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줄 아는 마음
윤 소 영
장마철. 날마다 흐리고 비가 오더니 오늘 아침에는 해가 나왔다. 높은 하늘에 바람까지 선들선들 부니 청명한 가을 날씨를 연상케 한다. 열흘 남짓해서 나온 햇빛이 이렇게 반갑고 절실한 것일 줄이야. 볕이 귀한 유럽 사람들이 해만 나면 옷을 벗고 땅 위에 드러눕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지금 시각 10시 10분. 나는 신도림역 버스 정류장에서 안산행 시외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앞차가 떠나버렸으니, 다음 차가 올 때까지 30분 이상을 고스란히 서서 기다려야 한다. 정류장에는 헌 벤치 하나 없고, 배차 시간표도 보이지 않는다. 신도림역이면 승객이 많은 곳인데, 뜸한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을 위해 앉을 곳 하나 마련해 놓지 않았단 말인가. 불만스런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으나 나는 얼른 마음을 돌렸다. 어쨌든 너무 아까운 날씨이다.
고개를 든다. 깨끗한 청색과 흰색의 하늘. 선명한 태양. 차지 않으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아침 바람. 흔들리는 플라타너스 그늘… …. 거리의 풍경이 투명한 물살처럼 밀려와 가슴에 들어찬다. 모처럼 ‘아! 세상은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렇다. 세상은 이렇듯 아름답다. 다만 내가 때때로 바라보지 못했을 뿐. 버스를 놓쳐 화창한 하늘과 바람과 포플러 나무 그늘과 함께 하며 나는 모처럼 행복감을 느꼈다.
행복. 언제부터인지 나는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행복들… …. 아이들 알뜰히 보살피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저녁 창을 바라보며 기도한다거나 집기를 정갈히 윤내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휴일이면 온 가족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자는 일, 길을 걷고 계절을 느끼고 사심없이 사람들을 만나 정을 나누는 일 같은 것들, 이런 자잘한 기쁨들은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더 높아지고 더 많은 성취를 하고 더 널리 인정받고 싶은 마음 키워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반가운 햇살 아래서, 행복이란 행복할 줄 아는 마음에서 오는 것임을 조용히 깨닫는다.
얼마 전 신문에 일찍 일류대학에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해 자살한 청년의 기사가 실렸다. 성적을 비관하여 아파트에서 투신한 초등학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녀와 동반 자살한 주부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예전보다 더 잘 살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왜 전보다 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행이 극에 달해,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획일적인 잣대 아래 상대적인 열등감을 강요하는 세상 속에선 모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집의 크기, 차의 크기, 직업, 아이들의 성적 등 일률적인 기준에 집착하여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려 하기에, 쫓기고 불안하고 화나고 자책하고 비애를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텔레비전에서 뉴질랜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 준 일이 있다. 40대로 보이는 젊은 가장이 나무를 켜서 배를 만드는 장면이었다. 작은 보트가 아닌 커다란 배를 완성하기까지 3년은 걸린다 한다. 남자는 일을 마치고 와서 여가 시간에 조금씩 조금씩 배를 만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배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는데, 다 만들면 그것을 타고 가족과 함께 여행할 계획이라는 것.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으며 밝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며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진정 원하는 바를 추구해 가는 그들의 태도가 부러웠다. 배를 만드는 그 남자의 행복은 타인과의 비교에 의해 줄어들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개인이 자신의 꿈을 소중히 하며 나름의 삶을 일궈나가고 사회가 편견 없이 저마다의 고유성을 수용해 줄 때 세상은 더 평화롭고 살맛나는 곳이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위로만 향하는 경쟁의 길을 강요하고, 당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다양한 방향으로 삶의 통로를 열어 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작은 일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과 자기 방식대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할 듯싶다.
나는 다시 내 앞에 펼쳐진 빛의 화폭으로 눈을 돌린다. 편애함이 없는 빛은 모든 곳에 골고루 내려, 구석진 곳에까지 명암(明暗)과 농담(濃淡)을 뿌려 놓는다. 학교 건물과 토큰을 파는 가게, 허름한 공장 건물이 서쪽으로 평행사변형의 그림자를 펼치고, 전신주와 정류장의 표지는 자고메티의 조각처럼 가늘고 긴 실루엣으로 기울어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와 머리, 달리는 자동차의 곡선, 색색의 간판들 위에서 경쾌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빛… 화려하면서도 정밀한 필치의 빛 아래서 모든 사물은 조화로움을 얻고 있다.
나도 내 그림자를 끌고 커다란 회화의 일부가 되어 있다. 조그맣긴 하지만, 나만의 영토와 윤곽을 가지고 세계의 한 부분을 살아 숨쉬고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밝은 얼굴로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본다. 안산행 시외버스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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