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
安 貴 順
싸늘한 모래밭에 타다 남은 촛불들이 하트를 그리고 있다. 밤새워 타올랐던 기도는 천상으로 갔을까. 빈 종이컵에 웅성대는 바람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와 오늘의 해가 다를 것 없건만 사람들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며 삶의 끈을 조여 맨다. 사철 푸른 소나무는 나이테를 그리고, 올곧은 대나무는 마디마디 아픔을 새겼다. 유장한 세월 토막토막 선을 긋고, 매듭지어 뒤돌아보며 쉬어 가는 재미도 없다면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고대 서양에서는 춘분이 들어있는 봄부터 정월이라 했다. 중국은 동짓날을 기준으로 한해의 시작으로 했다지만 우리의 새해는 동절기에 있어 좋다. 정초부터 천지에 꽃들이 난분분하면 마음이 어수선하겠고, 느슨하게 땀나는 계절이면 신선 감이 없으며 낙엽이 우수수 지면 센치멘탈에 빠질 것만 같다. 산천이 육신의 잔상을 훌훌 털고 묵상기도에 든 엄숙한 계절에 새해를 맞이하니 청신한 긴장감이 있어 좋다.
병술 년 해맞이 축제로 제야의 밤을 밝히는 진하 해수욕장이다. 괴로운 이야기는 가시는 임께 드리고, 바라는 소망은 오시는 임께 아뢰며 아이도 어른도 촛불을 들었다. 허리에 이불을 둘둘 감고, 떨고 있는 처녀들, 여인의 어깨를 감싸주며 바람을 막아주는 저 연인들은 무슨 소망을 빌러왔을까. 엄동의 칼바람을 물고 신들린 듯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석고대죄 하듯 엎드려 시를 짓는 노인이 있다. 엉성한 머리칼을 뜯으며 쥐어짜는 시가 궁금하여 등 뒤에서 훔쳐보았다.
'어린 날 장에 가신 엄마가 달콤한 눈깔사탕을 사다주시듯……. / 우리는 희망을 안고 오실임을 기다립니다.../ 정말 그럴까, 오시는 임은 달콤한 희망을 안고 오실까. 문득 최영철 시인의 '촛불에게' 가 생각난다.
‘내게는 한 푼의 복도 주지 마시라고 빕니다... /이미 주신 복락을 다 쓰기에도 불행이오니 / 행여 손톱만큼의 복이 있으시거든.../ 누군가 빌다 간 저 촛불에게 주십시오.../
세상에 사양할 게 따로 있지, 복을 사양하다니. 나 같은 속물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천지가 손 내밀어 구걸만 하는 형편이라면 차라리 사양하는 미덕은 아름답다.
시위하듯 막아서는 구름을 헤치고 동해를 물들이며 해가 뜬다. 그 아래 누웠던 바다가 일어서고, 날개 없는 물방울들이 춤을 춘다. 엄동의 바다에 피어나는 하얀 안개꽃, 숨 가쁘게 달려와 부딪쳐 쓰러지며 뿌리는 파도의 피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경건하게 눈을 감는다. 걸음걸이도 서툴러 보이는 어린것이 제 어미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입을 오물거린다. 어린 천사의 소망은 무엇일까. 천태만상의 얼굴처럼 기원도 가지각색이다. 저 기도를 다 들어야하는 창조주께선 또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날마다 머리에 빛을 이고 살지만 정중하게 해 마중을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다. 신혼여행지 경주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토함산 석굴암에 올라 동해에 떠오르는 첫 일출을 보았다. 대해의 어둠을 가르고 하회탈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던 그 아침의 태양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떨면서 기원을 했다.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30년이 흐른 후에 다시 그 일출을 만났다. 97년 첫날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서의 극적인 해후라고 할까. 중산리 마을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 4시에 산행을 감행했다. 빛도 길도 없는 엄동의 밤길, 눈에 덮인 설산을 겁도 없이 뛰어들었으니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태산을 만만하게 여겼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캄캄한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안고 뒹굴고, 짐승처럼 엉금엉금 기면서 죽을 만큼 고생도 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고 왔다.
어진 사람들이 산을 찾는다더니 험난한 산길에도 사람의 정은 참으로 따스했다. 난감한 절벽 앞에 머뭇거릴 때마다 함께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버릴 위험을 무릅쓰고 앞뒤에서 밀고, 끌어주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스쳐가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훌쩍 던지고 가는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산천도 녹일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이나 헤맸을까. 기진맥진하여 시린 눈밭에 주저 않고 싶었다. 이 나이에 무슨 청승인가. 정상에 못 가면 어때. 그냥 돌아설까. 갈등도 했지만 함께 걷는 일행에게 폐가 될까봐 그럴 수도 없었다. 앞을 보니 태산이요, 뒤를 보니 아찔한 절벽이다. 진퇴양란에 빠져 고민하는 순간 어디선가 '일출이다!' 하는 감격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새해 첫날 천왕봉 정상에서 일출을' 꿈같은 얘기가 오늘 포기하면 영원히 후회 할 것만 같았다. 쩌벅쩌벅 빙벽에 박히는 아이젠의 칼날이 비명을 질렀다. 지구를 짊어진 듯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며 동굴 같은 골짜기를 벗어나니 아! 그곳은 신천지였다. 하얀 눈밭에 소나기처럼 빗금을 그으며 콸콸 쏟아지는 빛을 보았다. 얼어붙은 천왕봉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생명의 피를 돌게 했던 상서로운 빛이었다.
야호! 남들처럼 소리를 질러보니 목소리가 얼었는지 떨고 있다. 무겁게 눈 더미를 이고 있는 늙은 소나무가 시린 듯 부르르 몸을 떤다. 천년의 주목은 휘어진 가지마다 눈을 휘감고 한껏 멋을 부렸다. 이토록 경이로운 풍경을 못보고 세상 떠난 사람들이 가엽다. '설산의 일출을 보기 전엔 죽지 말라' 고 마음으로 소리쳤다.
그 황홀한 순간에도 나는 어미의 멍에를 벗을 수 없어 주절주절 복을 빌었다. 내 가족, 내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라'고. 바보같이 구걸을 했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걸. 멀쩡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감사하다고 한마디면 될 것을. 자식을 둔 엄마의 자리는 영원히 염치없고 뻔뻔한 존재인지 모른다.
누군가 희망이란 독이요, 위대한 거짓말이라 했다. 가난한 중생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마저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하지만 해맞이 마음은 감사와 반성의 다짐이면 좋겠다. 뜻하지 않은 불운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다. 촛불이 제 몸을 태워 기도에 헌신하듯 새해는 나를 위해 빛이 되어준 사회와 이웃을 위해 작은 촛불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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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 貴 順
약력; 92년 월간에세이 천료
제 14회 수필문학상 수상
문예시대 작가상 수상
저서; 夜來가 하는 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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