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미나리
안옥수
사월 초, 아침 공기는 싸늘하더니 정오를 지나자 봄볕이 볼에 따뜻하게 느껴진다. 머지 않아 벚꽃이 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다. 한참을 기다려도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다. 아마 푸른 신호가 끊긴 바로 뒤에 내가 도착했나보다. 신호등에서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두어 발쯤 떨어진 가로수 밑에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쌀부대인 듯한 자루를 펴놓고 그 위에 파란 나물을 소복하게 올려놓고 앉아있다. 한 발짝 다가가서 보니 아직도 연녹색을 다 벗지 못한 여린 돌미나리다.
돌미나리를 보는 순간 초등학교 시절 외가에 갔을 때 이웃집 언니 따라다니며 우물가 논두렁에서 돌미나리를 뜯느라고 운동화가 흠뻑 진흙탕에 빠졌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그날 저녁 밥상에 오른 외할머니의 새콤달콤한 돌미나리 무침의 맛과 향기는 신기하리만큼 나의 미각을 자극했다. 나는 봄을 씹은 듯 했다. 그 후 봄의 남새를 보면 곧 그 맛이 떠오른다. 돌미나리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벨소리가 울린다. 바라보니 파란 불이 들어왔다. 길을 건너갈까 돌미나리 쪽으로 갈까 망설이는 순간, 역시 머리가 허연 할머니 한 분이 그 돌미나리 앞에 앉는다. 돌미나리를 사려나 보다. 나도 길 건너가는 것을 포기하고 돌미나리 쪽으로 발을 떼었다.
두 할머니는 돌미나리를 놓고 다투는 것 같았다, 파는 할머니가 돌미나리 한 줌을 사러온 할머니의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주면 사러온 할머니는 다시 봉지에서 돌미나리 한줌을 꺼내 놓는다. 더 달라는 싸움이면 사러 온 할머니가 한 줌을 가져가고 파는 할머니가 사러온 할머니 주머니에서 한 줌을 빼내야 하는데... 나는 돌미나리 사러 온 것은 잊고 그들의 다툼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바짝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할머니들, 왜 돌미나리 한 줌을 봉지에 넣었다 뺐다 반복하세요?” 사러온 할머니는 식구가 적어서 덤이 필요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팔라고 해도 자꾸 덤이라고 넣어주기에 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파는 할머니도 질세라 말한다. “논두렁에서 공으로 뜯어온 것, 좀 더 드리고 싶은데 늘 이 할머니는 이런다오.”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이런 다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지난날 가르치던 대학생들 생각이 떠올랐다. 수 백 만원의 등록금을 내고도 삼월에 개강하면 첫 주는 신입생 환영회니 수업을 빼달라고 하고, 사월이 되면 과 결집을 위해 MT가야 한다고 하고, 오월이면 과 대항 운동회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사도 한 줌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우성인데 한 학기, 16주 강의, 그 중에서도 중간고사와 학기말고사 빼면 14주인데 그것마저 빼달라고 하느냐고. 등록금을 14로 나누어보라고. 너희들은 정말 ‘선한 백성’인 모양이라고.
두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파는 할머니는 옷도 구김살이 가고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고 주름살이 깊었다. 사는 할머니는 옷도 깨끗하고 주름살이 깊이 잡히지 않았다. 노인인데도 고와 보였다. 나는 그들의 다툼에 끼어 들었다. 두 분이 주고, 내놓고 하던 돌미나리를 내가 사겠다고. 두 노인은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아름다운 노인들이다. 사는 할머니는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나는 돌미나리가 든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일어서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행동을 내가 한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오늘 아침, 집을 나오기 전에 두 돌 지난 손녀가 제방에서 나와 “하머니, 밥 묵자.”한다. 할머니는 밥 먹었다고 했다. “하머니, 많이 묵어서～요?”한다. 많이 먹었다고 했더니 “하머니, 참, 착하다～.” 나는 폭소를 했다. 오늘은 내가 착해 보이는 날인가보다. 손녀도 날더러 착하다고 하고, 돌미나리 사는 할머니도 나에게 고맙다고 한다.
돌미나리 봉지를 들고 그 새콤달콤한 맛과 향기를 되새기며 파란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린다.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8-30 2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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