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유감 (故鄕有感)
최윤정
엄마 고향은 어디에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대뜸 물어온다. 부모의 고향을 알아오라는 숙제라 한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도 고향을 묻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초면에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해 고향이나 출신학교 따위가 필요한 것이다. 어찌하다 보니 고향을 가지지 못한 나는 그럴 때마다 적절한 대답을 찾느라 난감해진다. 따지자면 경상도 사투리에 포함되겠으나 신이 날 땐 미묘하게 수도권 억양을 띄는 내 말투는 고향을 짐작하기 아리송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고향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첫 번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한단다. 이 말을 기준으로 삼자면 출생신고를 경주에서 했으니 내 고향을 경주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내가 백일이 채 되기도 전에 영천과 포항 등지로 이사를 다녔다. 여기저기, 다녀도 너무 다녀 결혼 전 서류를 떼러 갔다가 출력기에서 줄줄이 나오는 여러 장의 이사 기록 때문에 동사무소 직원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다시 경주로 온건 여덟 살 때였는데, 경주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코흘리개 시절을 건너뛰어 버렸으니 여기를 자란 곳이라 하기엔 무언가 조건미달 같다.
어디서 자랐느냐는 물음에는 구수한 향기가 있다. 어린 시절, 저녁이면 늘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곤 했다. 어머니는 된장을 푼 멸치 다시물이 끓을 동안 내가 뒤란에서 따다 놓은 애호박을 삐져 넣으셨다. 잘린 꼭지에 수액이 몽글 맺힌 어린 호박은 냄비 속에서 한소끔 끓이면 살캉거리면서도 달큰했다. 가끔 두부를 도마도 없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숭덩숭덩 끊어 넣기도 하셨는데, 손잡이가 짧고 날이 뭉툭한 칼로 이것저것 썰어 넣고 끓인 된장찌개는 단출한 밥상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그런 된장찌개를 먹던 곳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시골 아이의 웃음처럼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대답이 물장난치던 냇가, 오후의 볕 속으로 흩어지던 물방울처럼 싱그러웠으면 좋겠다. 그러면 고향을 물은 이와 나는 서로가 언젠가 개울에서 함께 물놀이하던 사이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음식 맛이 조금 못 한 식당에서도 배부르게 식사할 수 있다. 함께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시간이 그득 할 테니까 말이다.
나고 자란 곳 모두를 충족해야 고향이라 할 수 있다면 역시나 나는 고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어머니의 부뚜막 도마질 소리와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군불 연기로 저녁이 물들던 그 시절을 마냥 고향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다.
고향의 또 다른 사전적 의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 한다. 나의 친가는 포항이지만 이제껏 친척집이라고 가본 적은 딱 두 번이다.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제사 때와 촌수를 알 수 없는 인척의 결혼식 때였다. 그것도 너무 오래전이라 어떻게 가고 왔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하고 겨우 아버지 표정 하나만 기억에 남아 있다.
열 살 무렵 고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해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주시던 포항 친척집을 찾았을 때였다. 아버지와 내가 그 집에 도착한 건 밤 열 시도 되기 전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홉 시를 조금 넘기고 제사를 지내버려, 상을 다 물린 후였다. 친척이긴 하지만 직계가족도 아닌데 한밤중까지 기다려 제를 지내주기가 귀찮았던 것일까. 마당에 바위처럼 단단하게 서 있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린 내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서글픔과 화가 서려 있었다. 방에 들지도 못하고 그 집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아버지가 돌아서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구느라 애를 먹었다.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는 옛말이 있다. 고아로 자란 아버지에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일찍이 타지로 떠돌아다니며 생활했던 터라 더 그럴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둔 내게 조상이라 하면 피를 이어받은 윗대의 아버지와 아버지들이 아니라 전기(傳記)에 나오는 위인들이 먼저 떠오른다.
조상이 살던 곳이 고향에 대한 해석이라면 나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새해가 되어도 세 식구가 머리 맞대고 앉아 떡국을 먹을 뿐이었다. 단칸 셋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명절 대란이니 뭐니 하는 뉴스가 흘러나왔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도 고향이라 할 수 있단다. 이렇게 관대한 기준으로 고향을 삼아도 된다면 나도 고향으로 삼고 싶은 곳이 한군데 있다.
시골 아이들이라도 텃세라는 게 있어 마냥 순박하고 너그럽지만은 않은데 그들끼리 수년 동안 서로 다져온 투박한 우정 속으로 이방인이 끼어들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눈치껏 혼자 지내며 어서 다시 전학 갈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이사를 징하게도 다녔다. 집안 살림이 겨우 제자리를 찾고, 친구를 사귈만하면 다시 짐을 꾸려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한 번은 한 학년을 다 마치도록 이사를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 마당이 넓은 집에 살던 때였다. 귀가 시간이 늦은 부모님을 대신 해 군불을 떼는 것은 내 몫이었지만 처음으로 내 방을 가졌고 우리 집 마당에 친구들이 놀러 왔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같은 아이들과 보낼 수 있어 좋았다. 도랑 치기를 하고 물 넘치는 댐 아래서 보리새우도 잡았다. 소꿉놀이할 때 남편과 아들, 딸도 만들었다. 달력 삽화로 나오는 수묵화처럼 은은한 시절이었다. 감자와 호박 듬성듬성 넣고 끓인 국수처럼 따스한 날들이었다. 태어난 곳도 아니고, 고작 일 년여 머문 곳을 고향이라 말해도 괜찮다면 나는 감나무 집이 있던 그곳을 내 고향이라 하고 싶다.
줄곧 객지에서만 살아온 내게 이제 남편의 고향이 네 고향 아니겠느냐며 무심한 소리를 하는 이도 있다. 내 고향 결핍증을 유별나게 생각하며 함부로 뱉는 말들이 타향을 돌며 겨우 버티던 시골 계집아이를 한순간에 삭아 내리게 한다. 고향이 없다는 것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은 것이다. 겨울의 빈 들녘처럼 마음을 스산하고 춥게 만드는 것인데, 그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요즘은 시골에도 새로 집을 지었다 하면 서양식 주택이 들어서고 도시를 벗어나도 웬만큼 들어가지 않으면 시골다운 시골을 보기 어렵다. 그러고 보니 내 아이의 고향도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뒤덮인 아파트촌이 아닌가. 남편은 집안 대대로 도시에서만 생활해 왔고 고향이 결손인 나를 엄마로 둔 것이다.
오늘 밤은 딸애와 함께 누워 오래전 그 감나무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입구의 네 번째 초록 기와집, 자주 빛 작약이 흐드러지게 핀 우물과 장대가 끝까지 닿지도 않던 늙은 감나무가 있는, 마당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면 뽀얗게 흙먼지가 일던 그 집을. 그곳을 떠올리면 친정집 솜이불같이 마냥 푸근하고 아늑해, 스르르 눈 감기는 평온함을 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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