달. 내뿜는 열기도 환한 빛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떠있는 달. 내 가슴에 호롱불처럼 걸려있는 어머니 같다.
영화로운 보름달로 추억되지 않아 서러운 어머니는 글자를 깨치지 못한 문맹이셨다. 새벽 기도를 드리러 교회당에 가려면, 미리 일어나서 괘종시계가 네 번을 칠 때까지 기다리셨다. 유식하지도, 부자도 아니었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명쾌한 교훈을 내린 적도 없고, 잘 사는 처세술을 가르쳐 준 적도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길이 어떤 것인지는 몸으로 보여 가르쳐 주셨다. 당신을 다 주고도 해준 것이 없어 죄스럽다 하신 어머니. 그분은 그믐달이셨고 그믐밤 달빛이셨다.
별 하나 없는 하늘에 외롭게 떠있는 달이 이리도 적막한 줄을 예전엔 몰랐었다. 홀로된 어머니의 노경이 저러했으리라 새삼 사무치게 헤아려지는 밤이다. 나도 이제 농익은 나이가 되었음이다. 진액을 짜서 기른 자식들은 그들의 둥지로 날아가버리고, 고독만이 남은 끝자락을 혼자 삭히며 이울어갔을 어머니. 저 달이 어머니인 듯, 나인 듯하다. 문맹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은 나는 절대로 그믐달이 아닌 보름달로 자식 앞에 떠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나흘을 묵은 호텔의 식당 도우미는 원주민 여인이었다. 그녀의 큰 눈은 어진 짐승처럼 순해 보였고, 나긋한 태도는 상쾌했다. 오늘 아침 식사 때 그가 내게로 와서 “무엇을 드릴까요” 물었다. 나는 물을 청했다. 까칠한 입으로 빵 한 쪽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또 물을 청했을 때, 그녀가 다시 와서 “물 가져왔어요 마마”했다. 그리고선 음식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과일이라도 잡수세요 마마.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 드릴까요” 내 눈을 바라보며 권하듯 말했다. 자식들도 챙기지 않는 고통을 언제 눈 여겨 보았을까. 불면과 소화불량으로 기력이 빠져있었던 탓인지 그녀의 정다운 음성과 눈빛이 더 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걱정하는 그의 마음과 감사하는 나의 마음이 잠깐 교감하는 사이, 물 컵을 놓으려는 그녀의 젖가슴에 나의 한 쪽 어깨가 닿았다. 내 실수였다. 미안함을 주고 받고, 그런데 뜬금없이, 참으로 뜬금없이 오래된 기억 하나가 살아났다.
나는 아홉 살 되던 여름에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혀가 탈 정도로 열이 올라서 나를 잃어버릴 줄 알았다고 했다.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놓는 어머니를 느끼면서 정신이 아물아물해지는데, 갑자기 형언 할 수 없이 시원한 물체가 얼굴에 덮이면서 정신이 돌아 왔다. 눈을 떠 보니 삼베 치마 말 사이로 빠져 나온 어머니 젖이었다. 어머니는 내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 얹느라고 치마 허리가 내려간 줄도 몰랐던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내게 준 이 비밀스런 약 처방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펄펄 끓는 얼굴 위로 당신의 유방이 닿았던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날의 시원하고도 편안했던 행복감을 잊지 못한다. 나를 소성케 했던 어머니의 유방, 그 오묘한 느낌, 시원한 평안. 그것은 설명 할 길 없는 ‘어머니’란 단어의 의미 전부이다. 그 은밀한 기억이 그녀와의 접점에서 피어난 것이다.
원숙한 도우미의 일상일 수 있는 배려에 그토록 과잉반응을 한 것은 자식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이 번 여행은 오로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던가. 가족 모두와 여행을 해 보고 싶다는 내 희망에 따라, 아들이 앞장 서서 누나들을 부추기고, 계획을 짜고, 항공권을 구하고, 호텔을 수소문했다. 휴가철이 아니면 아들과 사위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경비도 비수기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여행지도 나를 배려해서 적당한 거리로 잡은 것이다. 이처럼 고마운 자식들에게 둘러싸였으니 마냥 행복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생면부지 도우미의 조그만 친절에 혹해서 자식들의 큰 성의를 무색하게 만들다니. 그러나 어쩌랴.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한 것을.
가끔 친구들과 늦도록 놀다 돌아온 밤이면 집 밖에서의 재미와 비례하는 공허함을 느끼곤 한다. 윗도리를 벗은 남편의 등만 보아도 가슴이 뛰던 20대에도 이유 없이 외로울 때가 있었다. 내가 옆에 있어도 쓸쓸하냐며 남편은 서운해 했지만, 그의 품에 안겼어도 가슴 저미는 고독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외톨이가 된 것 같은 소외감도 내 안에 있는 외로움이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감정반란이 어쩔 수 없는 나의 생리인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질이 고독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인간의 본질이 고독이라면 나는 천성적으로 본질에 잇대어있는 촉수가 예민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원시라는 선입견으로 보았던 도우미를 연민하며, 선입견 속 그에게서 순진무구했던 어머니의 이미지를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밀림의 여인. 맨 살로 흔들리는 그녀의 유방은 절대자를 향한 헌신으로 상기되었다. 사냥 나간 사내들의 무사귀환을 빌며, 생명의 번성과 풍요를 소원하는 기도로 간절하다. 어찌 거기에 관능의 유혹이 도사리며 요사가 발 붙일 수 있으랴. 성스럽도록 깨끗한 원시가 있을 뿐이다. 그가 비록 문명으로 나와서 일을 할지라도 그녀 안에 흐르는 피는 원시의 순정한 피일 것이다. 독사에게 물린 사내의 상처를 망설임 없이 빨아내고, 기진하여 돌아온 전사의 입에 젖꼭지를 물려 생명을 수유하는 천부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내게 준 은은한 온기도 이 거대한 원시정감에서 새어 나온 그믐달빛 같은 모성이 아니랴.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해 금방 기력이 떨어진 내게 준 그녀의 마음 한 조각이나, 자식의 끓는 열을 식혀준 어머니의 젖무덤은 다 같이 시원에서 흘러온 강물이리라. 나는 그 강가에서 열병 같은 소외감을 풀고 싶어 응석이 났던 것이다. 그날의 향수를 빨고 있는 어린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잠은 오지 않고
새벽은 다가오고
먼 수탉의 울음소리
애달피 이우는 그믐달.
이 무서운 정한(靜閑)을 누가 쨍그랑 깨버려 주었으면 좋겠다.
외롭기에 사람이 그리운 밤이다. 울고 웃는 인간사 부대낌이 새삼 아름답다 느껴지는 밤이다. 철없는 자식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온 뿌듯함에 만월 같은 가슴으로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길래 저들끼리 마냥 즐거워도 더 없이 소중하고 고맙다. 내일이면 저들이 나의 기쁨 전부가 되어 내 스스로 빠진 함정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 괌 하늘에 뜬 그믐달은 너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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