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여, 아즈텍이여
조 한 금
잠깐씩 여행을 다녀온 실력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멕시코를 말하기에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미국에 넘겨준 이후의 엘파소 부근의 멕시코는 궁핍 속에서 허덕이는 초췌한 모습인데 반해, 카리브의 해변에 있는 칸쿤의 휴양지는 참으로 세련되고 호사스러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빛인 카리브 해의 바다를 끼고 있어서인지 고급 호텔이며 레스토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고,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외국인 관광객을 의식해서 꾸며놓은 화단의 조경은 가히 작품들이었다. 갖가지 동물모형으로 다듬은 식물들이 길가로 늘어선 시가지는 깔끔하고 여유로워 보였는데, 세계의 지도자들이 해변에 모여 회담할 만큼 각광 받을만했다. '칸쿤'이란 마야어로 '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녀는 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칸쿤의 바닷물에 잠시 몸을 담근다. 그러나 머무를 시간이 길지 않아 하얀 백사장의 카리브 해에 다녀간다는 신고식만으로 고작 1시간을 할애했다. 유럽의 대부호들은 이곳에 별장이 있으니 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어 함께 즐기리라. 여유란 노력해서 거머쥔 사람들만의 특권일 테니까.
유카탄 반도의 최대의 유적지라는 치첸잇사를 찾았다. 마야어로 '치첸'은 '샘의 언저리'를 뜻하고, '잇사'는 마야 부족의 이름이라고 했다. 메리다의 정글에서 번성한 마야족은 수많은 부족들의 집합체였기에 각 마을마다 자기네 부족들만의 독특한 게릴라 전법으로 외세에 대처했으며 또한 부족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지배계층이 있어, 아즈텍족들과 전쟁은 물론 스페인이 정복할 때도 공략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즈텍족은 지배계급만 무너뜨리면 80%가 무너졌지만, 마야족은 어느 한 지배계층을 점령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부족들이 다른 정글 속에 살고 있어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마야의 피라미드는 어느 것이나 신전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치첸잇사의 이 피라미드 신전은 한 면을 91개의 돌계단으로 쌓아 올렸으니 4면에 모두 3백64개의 계단이 있고, 거기에 맨 위의 꼭대기 한층은 전체를 큰 돌 하나로 덮어 3백65 계단이 이뤄진 것이다. 그게 바로 1년이며, 4면은 4계절을 의미하고, 3월 21일과 9월 22일은 춘분과 추분으로, 이때는 태양이 신전을 지나면서 옆으로 비껴든 햇살이 뱀 모양이 된다는 것이다.
치쳇잇사는 1200년~1500년 사이에 최고로 번성했던 곳. 노예계층이 주로 마을을 지켰는데 마을 중앙엔 왕족과 귀족이, 주변에는 상인이, 그리고 변두리에는 농민이 살았다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인데도 환경을 생각해 말(馬)이 없었고, 장신구로는 금과 은 따위는 쓰지 않을 만큼 호화로웠다고 한다.
옛날 번성했던 장방형의 건물 수백 채 가운데 겨우 3백여 채의 집터만 발굴되었을 뿐인 이 지형을 전체로 보기 위해 신전 꼭대기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이곳의 돌계단은 경사가 심하고 계단 폭이 넓어 한 계단 올라서면 다음 계단이 가슴 앞에 바싹 다가와 턱을 받치고 서 있는 듯 했다. 정상은 평평했다. 툭 터진 사방을 둘러보니 한눈에 들어온 마야의 유적군群이 옛날의 번성을 말해주는 듯했다. 20만 명을 수용했다는 이 넓은 터전에 지금은 신전만 남아 있으니 이들의 멸망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정상에서 동서남북 여기저기 돌아다녀 본다. 밑을 내려다보니 마치 절벽 같아 발이 간지럽고 무섭다.
