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찌면서 / 유해자
어머님, 진달래가 이 산 저 산에서 피어나기 시작하던 봄날 어머님 세상 떠나셨는데, 어느새 봄꽃들이 져버리고 신록이 아름답습니다. 아파트 화단의 붉은 영산홍 꽃무더기 앞을 지날 때마다 꽃을 좋아하시던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님이 보셨다면 ‘야야, 꽃이 이쁘기도 하다’ 하시며 웃으셨을 텐데요.
오늘은 저녁 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갔다가 보라색 가지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지로 반찬을 만들 때면 그때 일이 생각나곤 합니다. 제가 결혼을 했던 그해 여름, 시댁에 내려갔을 때였지요. 어머님은 부엌에 있는 저와 막내 애기씨에게 가지가 다 익으면 곤로불을 끄라, 하시곤 잠시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자신이 없어 대답조차 못했던 저는, 어머님이 나가신 뒤 냄비뚜껑을 두어 번 열어보다가 슬그머니 석유곤로의 불을 꺼버렸어요. 너무 물러 못쓰게 되기보단 차라리 덜 익어서 다시 찌는 쪽이 낫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조금 뒤, 어머님은 돌아오셔서 냄비뚜껑을 열어보시더니 애기씨를 보고, 가지가 다 익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불을 껐냐고 나무라셨지요. 손아래 시누이가 저 때문에 애먼 소리를 듣는 걸 보면서 가슴이 콩콩 뛰었어요. 그런데 그저 안절부절만 했지 어머님께도 애기씨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어머님, 아직도 가지를 찌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요. 불을 켜 놓은 사실을 깜박 잊어버려서 낭패를 당하는 때가 더러 있어요. 이렇게 둔한 제가 어머님의 세 째 며느리로서 고부(姑婦)의 인연을 맺고 지낸 세월이 25년이었습니다.
여고 졸업식을 마친 며칠 뒤, 몇몇의 친구들이 모였었지요. 어느 여관에 유명한 점쟁이가 머물고 있는데, 우리 한 번 재미삼아 가보자고 누군가 말했어요.
점쟁이는 저를 보고 “엄마가 둘이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첩을 얻든가, 엄마가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이었어요. 날벼락 같은 소리였지요. 그 날, 저는 친구들을 두고 혼자서 먼저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왜 이리 일찍 왔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난 빨리 엄마를 두 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미리 액땜을 하는 양방(良方)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택해 수양어머니를 맺던가, 얼른 결혼을 하여 시어머니를 두는 방법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이에 결혼을 할 수도 없는 일이며, 수양어머니를 맺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 7년이 지난 후에야 결혼을 하게 되었던 저는 점쟁이가 했던 말이 떠올라 드디어 어머니가 둘이 되었구나, 다행이구나, 생각했어요. 혹, 시어머님이 안 계시는 집안과 혼인을 할 수 도 있는 일 아니었겠어요.
어머님은 연약한 친정어머니와 달리 체격이 크고 대범한 성격이셨지요.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사리에 밝으며 이웃들에게 너그러우셨어요. 전 그런 어머님의 성격이 좋았지만 어렵기도 했어요. 한 번은 어머님 앞에서 어린 아들놈을 꾸짖을 때였지요. 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잔소리를 반복하는 제게 어머님은 “됐다, 애를 야단칠 땐 한마디로 따끔하게 하고 말거라”라고 하셨지요. 팔 남매를 키운 어머님의 지혜였습니다.
아버님이 계셨을 땐, 연례행사처럼 봄이면 두 분이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하셨지요. 준비해 오신 고추장거리들을 들고 세 명의 아들집을 돌며 집집마다 항아리 그득 고추장을 담아 주곤 내려가셨어요. 음식을 하는 일에 자신이 없는 저는, 두 분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으면 언제나 안절부절 했습니다. ‘딸 같은 며느리’ 라시던 아버님은 편안하였지만, 어머님은 제 서툰 살림솜씨를 다 아실 것만 같아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님을 뵙게 되면 “어머님”, “어머님” 하고 어린아이처럼 연신 어머님을 따라다니며 불러대기만 했지요. 그리곤 어머님 옆에 앉아, 어머님이 당한 시집살이 이야기라던가 살림을 일궈낸 이야기, 남편의 학창시절 이야기 등,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지요. 어머님은 아셨어요. “예”, “예, 어머님” 하고 매사에 대답만 찰떡 같이 잘 할 뿐이지, 약지도, 당차지도 못하여 집안일을 의논하거나 무엇을 맡길만한 믿음직한 며느리는 아니라는 것을요.
곤로불을 꺼놓고 가슴 두근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가지를 찌면서 어머님이 안 계시다는 생각에 가슴이 멥니다. 어머님, 인연 맺은 사람과의 관계도 가지를 찌는 일과 같겠지요. 설익거나 너무 물러서 못쓰게 돼버린 가지와 같은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관심과 시간이 필요하며 또 잊지 않고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님, 오늘은 보라색 가지가 알맞게 익은 듯 합니다. 이제 가스 불을 끄면 제 몸의 열기로 조금 더 물러질 것입니다. 어머님과 맺은 고부의 인연이 적당히 무른 가지처럼 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부족함을 아쉬워하시기보다 제가 지닌 색깔을 그대로 인정하신 어머님의 넓으신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25년 동안 제게 ‘또 다른 엄마’가 되어주신 어머님. 이제 어머님은 여든 다섯 해의 세상 연을 끊고 떠나셨지만, 어머님의 아들인 남편을 통하여, 또 제 아들인 어머님의 손자를 통하여, 어머님과 맺은 인연의 끈은 길이 이어질 것입니다. 어머님, 편히 잠드십시오.
<문학미디어, 2007년 여름호.>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