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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가는 길
이 일 헌
가끔 무언가 새로움을 만나고 싶다. 가슴에 바람을 일으키고 싶다. 오늘도 그렇다. 늘 기존의 틀을 깨는 전위무용가 홍신자. 그의 예술단 ‘웃는 돌’이 펼치는 제 5회 죽산 국제예술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올해의 주제는 ‘20세기를 위한 진혼(鎭魂)’이라 하지 않는가.
H 시인과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새벽녘에 온 소식은 밤새 위경련으로 고생하다 날이 밝아 병원으로 실려 가는 중이라 한다. 일이 난감하게 되었다. 며칠째 벼르던 죽산행이었는데. 그렇다면 나 홀로?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곳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세계 전위예술인들이 모인 곳에 나 같은 사람이 어울리기나 할지, 아쉽지만 이럴 땐 빨리 포기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70년대 중반, 연극 ‘에쿠우스’를 보러 실험극장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동행인을 찾지 못해 나 혼자였지만 괜찮았다. 알런 스트랑 역을 맡았던 강태기의 불같은 연기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호암아트홀에서 영화 ‘모던 타임즈’를 감상할 때에도 홀로였다. 쇼핑은 물론, 가벼운 여행이나 박물관에 갈 때도, 언제나 나 홀로인 그 자유로움이 좋았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누군가가 부추기거나 이끌거나 하지 않으면 오늘처럼 그만 주저앉아버리고 만다.
문득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하기야 지금 꼭이 죽산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제는 예약한 것도 아니고,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기어이 집을 나선 것은, 단지 내가 그곳에 혼자 다녀올 수 있는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나를 시험하는 거다. 점점 왜소해지는 자신에 대한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을버스로 대방역에 가서 전철 1호선에 올랐다. 신도림에서 2호선을, 교대에서 3호선을,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탔다. 죽산에서 점심을 한 후 택시로 또 십여 분, 드디어 ‘웃는 돌 예술촌’ 초입에 이르렀다. 2시 조금 넘었으니 집을 나선 지 약 세 시간 흘렀다. 마음은 이미 한 조각 뜬구름, 번거롭지 않다.
‘웃는 돌’ 야외무대를 저만치 바라보며 야트막한 산기슭을 오른다. 산골에 이런 멋진 곳이 있을 줄이야. 멀리 제방길 너머 저수지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빛 물결로 아른거린다. 맑은 하늘과 구수한 흙내음, 6월의 미풍이 가슴속을 초록으로 물들인다. 도심과는 결이 다른 햇살 아래 여기 죽산의 흙길을 이렇게 걷고 있다. 아침의 망설임은 얼마나 바보짓이었던가. H와 함께 왔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공연장이 눈앞이다.
시간이 넉넉하여 이색적인 흙집과 통나무집, 몽골 텐트와 야외극장을 둘러본다. 긴 머리에 개성적인 염색, 언밸런스의 옷 등, 전위예술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외국인들과 준비위원들이 부산하다. 서울로 가는 임시 버스가 9시 30분에 출발한다는 안내문이 반가웠다. 돌아갈 일은 전혀 대비하지 않았었는데. 버스표를 예매한 후 커피 한 잔 뽑아 들고 나무 그늘진 너럭바위에 앉았다.
그 때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한 젊은 여인이 주변을 서성인다. “이리 앉을래요?” 내가 말을 걸었다. K양은 대기업에 근무하다 3년 전부터 연극계에 몸을 담았고, 미국 브로드웨이까지 갔었다고 한다. 여기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숙소도 예약했다고. 지금은 자신의 진로문제로 딜레마에 빠졌다며 나에게 진지하게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나이 값 하느라 이런저런 경험담을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인생에 어디 정답이란 것이 있던가.
우린 생면부지다. 그런데도 대화에 별 걸림이 없다. 랩과 춤과 뮤직 비디오로 시시해진 세상을 온몸으로 강타한 서태지 이야기 하며, 불운한 말년을 보낸 나혜석을 화제에 올리면서 시대를 잘못 만난 선각자라고 안타까워한다. 홍신자의 방황과 구도적인 삶의 자전적 에세이『자유를 위한 변명』을 논할 때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들기도 한다. 심연에 잠자던 자유를 향한 목마름이 열띤 언어가 되어 살아난다. 우리는 저녁 반주로 막걸리 서너 순배 마신 후 야외무대 가까이 자리 잡았다.
6시 30분. 최상철의 춤으로 막이 열린다. 울고 웃었던 20세기 격정의 세월이 저 춤사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휘황한 스포트라이트에 모여든 크고 작은 나방과 하루살이들의 난무도 한살이 응어리를 한껏 푸는 몸짓인가. 새소리, 바람소리, 뒤울리는 풍악이 지난 한 세기의 넋을 중천으로 날려 보낸다. 마침내 춤꾼은 걸쳤던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 타오르는 불기둥에 던진다. 한 세기의 묵은 한(恨)을 활활 태운다. 대자연 속에 뉘엿이 기우는 석양을 받으며 ‘다비드 상’처럼 누드가 된 주인공, 보는 이도 적이 홀가분하다.
세계 부토 댄스의 대부, 일본인 오오노 가즈오는 반라(半裸)인 체 30여분이나 무대를 누빈다. 94세라 한다. 자기만의 길에서 무아의 세계에 사는 사람에겐 나이 따위는 무의미한 것이리라. 또한 독일인 미하엘 퍼터가 그의 파트너와 함께 연출하는 ‘보이스 퍼포먼스’, 사람의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저 환상의 멜로디와 하모니는, 고달픈 나의 가슴을 달래주는 노래인가, 새 백년 새 천년을 손짓하는 천상의 소리인가.
밤은 깊어간다. 진혼제는 이어지고 분위기는 달아오른다. 여기 남다른 끼를 안고 온 사람들, 손을 잡으며 하룻밤 묵고 가라는 K양의 권유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귀가 버스에 올랐다. 낯설고 신명나고 또 의미 있는 볼거리, 짧은 시간이나마 공감을 이룰 수 있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에 가슴이 벅차다.
그뿐 아니다. 나 스스로 얽어맨, 그 굴레에서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었다는 이 흔쾌함을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세상이 발 아래로 느껴진다. 아까 너럭바위에서 그녀가 나에게 “머리털 희끗희끗한 평범한 여인네가 혼자서 ‘웃는 돌 예술촌’을 찾아 온 그 자체가 바로 퍼포먼스”라 하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는다.
예부터 방랑과 변화를 사랑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증거라 하였다. 마음을 접지 않는다면,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그래 무엇을 못하랴. 죽산 가는 길은 나를 시험하는 길,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었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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