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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와 가락지
오길순
부모님이 궁금하다며 천리길을 불현듯 떠났다가 돌아온 남편이 양복 안 주머니에서 꺼내 놓은 것은 비단 저고리 고름 한 짝이었다. 미색 옷고름 속에는 금비녀와 뚝뚝 잘려진 금가락지 한 쌍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뭐야? 어머니께서 얼마나 아끼시던 것들인데?"
시어머니가 간직한 물건 중 가장 큰 보물일 비녀를 보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별별 생각이 파문으로 다가왔다. 동네에 경사라도 있으면 오일장에라도 나설 적이면 금비녀에 검은 색실을 찬찬히 동여 감아 낭자를 깔끔하게 고정하던 시어머니. 미색 한복에 하얀 쉐터라도 받혀 입으면 아직도 발그레 곱기만 하던 시어머니 얼굴. 토방을 내려서는 노란 비녀의 뒷모습은 하얀 털 쉐터와 눈부시도록 잘 어울렸다.
먼 길에 나설 때는 가방 깊숙이 비녀를 넣으셨다. 대문도 열어두는 마을인심에도 혹시 어떨까 허드레 옷속에 훌훌 깊이 넣어 보관했다. 때로는 급한 농비라도 필요했으련만 장식품으로 소중히 남겨 두기까지에는 시어머니의 각별한 속뜻이 담겨 있었나 보았다.
밭을 맬 때나 들일을 할 때도 가락지를 끼셨다. 언젠가 오래 전 장날, 금반지를 구리반지로 바꿔 끼고 와서는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억지로라도 잘 한 일이라며 사기꾼들을 한 마디 원망하지 않던 시어머니. 다시 해 드린 후에는 또 잃을까봐선지 그 날부터 가락지는 항상 왼손 약지손가락에 살결처럼 부착되었었다. 뚝뚝 잘려있는 가락지에는 굵은 손마디에 갇힌 채 오래 동안 닳아 온 무늬와 각진 모양이 굽이돈 세월의 어머니 허리처럼 휘어 있었다. 이제는 소중한 것도 그리운 것도 다 놓아버리는 실습을 하시는가. 아니 소중하고 그리운 사람에게 하나 둘 마음을 나누는 연습을 하시는가. 너무 오래 살까 걱정이라더니 노년의 정리를 하시는가.
어쩌면 극구 사양하는 무둑뚝한 아들에게 둔 곳 몰라 잃느니 잘 보관해 두라는 말로 달래듯 넣어 주더라는 저고리 고름. 고름 속의 비녀를 보면서 허리 굽은 시어머니 모습이 어른거려 가슴이 알싸해진다.
내 가난했던 신혼시절, 시어머니의 은비녀는 왠지 색깔이 푸르렀다. 언젠가는 내가 금비녀를 해 드려야지. 시어머니의 칠흑같은 머리숱에 푸르도록 하얀 은비녀가 작은 듯 매달린 모습은 젊은 내 가슴을 쓸쓸하게 했었다.
자신의 생일 한 번 번듯이 치루는 걸 결코 사양했다는 분. 간소하게 지낸 생일로 변변한 선물이 있을까? 회갑에는 좋아하실 것을 해 드리고 싶었다. 그 시절 물건들은 왜 그리 비싸던가. 두루 고민 하다가 결혼 예물을 생각했다. 이삼년 된 나의 결혼 목걸이는 금비녀로 바꾸어졌다.
처음으로 금붙이를 만져 보시는 시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다. 아니 일곱이나 되는 자녀들의 교육에 금붙이가 가당하겠는가. 있어도 벌써 금액으로 환산되었을 것을. 발그레 상기된 미소로 비녀를 어루만지며 기쁨을 표현하는 시어머니를 뵈며
"무엇하러 비싼 것을 해 왔냐, 애썼다." 한 말씀 하셔도 좋으련만 어쩌면 며느리 마음도 모르실까? 치사까지 바랬던 옛 기억이 구겨진 저고리 고름 속에서 부끄러움으로 살아났다. 어머니께 그저 몇 십년 보관했더란 말인가.
지난 가을 시아버지의 입원을 계기로 시어머니는 더욱 이승의 덧없음을 실감하신 것 같다. 팔순을 넘기고 미수 가까이 살아온 동반자가 곁을 떠난다면 무엇이 소중하랴! 모처럼 해드린 보청기마저 아들의 몇 푼이 소중해 안타까워하며 허리 굽은 노구로 영감님의 간병을 고집하시면서 평생 지켜온 숱 많은 낭자머리를 짧은 커트로 잘랐다.
젊었을 적 띄엄띄엄 읽던 글자마저 어느새 잊어버려 입원실의 홋수는 물론 도시의 복잡한 곳도 느낌으로 찾으시는 시어머니. 아니 복잡한 도시보다 흙에서의 삶을 지키고자 우리의 간청을 내저으시는 시어머니. 실은 우리들의 자유로운 생활에 짐이 되기 싫은 배려임을 왜 모를까?
이제는 시계나 달력의 숫자 그리고 전화다이얼 누르기도 잊으셨나보다. 해 뜨고 달 지고 곡식의 파종과 결실로 세월을 어림해 가니 그 정확한 자연과의 대화는 기계나 문서가 무어 필요하리요. 오랫동안 축적된 시어머니의 예리한 이성 앞에서 때로 얕은 지식이 부끄럽기만 하다.
일평생 책 한 권 안 읽었을 시어머니. 그렇건만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생각조차 아니 하시니 타고난 품성인가. 터득한 지혜인가. 깊은 사고의 결과인가. 자랑이나 과시같은 어설픈 언행은 꿈에도 생각조차 아니 하며 글 읽는 것조차 사치로 여겼을 분이기에 아는 몇 글자 마저 잊어 버렸을 때 차라리 홀가분 하셨으리라.
세상만사 돌고 돈다지만 다시 내 것으로 돌아온, 평생 내게 해당되지 않을 비녀와 가락지가 이토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분의 깊은 속뜻이 오래도록 머무를 것 같은 때문이기도 하다.
<<한맥문학>>2001.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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