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머슴
오 길 순
우리 집에는 머슴이 있다. 10여 년 간, 술 담배나 식사는 물론 허름한 우작의(牛嚼衣) 한 벌 건넨 적 없으니 그는 만년 앵벌이인 셈이다. 그 동안 땀 한 방울 흘려준 적 없이 백미 100가마는 될 새경도 뭉개온 내게 ‘무위도식 불한당’이라 한대도 할 말이 없다. 세상살이 인과응보라지만 존재를 다하는 그의 짝사랑은 공짜로 살아온 나를 늘 부끄럽게 한다.
그는 올 해로 스무 살 쯤? 그토록 짐을 부려주고도 엄살도 없다. 코끼리처럼 늙고 낙타처럼 굽은 쌍봉으로 끊임없이 묵언보시를 한다. 설산보다 높은 영봉을 향하는 성자처럼 그가 거룩해 보이는 것은 베풂도 책임처럼 혼신을 다하는 진정 때문이리라.
상강부터 차가워진 방바닥은 진즉 보일러로 덥히는데 소설이 지난 오늘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라며 눈짓을 한다. 이순을 진즉 지난 내가 첫사랑 소년의 고백을 들은 듯 설렌 것이다. 사랑도 전염을 한다더니, 가난한 나를 부자로 착각하게 한 것은 그의 풍요이다. 고독이 몸부림치는 가을날, 차가운 내 등짝도 달궈줄 듯한 풍요는 보일러보다도 따습다.
올 해는 유난히 그의 머리가 무겁다. 몇 십 년 만에 외동딸 집으로 향하는 친정엄니의 머릿짐이 그러할까. 민둥이가 된 정수리에는 부랑인 바랑처럼 봉송이 주렁주렁하다. 이 쯤 해서 속말을 전하고도 싶다. 한 번도 고백한 적 없는 내가 ‘그대를 진정 사모했노라’ 굽이굽이 사랑을 고백하고도 싶어진다.
지난 8월이었나. 태풍 볼라벤이 사정없이 훑고 간 아침, 나는 마냥 울고 싶었다. 그의 부서진 늑골과 할퀴어진 머리를 보는 순간 두 발을 굴렀다. 나 같은 돌팔이가 보아도 뇌진탕이 틀림없었다. 평소 요가수행에 게을렀더라면 검산도해(劍山刀海)같은 바람의 세상에서 그가 영영 깨어나기 어려웠으리라. 호우 맞은 벼이삭처럼 짓찧어진 어깨는 50견을 앓는 여인처럼 늘어지고 척추와 경추염좌까지 겹친 만신창이는 내 마음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밤새 수십 섬 나락을 지고는 대문간을 건너다 넘어졌어도 그리 처연하진 않았으리라. 산발한 머리카락과 부서진 잔등은 몇 개의 깁스로도 어림없었다. 흩어진 그의 늑골을 주울 때마다 내 폐부에서는 앓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유골을 염습하는 유가족이 그러할까. 순간에 왔다가 찰나에 가는 게 생애라지만 무연고 걸인같은 몰골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회복력이었다. 한 이틀 끙끙 앓고 나더니 이내 깁스를 떼어버리고는 훌쩍 일어서는 순간 내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얼얼했다. 오히려 한두 번 당해본 사건이 아니라며 조용히 달랠 때는 또 하나 위대한 스승의 잠언을 들은 듯 명쾌해졌다. 상처의 뒤끝이 긴 내게 그의 판단력은 슬픔도 단박에 잊는 회복력이 되고도 남았다.
그런데 9월 즈음부터는 아예 만삭이 된 암퇘지처럼 드러누웠다. 갈수록 무거워진 그의 팔다리가 아낙네 긴 치마꼬리처럼 끌렸다. 더러는 내 발길에 소스라치다가도 이내 담담한 그는 난산일까 걱정하던 내 조바심을 한 순간에 평정해버렸다. 무거워도 천하태평이었다.
그 달 말경이었나. 드디어 그의 팔다리가 조금 씩 오르기 시작했다. 150그램 쯤 덜어내면 1점 5센티 쯤 올라가고 1000그램 쯤 덜어내면 십 센티는 올라갔다. 급기야 2미터도 넘게 들려지며 몸을 부르르르 떨 때는 그의 손을 불끈 들어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부러질 듯 굽은 잔등에 황홍색 보석을 인 양 홀로 의연한, 한 그루 단감나무의 저 희무량심.
전생에 그는 나의 머슴이었을까. 아니 그의 머슴이 나였을까. 이승의 삶이 전생의 빚을 갚는 것이라면 후자의 예이리라. 그가 혹독하게 부려먹은 전생의 내 주인이었기에 이승에서 그의 순한 복덕을 10여 년 간이나 되받아먹고 있다고 치자. 그래야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해도 이 불한당의 채무가 탕감되리라.
실은 겨우 20여개 수확으로 섭섭한 해도 있었다. 그 해는 공방 든 신부처럼 그를 멸시했다. 이제는 의무가 되어버린 그의 베풂 앞에서 그가 만년 종인 양 건방을 떤 것이다. ‘아, 네가 있음에 내가 있었네.’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그의 하품이 아니었으면 나는 영영 배내 등신으로 머물렀으리라. 씨 뿌린 적 없어도 목숨을 거둬준 아버지처럼 나무의 묵언이 고맙기만 하랴. 어리석은 내게 이듬해 석 접도 넘는 선홍색 결실은 탐심도 성급도 나무라지 않았다. 오로지 해갈이로 힘을 축적하며 헌신을 다해 온 한 그루 단감나무의 무량보시여.
금년에는 꽃 떨어진 봄부터 가족들이 애가 탔다. 얼추 천 여 개는 넘을 열매로 조사(早死)라도 할 것 같아서였다. 알알이 익어가는 8월 즈음부터는 차라리 조산(早産)하기를 바랐다. 툭툭! 한 개씩 미숙과를 내려놓을 때마다 내 심장은 몇 백 개씩 떨어졌지만, 천천히, 그리고 고르게 비워내는 그의 지혜 앞에서 내 조바심도 조금씩 숨을 돌렸다.
우환 중에도 모처럼 손자들과 술래놀이를 할 때면 나뭇가지는 커튼도 되고 장독대도 되었다. 끌린 나무 뒤에 숨어서 작은 손가락 틈새로 세상을 내다보던 아기들은 먼 훗날, 울담을 넘던 외할머니의 웃음도 기억하리라. 그리고 세상살이 어려울 때마다 바늘귀로도 우주를 내다보았다며 장독대처럼 숨겨주던 단감나무를 불타의 보리수처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무는 오로지 풍요로 가르쳤다. 일목칠백실(一木七百實). 그 옛날 오병이어의 전설이 진실이었다고 말 하고픈 것인가. 가으내 내 갈증을 풀고도 외출할 때마다 지인들의 목을 축여준 자연의 봉송. ‘나’를 온전히 내려놓았던들 칠백 명의 갈증도 풀어냈으리라.
낼 모레 대설인 오늘, 밤새 함박눈을 쓴 채 걸려있는 저 반 접 봉송들은 평생 서교의 (鼠嚙衣) 한 벌도 걸친 적 없는 멧새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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