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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빛 심부름
이현실
웬 전언傳言이 이리 늦었는지 모르겠어요. 무수히 많은 꽃들이 피고 지며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무심했던 내가 경칩을 일주일 앞둔 오늘, 느닷없는 봄소식에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이기울1) 마을에 사는 친구의 노루귀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가 달떠 있었습니다. 집 앞 문수산엔 아직도 희끗희끗한 잔설이 남아 있는데 앞마당 봄볕은 유난히 따스하다고 하네요. 새움을 틔우는 잡초 사이로 삐쭉 고개를 내민 노루귀 꽃. 여덟 개 혹은 아홉 개의 손톱만한 꽃잎을 조롱조롱 매단 진한 남색 꽃이 다 지고나면 비로소 연두색 잎이 나온대요. 잎사귀가 노루귀처럼 우묵하다하여 노루귀꽃 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네요.
봄의 전령사라는 산수유, 진달래보다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려준 노루귀꽃을 떠올리면 빙그레 미소가 흐릅니다. 절기를 따라 피는 식물도 이렇듯 새 소식을 알려오는데 노루귀꽃은 그 귀로 무슨 소리를 몰래 듣고 있을지? 갑자기 오래 묵은 체증 같은 생각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먹먹해져오네요.
기억의 창고에서 꺼낸 빛바랜 편지 한 통, 수 십 번이나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냈던 탓인지 봉투 끝에는 보풀이 일었습니다. 실밥이 풀어진 헌 내복처럼 손등으로 쓸어보기도 하다가 살그머니 보풀을 당겨도 보았습니다. 명주실처럼 보드라운 그 보풀은 지나간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슬그머니 풀려나오네요. 하얀 편지봉투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어요. 그러나 나는 알아요. 누가 이 편지의 수신인 인지를. 은밀한 심부름을 시키던 갑순이 언니는 내게 자근자근 귓속말을 했었지요.
“아무도 모르게 살짝 전해 줘야해”
언니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내 볼을 살짝 꼬집곤 했지요. 나는 언니의 충직한 우체부였지요.
갑순이 언니 네는 우리 집 문간방에서 꽤 오랫동안 세를 살았어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쯤 이었던 것 같은데요. 방이 6개 이었던 우리 집은 문간방을 세를 놓았지요.
어느 날 어머니는 뒷집 할아버지께 부탁해서 붓글씨로 쓴 큼지막한 종이를 집 앞 전봇대에 단단히 붙여놓았지요. “방 2개 세 놓습니다”
벽보를 붙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언니 네는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지요.
모두 여섯 식구가 이사를 왔는데요. 언니에게는 남동생이 세 명 있었지요. 막내인 갑식이는 언니 신발 뒤 껌 딱지처럼 붙어 다녔어요. 한 두어 달이 지난 후 언니의 연년생 자매가 짠! 하고 또 나타났는데요. 아이가 많으면 방을 얻을 수 없어서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맡겨두었다가 이삿짐을 푼 후에 데려왔다고 했다나요. 언니의 동생 갑식이는 저보다 서너 살 어렸는데요.
가끔씩 나와 말다툼을 하곤 했어요. 하도 오래 되어서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요. 갑식이가 내게 약을 올릴 때면 난 꼭 비장의 무기처럼 휘두르는 말이 있었답니다.
“이거, 우리 집이야”
그 말 한 마디면 갑식이는 왕소금 뿌려 논 미꾸라지처럼 퍼드덕 대다가 금세 풀이 팍 죽어 꼬리를 내리는 거예요.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회심의 미소를 미처 띠기도 전에 갑순이 언니가 어디에서 서슬 푸르게 나타난 겁니다. 꽁지에 갑식이란 놈을 달고 말이죠.
“야! 이 가시나야! 니 뭐라캤노? 이기 너거 집이라꼬? 그라모, 좋다!”
갑순이 언니는 부러진 파란 색 분필로 우리 집 현관 앞에 가로로 금2)을 확 그었어요.
“니, 이 금 넘어오면 죽을 줄 알아라. 이 금 부터는 우리 집 앞이니까. 우리 땅이다 알겄나?”
갑순이 언니는 큰 소리로 두 눈을 부라리며 무섭게 야단을 쳤어요. 기세등등하며 몰아붙이던 갑순이 언니의 호령에 정말이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꼼짝 없이 집 안에 갇혀 있었지요. 그러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요. 대문 뒤쪽에 있는 변소를 갈려면 언니가 그어 놓은 금을 넘어야하는데 거기서부터는 언니네 땅이었으니까요. 진짜로 언니네 부엌 문 앞에부터는 모두 언니네 땅이었으니까요. 참다, 참다못해 오줌을 지릴 정도로 더는 못 참겠다 싶을 때쯤에야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항복을 단단히 받아내고서야 언니는 나를 풀어 주었지요.
