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무대
홍미숙
첼로 연주회가 열릴 연주 홀을 찾았다. 친구와 나는 앞쪽 지정석으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주인공인 첼리스트가 연미복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협연할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와 함께 무대로 등장했다. 아는 사람이 연주를 하게 되어 그런지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첼로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첼리스트는 피아니스트와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맞추어 나갔다.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은 역시 국경선이 없음을 실감했다. 연주가 무르익을 즈음, 내 어깨에도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소 긴장감이 돌았던 연주 홀의 분위기도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남짓 계속된 연주였지만 나를 흥분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한 쪽에서는 브라보를 외치고, 또 한 쪽에서는 앙코르를 외쳤다. 박수 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조용하기만 했던 연주 홀이 별안간 활기로 가득 찼다. 모두의 얼굴에 즐거움이 넘실댔다. 나도 친구와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오늘의 주인공인 첼리스트가 동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첫 연주회를 갖는 것이니 모두가 격려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무사히 첫 연주회를 펼치고 무대를 떠났던 첼리스트와 피아니스트가 박수 소리에 다시 무대에 나와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어느 새 일심동체가 되어 더 큰 소리로 앙코르를 외쳐댄다. 하지만 둘은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무대를 또다시 떠난다. 그래도 박수 소리는 줄어들지를 않는다. 앙코르를 받아주지 않으면 관객들은 연주 홀을 떠나지 않을 기세다.
앙코르곡으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중의 하나인 ‘알라망드(Allemande)’가 연주되었다. ‘알라망드’란 독일풍의 무곡이라는 뜻이다. 이 곡을 들으면서 바흐의 장중한 음악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대로 첼로의 선율 속에 나는 풍덩 빠져 버렸다. 그 분위기에서 다른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딸아이가 바이올린을 켜지만 나는 바이올린 소리보다 첼로 소리를 더 좋아한다. 첼로는 바이올린에 비해, 활 놀림이 자유롭지 못하고, 음색의 화려함이나 다채로움도 떨어지지만, 소리만큼은 심오하기에 깊숙한 내면의 세계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좋아한다. 저현(低鉉)의 첼로 소리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앙코르 곡이 연주될 때는 아주 편안하게 들었다. 연주자도 앙코르곡을 연주할 때는 관객과 한층 가까이 다가와 있는 느낌이었다. 연주자의 표정도 자연스럽고 여유로움이 역력했다. 관객들도 첼로 연주에 취해 흥겨운 모습이었다.
앙코르는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준다. 첫 연주회이긴 했지만 연주를 하면서 연주자의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앙코르를 받은 뒤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긴장되었던 얼굴도 자신감에 넘치는 얼굴로 변해있었다. 그 보다 행복한 표정은 없어 보였다. 환한 얼굴로 앙코르곡을 연주하는 첼리스트와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까지 편안했다. 무대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고 있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아마도 그 기쁨은 음악가들이 가장 많이 누리지 않을까 싶었다.
인생도 앙코르를 받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앙코르를 받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인생 무대는 넓고도 복잡 미묘하니 쉽지 않을 것이다. 앙코르를 받기가 어려운 무대가 바로 인생 무대다. 혼자서는 도저히 펼칠 수 없는 무대이니 더더욱 그렇다. 제 아무리 똑똑해도 주위의 도움이 없으면 훌륭한 인생 무대를 꾸밀 수 없다. 독주는 불가능하고 합주만이 가능한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사람만 맘대로 뽑아서 인생 무대를 꾸며갈 수는 없다. 그래서 딱 한 번으로 인생이 끝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앙코르는커녕 인생은 리허설을 할 수도 없고, 편집도 불가능하다. 연습이 없는 게 인생이다. 곧바로 실습에 들어가야 한다. 어쩌면 평생 실습만 하다마는 게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녹화를 뜰 수도 없고, 떠서 본들 지난 삶을 다시 살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인생은 추억 상자에 보관하는 길 밖에는 없다.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만들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연주자가 앙코르 무대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잘 하듯, 인생도 앙코르를 받아 또 한 번 살 수 있다면 처음보다는 더 잘 살 것으로 본다. 나도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전생을 거울삼아 멋진 삶을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지 않을까 싶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실습 무대였던 전 생을 토대로 후회 없는 삶을 펼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앙코르 무대이니 만큼 여유 있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생은 한 번으로 끝이 난다. 꺼져 가는 생명 앞에서 아무리 앙코르를 외친들 소용없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을 지른들 아무 소용이 없다. 다시 무대에 서지 못하고, 영원히 무대 뒤로 사라져 가는 것이다. 오늘 연주자들처럼 밝은 모습으로 앙코르 무대에 설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인생 무대만큼 귀중한 무대는 없다고 본다. 단 한 번의 무대이니 얼마나 값진 무대인가? 앙코르를 받아 인생을 다시 펼칠 수는 없지만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 보다 큰 영광은 없다. 살면서 박수를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앙코르 박수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하여도 인생의 앙코르는 본인이 받아 할 수는 없다. 앙코르 받을 만큼 잘 산 게 있으면 대신 자식들이 받아 해 줄 것이다. 자식들이 부모의 삶에서 앙코르를 받아 단막 무대라도 만들 수 있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자식들이 앙코르 무대에 서서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잘 살다 가는 수밖에는 없다.
ㅁ홍미숙
ㅁ1959년 경기 화성 출생
ㅁ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 국문과 졸업
ㅁ신문사에서 리포터와 명예기자로 활동
ㅁ1995년 창작 '어머니의 손'으로 신인문학상 수상
ㅁ1999년 첫 번째 수필집 "그린벨트 안의 여자"출간
ㅁ2002년 두 번째 수필집 "추억이 그리운 날에는 기차를 타고 싶다" 출간
ㅁ2002년 국정교과서인 국어(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수필 '신호등' 수록
ㅁ2004년 세 번째 수필집 "마중나온 행복" 출간
ㅁ2004년 세 번째 수필집인 "마중나온 행복" 이 9월 3째주~ 10월 2째주까지 4주간 비소설부문에서 베스트 셀러였음. 인터넷 판매순위 1위.부모님을 위한 한가위 선물 추천도서 2위(영풍문고). 화제의 신간(교보문고)
ㅁ현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창작수필문인회 회원, 화요문학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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