북쪽으로는 산 제물을 바쳤던 샘이 있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주로 고아나 과부 노예를 재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때는 살아나오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고 허리에는 무거운 돌까지 매달아 빠트렸다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층계를 오르기 직전에 본 '후에가 데 뻴로따(운동경기의 일종)' 경기장에서는 7명씩 양 팀으로 나누어 공을 무릎으로나 허리 팔꿈치 등으로 링 안에 집어넣는 일종의 농구 경기 같은 것을 했는데, 이들은 7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으며 0이라는 숫자를 이해하고 있어 그 옛날에도 천문학을 수준 높게 연구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기는, 이기는 편이 제사장이 되고 지는 편이 산 제물로 바쳐졌다는 무시무시한 얘기를 전설로 안고 있었다.
태양의 신전이며, 달의 신전이며, 자연을 숭배하는 신전을 지어 자연을 달래고 거역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요즘의 과학으로 해석한다면 천재지변의 가뭄이나 장마 태풍 홍수 등의 재해에서 모면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더구나 정글 속이라면 당연히 뱀이 많았을 것이고 그것을 사람들이 잘못 건드리면 물려 죽었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 그걸 잘못 이해한 이들은 뱀을 신으로 받들어 모신 건 아니었을까.
스페인이 처음 이곳을 정복했을 때, 가톨릭을 믿는 정복자들은 뱀을 사탄으로 보고, 뱀 문양으로 장식된 그 신전들을 깡그리 부시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서로의 신앙에 대한 마찰이 대단했으리라. 사람의 믿음이란 골수 속에 한 번 박히면 쉽사리 바꿔지지 않는 법, 그래서 마야인 들은 성전聖戰을 치루면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그곳을 사수하다가 사멸됐을 것이라는 추측을 나 혼자 해본다.
수만 점의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 한눈에 마야며 아즈텍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즈텍의 달력이 내 눈길을 끌었다. 큰 원 안에 18개월의 월력이 들어있고 그것은 다시 1달을 20일로 잡아 18개월 곱하기20일=360일이니, 여기에 동서남북과 중앙의 방위 까지를 합해 365일을 1년으로 잡았고 계절과 절기까지 구분해 놓았다. 그뿐인가, 신전이나 건축물의 축대 등은 현대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공법으로 완성된 것들이라니 옛 그네들의 지혜와 안목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앞섰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페루가 선이 곱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농경문화의 역사였다면, 멕시코는 선이 굵은 수렵문화였음을 본다. 페루에서처럼 다산을 장려한 토기 같은 것이나 직조 등의 유물보다는, 사냥을 했던 크고 굵은 선의 유물들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그들이 먹고 살았던 식량의 증산 방법으로, 끊임없이 연구해온 옥수수의 종자개량 변천사가 있었는데 너무나 흥미롭고 귀한 자료였다. 처음엔 갓난아기 손가락 같은 크기에서 거듭된 종자개량으로 지금의 슈퍼 옥수수가 되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걸어두었다.
사람의 사후를 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못된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건조한 기후로 인해 잘 썩지 않아 미라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형태의 흉물스런 사후 모습들이 볼거리로 놓여있는 미라 전시실을 돌다가 어느 한 곳에 이르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발이 딱 붙어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둘러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유물이다. 섬뜩했다. 건조한 사막의 기후와 통풍으로 잘 마른 목 없는 얼굴이 전시물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심코 그게 뭔가 하고 진열장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 경악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더 가깝게 자세히 관찰해 보니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었는데, 속눈썹이 그대로 있고 몇 가닥 되지 않은 빈약한 八자 수염도 그대로인 채 목이 잘려 실눈을 뜨고 북어 대가리처럼 건조되어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목이 잘렸으며, 무슨 한이 그리도 많아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껏 저렇게 실눈을 뜨고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 걸까.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썩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나는 친정아버지의 사후의 모습을 이장할 때 뵌 적이 있는데, 뼈만 남은 앙상한 두개골을 보고 겨우 생존 시의 모습 한 컷을 떠올렸던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묻힐 수 있는 것도 행복한 것임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그 곳을 나와서도 그 충격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지워지질 않아 괴로웠다. 농부로 보이는 순박한 모습의 그 주검, 죽은 자는 누구였으며 죽인 자는 누구였을까.
