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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
방 계 은
오랜만에 여학교 때 친구를 경복궁에서 만나 민속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소녀시절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났다. 그중에 하나 조각보는 나에게 까맣게 잊었던 대고모님의 단아한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여고 2학년 때다. 넷째고모의 혼인날을 앞둔 어느 날 할머니 댁으로 갔다. 고모가 나를 보자마자 손을 끌고 문간방으로 가더니 은밀한 일이라도 있다는 표정으로 보자기를 펼쳤다. 조각상보였다.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에 선연한 것은 물정 모르는 내 눈에도 시장 포목점에서 보던 조잡한 조각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엷은 하늘색 바탕에 옥빛 조각으로 희(囍)자를 동․서로 넣고 가장자리는 글씨의 빛깔과 같은 색으로 돌려 마무리 했다. 네 개의 귀퉁이에는 자그마한 복숭아 모양을 넣어 멋을 냈다. 아마도 숙고사나 아사 종류의 옷감조각으로 이렇게 저렇게 연결 지어 만들은 상보로 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작품이었다. 그날 고모의 조각상보는 내가 보물처럼 아끼던 헝겊조각들을 잃어버리고 아파했던 기억을 헤집었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께서 헝겊조각을 준비하라는 숙제를 주셨다. 우리집은 여러 해 동안 상(喪)중이어서 예쁜 헝겊이 없었다. 궁리 끝에 어머니가 우리들의 잠옷을 만들고 남은 융조각을 숙제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이들은 갖가지 색깔의 고운 헝겊을 많이 가져 와서 자랑했다. 나는 창피해서 안 가져온 척하다가 실과시간에 마지못해 내 놓았다.
그때 아이들 사이에 작은 콩주머니(오자미) 놀이가 유행이었다. 아이들은 융으로 만든 콩주머니가 튼튼하다는 것을 알고는 화려한 헝겊들을 줄 테니 융조각과 바꾸자고 했다. 나는 너무 좋아서 모두 바꿔 주었다. 아이들은 내일 집에서 예쁜 헝겊을 가져다 줄 테니 융을 더 가져와 바꾸자고 사정했다. 나는 쾌히 승낙했다. 등굣길에 찡그렸던 마음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날아갈 것만 같이 집으로 왔다.
나는 헝겊조각들을 차곡차곡 접어 다락으로 올라갔다. 여러 형제들에 방해를 받지 않고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다음날도 융조각과 바꾼 헝겊들을 들고 살그머니 다락으로 올랐다. 그때부터 조각헝겊들은 소녀의 보물 1호가 되었고, 틈만 나면 그들이 보고 싶어 다락으로 올랐다. 그곳에서 갖가지 색깔의 조각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조각상보나 수저집, 이불장보, 서랍장보로 변하는 상상의 날개를 펴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6학년이 되자 시험공부로 자주 다락에 오를 수 없었다. 합격 발표가 나던 날, 나는 다락으로 올랐다. 그러나 그곳에 있어야 할 보물들이 없었다. 빈 상자만이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가끔씩 한 식경을 다락에서 보내고 내려오는 나를 수상쩍어 했던 여동생의 실수였다. 동생은 현란한 조각헝겊들을 보자 자랑이 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던가 보다. 그것을 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다가 그만 빼앗겨 버렸단다. 잊었던 내 유년의 무지개, 그 아름다운 헝겊들을 되살아나게 했던 조각상보다. 고왔던 헝겊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도 대고모처럼 조각상보로 꾸며볼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이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큰 대고모다. 인물 곱고 어려서부터 바느질 솜씨가 빼어났다. 좋은 가문으로 시집갔는데 남편이 결혼 석 달 후에 만주로 독립운동 하러 가서는 부지거처(不知居處)가 되었다. 한 점 혈육도 없이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았다. 그분에게 남은 것은 하늘이 주신 바느질 솜씨와 엄한 가풍에서 성장하여 몸에 밴 꼿꼿한 성품뿐이었다. 칠십 평생을 외롭게 바늘과 더불어, 바늘에 의지하며 살다 가신 분이다.
더 나이 먹으면 이렇게 꾸미기가 어려울 것 같다며 막내고모의 몫도 함께 만들어 보내셨다. 막내고모 것은 수․복(壽.福)자를 좌․우로 새겨 넣은 것이었다. 삯바느질하고 남은 조각 중에 고르고 골랐을 것이고 색깔 맞추어 한 땀 한 땀 정성을 모아 조각보를 꾸미셨을 것이다. 그렇게 조카들 결혼 때마다 당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던 대고모님!
넷째고모는 큰고모의 결혼선물은 태극기 문양을 넣은 조각상보였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런 조각보는 쉽사리 만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며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시집 갈 때까지 대고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게도 만들어 주실 텐데 하며 어이없는 욕심을 품었었다. 건넛방에 가득 쌓인 혼수보다 자그마한 조각보를 그렇게도 귀하게 간수하던 고모. 그 기쁨에 가득 찬 얼굴이 박물관의 조각보 위에 겹쳐 어른거렸다. 나는 철이 없어 몰랐지만 고모는 조각상보의 가치를 아셨던 것이다. 조각헝겊을 요리조리 엮으면서 행복해 하셨을 그분의 애달픈 삶을 너무도 잘 알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몸매, 단정한 쪽머리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대고모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불행해 보였을 삶이었지만 그분은 소년과부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을 당당하게 여기셨다. 소녀 적부터 나는 대고모의 솜씨와 삶을 존경해 왔다. 그러나 그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그분의 지혜로움과 높은 안목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조각헝겊으로 여러 가지 문양을 정교하고 깔끔하게 박음질하기가 어디 수월한 일인가. 색감 또한 근래에 유행하는 파스텔 톤이었다. 한복을 지어 주고 남은 조각은 어찌 보면 버려진 헝겊일 뿐인 것을.
대고모는 그 조각으로 민속박물관에 모셔진 작품보다 품격 있는 조각상보를 만드셨다. 마치 당신의 삶이 그랬듯이. 버려진 조각을 아름다운 조각보로 승화시키듯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삶을 고결하게 꾸미다 가신, 조선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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