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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미술관에서 최영림을 만나다
이현실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덕수궁을 갔다. 궁궐의 여기저기에는 키 큰 나무들이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처럼 연녹색 새순들이 곱기도 했다. 가지 끝에 함초롬히 물방울이 달린 벚나무, 살구나무, 단풍나무가 보였다.
미술관에는 최영림과 그의 스승 무나카타 시코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무나카타 시코는 오늘날 현대적 미감으로 승화시킨 일본의 전통적인 판화가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최영림의 그림이 더 관심이 가고 마음에 닿았다. 6,25때 월남한 최영림은 우리나라 고유의 민담과 설화를 기조로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표출한 화가라고 한다. 도슨트의 설명을 듣기 전 찬찬히 그림들을 훑어보면서 나름대로의 느낌을 메모했다.
그러다가 ‘아! 이 그림은!’하고 발길을 멈추었는데 오래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본 반가사유상같은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오른 발을 왼쪽 무릎 위에 얹고 반가부좌를 튼 상태로 오른 손을 살짝 뺨에 얹어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었다. 늘어진 옷자락의 부드러운 주름과 잔잔한 미소를 띤 부처의 모습은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함께 호흡을 하고 있었다.
‘해변’이란 그림 앞에서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제목이 주는 아련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을 배경으로 한 그림 속에는 해안의 모래밭이 보이고 나무 막대기가 꽂혀있었다. 어부가 걸어놓고 간 빈 어망은 하나의 섬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렴풋이 달빛에 비치는 음산한 바다와 해변의 풍경은 최영림이 그려내고자 했던 고향의 검푸른 바다색 만 큼이나 아픈 것이었을까.
그의 우울한 생활이 그대로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의 시대상을 최영림은 자기 내면의 상처와 함께 유화물감으로 덧칠하면서 삭혔으리라.
비쩍 마른 한 마리의 검정색 말이 그려진 작품 앞에서 검정색만을 고집한 최영림의 피폐해진 정신세계를 엿 본 것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
등가죽이 배와 맞붙은 것 같은 느낌의 흑마(黑馬)는 그때 화가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 아니었을까.
최영림은 가족과 재산을 모두 북에다 두고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고 한다. 검정색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혼자라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최영림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했던 시대의 아픔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전경 뒤에 비치는 후경의 그림자, 검정색은 처절하리만큼 검었고 자신만의 상실감을 그리기에는 검은 색이 가장 알맞았을 것이다.
기억의 터널에 아직도 숨 쉬고 있는 그만의 아픔을 무엇으로 말하겠는가.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화가들은 자유롭게 색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그의 캔버스는 온통 검은색으로 뒤 덮여 있었다. 검은색이 주는 가라앉은 처절함 뒤에 최영림의 생애가 나에게 아프게 전해져왔다.
그러나 북에 두고 온 처자식을 생각하며 암울해하던 그의 화풍은 1960대로 들어서면서 비교적 안정감을 찾아가는 듯 했다. 그림 속에서 보이는 안정감, 이것은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새 생명을 얻고서였던 것 같다. 이렇듯 화가는 내적 환경과 외적 환경에 대단히 민감하다.
차츰 최영림은 꽃을 그리기 시작한다. 전기의 작품들이 거칠고 빠른 붓으로 대상을 어두운 색조로 표현한 것이었다면 그림 ‘꽃바람’속에는 여자가 있고 꽃이 피어 있다. 역동성이 느껴지기도 하고 볼이 발그레한 여인들의 나신은 오히려 건강한 에로시티즘을 선사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을 짓게 한다. 크고 둥근 얼굴의 벌거벗은 여인들이 뛰어 가는 그림은 에로틱하지만 외설스럽지가 않고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진다.
검정색에서 황토색으로 이어지는 색의 변화는 그의 삶의 방향성을 말하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서야하는 화가의 색이란 자연을 닮아야 한다. 색의 변화는 무엇이겠는가? 세상에 대한 모든 적대 감정을 지우고 저절로 자기 삶에 동화되어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최영림의 황토는 대지이며 자연이지 않는가. 민담과 전설과 설화를 기조로 표현한 설화시대의 작품은 캔버스에 진흙과 모래를 혼합한 마티에르 효과로 에로티시즘을 가미한 화풍은 토속적인 정취를 표현 하고 있다. 노란 저고리를 입고 꽃 속에 앉아있는 ‘심청이’의 그림은 코도 입도 눈동자도 제 자리에 그려져 있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쏠려있다. 최영림은 왜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지 않고 예각으로 기우려 그린 것일까? 남쪽 하늘아래서 북쪽을 향한 최영림의 그리움이란 자유를 얻어낸 것과는 다르게 갈등의 다른 표현이지 않았을까?
최영림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문학과 그림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았다. 문학이란 자신의 내면세계를 문자언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화가 역시 때로는 화려한 색채언어로 때로는 무채색의 강렬한 선(線)의 이미지로 자신의 내면을 통렬히 쏟아낸다.
최영림의 그림에는 시대를 건너갈 때마다 느꼈던 아픔과 고통이 잘 반영되어 있었다. 무한한 시간의 좌표 위에 남기고 간 작가의 혼. 결국 예술은 한 영혼이 걸어가는 발자국이란 말을 조용히 되뇌어보았다.
사람은 죽는 순간 줄어든 몸무게는 영혼이 빠져나간 동전 다섯 개의 무게 12g이라고 말하는 시인도 있다. 하지만 예술의 혼이 남긴 흔적은 그 어떤 무게나 질량으로도 가늠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전시회장의 돌계단을 내려오는데 풍경소리처럼 청아한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 봄비에 젖은 잎새들이 싱그러웠다. 덕수궁 뜰에는 눈물처럼 봄비가 내리고 그 옛날 스란치마 자락을 끌며 궁궐 뜰을 거닐었을 곱디고운 왕의 여자들의 모습이 흐릿한 구리거울로 어른거린다.
봄은 소리 없이 빗소리에 묻혀 지나가지만 예술가의 혼을 따라 다정한 외출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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