두 칸짜리 전세방에 올망졸망 여덟 식구가 모여 살던 언니 네 부모님은 연년생이었던 딸들을 다시 시골로 보내고요. 그런지 몇 년이 흐른 후 에야 조그만 양철집을 사서 이사를 했답니다. 우리 집 뒤쪽을 돌아 몇 집 건너의 골목 초입에 언니집이 있었답니다. 아담한 키에 하얀 피부, 초롱초롱한 언니의 눈동자는 참 매력적이었답니다. 갑순 언니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친구들이 몰려 있었으니까요. 그런 언니가 꼭 내게만 심부름을 시키는 겁니다. 까만 마분지 표지에 컴퍼스로 구멍을 두 개 뚫어 끈으로 묶은 앙케트 노트를 우리 동네의 칠성이 오빠에게 전달해주고 오라는 겁니다. 여드름이 덕지덕지 앉은 그 오빠는 참 순하고 착하게 보였어요. 그 당시 명문으로 알려진 P고등학교를 다닌 걸 보면 상당히 명석했던 것 같아요. 갑순이 언니는 일주일 쯤 뒤에는 앙케트 노트를 다시 받아오라곤 했어요. 난 갑순이 언니가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심부름을 다녔지요.
지금처럼 봄 햇살 가득한 오후였을 거예요. 갑순이 언니가 괜스레 얼굴이 빨개져가지고 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면서 또 심부름을 시키더라고요. 평소의 씩씩한 언니답지 않게 말이죠. 칠성이 오빠에게 아무도 몰래 살짝 전해 주고는 좀 기다렸다가 해답 까지 받아오라고 하면서······. 근데 웬일일까요? 그날따라 왠지 그 편지가 무지 궁금해지는 거예요. 바짝 궁금증이 일어 그 편지를 살짝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살짝 뜯어보고 감쪽같이 붙여서 전해주면 되리라고 생각한 거죠. 아. 춘향전에도 있지 않았든가요. 춘향의 편지를 가지고 구관 댁舊官宅 으로 가던 종놈의 편지를 이 도령이 수작을 부리며 하던 말. 행인行人이 임발우개봉이 臨發 又開封라든가요? 심부름 하는 것도 내용을 알아야 잘 전해주든가 말든가 하지 않겠어요?
얼마나 야무지게 밥풀로 꼭꼭 눌러서 봉했는지 봉투는 쉽게 뜯어지지 않았어요. 아참 그 시절엔 풀보다는 보리쌀이 드문드문 섞인 밥알로 편지 봉투의 입을 봉하기도 했답니다. 밥풀로 야무지게 붙어 있던 편지 봉투는 웃기게도 면이 고르지 않았어요. 갑순 언니가 밥알을 으깨어 봉투를 봉했지만 어디 밥알이 믹서에 간 것처럼 곱기야 했겠어요? 난 침을 살짝 발라 보았습니다. 밥알이 뭉쳐진 곳은 침에도 어찌 할 수 없었고 편지봉투가 어느 정도 불으면 순하게 열려질 거라는 계산을 한 거죠. 그러나 완강하게 입을 다문 봉투는 그리 호락호락 피봉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은근히 부아가 나던 난 '무슨 내용이기에 요다지도 완강하게 버틴다냐?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연필 깎는 칼로 편지 봉투의 가장자리를 조심조심 건드려 보았습니다만 쉽지가 않더군요. 에고고! 그런데 어쩌나! 그리 조심을 했건만 침에 불어 주물럭대던 편지봉투는 밥알과 뒤엉킨 채로 너덜너덜해지고 말았습니다. 살짝 열어보고 감쪽같이 땜질을 해서 전해주리라던 애초의 마음과는 달리 정말이지 내 손에서 임발 우개봉臨發 又開封이 되어 아직까지도 편지를 전하지 못했네요.
아, 잊을 뻔 했습니다.
“칠성이 오빠가 해답을 안 주더나?”
“언지예. 편지만 읽어보고예. 기냥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들어갔어예..”
피봉을 곱게 접은 언니의 분홍편지는 발칙한 나의 거짓말로 순간 허공에 날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버들강아지 물오르는 먼 산엔 앞 다투어 봄소식이 전해오고 있네요. 아파트 창틀에 끼인 채 낑낑 대는 갑순이 언니의 편지가 봄바람에 살며시 고개를 내미는 것 같아요. 칠성이 오빠에게 사랑 고백을 했던 그 분홍편지 지금 보내도 될까요? "이런 마음 처음" 이라며 수줍게 웃던 그 분홍편지 말이예요. 갑순 언니와 칠성오빠의 여리디 여린 사랑놀이에 봄이 피어나고 있네요. 꽃망울 하나 터드리고 가던 그 봄 말이예요.
201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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