멕시코시티의 3문화 광장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즈텍의 역사와 식민지 시대와 현대, 세 시대의 세 개 문화가 한자리에 공존해 있는 것이다. 16세기의 교회, 아즈텍 시대의 유적, 그리고 현대 건물들이 한 자리에 어우러져 있다. 16세기 초 아즈텍의 상업도시(톨라테롤코)였던 이 거리에서 스페인 군에 대항했던 아즈텍 군은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뿔뿔이 흩어지면서 아즈텍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3문화 광장의 대리석 비문에는 톨라테롤코의 전투를 가리켜 "그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그것은 혼혈의 민족, 즉 오늘의 멕시코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광장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과달루페 성당이 있었다. 유일하게 흑인 성모를 모시는 곳이다. 로마 교황청에 의해 가톨릭 3대 기적의 사원으로 공인을 받은 곳인데, 세계 각지에서 특별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든단다. 스페인이 아즈텍을 점령하고 10년 후인 1531년 어느 날, 테페야크 언덕을 지나가던 인디오 후안디에고의 앞에 갈색 피부의 성모께서 나타나 "나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다. 사제에게 가서 이곳에 나의 성당을 지으라고 전하라."고 해 그는 즉시 사제에게 달려갔지만 사제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낙담한 디에고가 그 언덕을 다시 지나는데 이번에는 12월인 겨울에는 피지 않는 장미꽃 한 다발을 주시면서 "다시 가서 말하라"고 시켜 신부에게 가서 장미를 싼 망토를 펼쳐 보이자 찬란한 광채와 함께 성모의 얼굴이 그 망토에서 떠올랐다는 것이다. 사제는 그제야 이 신대륙에도 수호 성모가 나타났다고 기뻐하면서 테페야크의 언덕에 성모를 모시는 성당을 크게 지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망토의 천은 용설란으로 짠 천연섬유로 보통 1세기가 지나면 헤지기 마련인데, 그것은 별다른 보호대책도 없이 더구나 염도 높은 환경에서 5세기 동안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지금도 헤지거나 변질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에고와 사제와 통역 등 성모출현 당시 가장 가까이 서있었던 세 사람의 얼굴이 성모의 눈동자에 찍혀 있었는데 그 사진을 분석한 결과 사실로 판명되었으며 그 기적의 망토에 새겨진 그림의 염료 또한 천에 배어들지 않은 동물성도 식물성도 아닌, 이 지구상에는 없는 것이라는 과학적인 분석이니 그 신비한 기적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나는 성당을 향해 층계를 오르다가 무릎걸음으로 한 계단씩 오르며 기도하는 여러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냥 걸어 오르기도 숨차고 힘든 수많은 계단을 '슬행膝行참배'라며 무릎으로 걸어 오르고 있었다. 이들의 대단한 신심 앞에서 나를 돌아보니 부끄럽기 한량없었다. 정성은 들이지 않고 거저 주시라고만 요구하지 않았던가를 반성하게 했다.
멕시코, 사막에 자생한 용설란으로 천연섬유를 만들고, 속잎은 풀케라는 우유 같은 술을 제조하며, 용설란의 뿌리로 담근 술 데낄라를 마시는 그들은 이제 그들의 술 데낄라와 부침개 따꼬와 살사 춤으로 서서히 우리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세계는 하나다. 보존할 가치가 있는 귀한 자료나 유물들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가 함께 공유하고 보존하며 사는 이 때. 우리의 옛것도 발굴하고 보존해 많은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되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멕시코에 대한 서툰 얘기를 여기서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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