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 받은 고려청자 접시
鄭 木 日
수수한 풀꽃 같은 고려청자 접시-.
청자 접시를 선물한 서인숙 여사와의 인연을 생각한다. 수필가이며 시인으로 40여 년 간 지내온 사이라, 나이와는 무관하게 ‘미스 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나에게 수줍게 웃으시는 분이다.
어느 날 서 여사로부터 점심 초청이 있어서 식당으로 갔다. 서 여사가 먼저 나와 계셔서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서 여사는 “아무도 없어서 잘 됐다.”며 신문지로 아무렇지 않게 둘둘 싼 것을 나에게 내어 놓는다. 신문지를 풀어 보았다. 청자 접시였다. 접시 안에는 노랑 색종이에 만년필로 쓴 쪽지가 있었다.
정목일 선생님
여기 고려청자 접시를 선물합니다.
별로 아름답지 않으나 팔백년
세월을 지녔다는 의미도 중요합니다.
그래도 양각의 문양이 있어 좋습니다.
서인숙 드림
나는 우두커니 고려청자 접시와 쪽지 글을 보면서 서 여사를 향해 고마움의 인사를 드렸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고려의 맑은 하늘과 국화 향기가 풍기는 상감청자의 청초하고 고결한 미의식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려청자 접시 중에 이런 소박하고 치졸한 것도 있었단 말인가. 색깔이 선명하지도 않을뿐더러 칙칙하고 어두워 구름 낀 날처럼 보였고, 양각(陽刻)의 국화 문양도 뚜렷하지 않다. 청자 빛이긴 하되, 맑고 고요하지 못하다. 매끄럽고 단아하지도 않다. 다만 소탈하여 구수하다. 질박하지만 그윽함을 지니고 있어서 푸근하다. 맵시를 내지 않아서 정감이 든다.
만약 국보급 문화재급이거나 상급의 청자라면 내가 받을 선물이 될 수가 없을 터이다. 한사코 손을 저으며 선물 받기를 거부하였으리라. 나는 이 고려청자 접시를 보고 단번에 마음이 편안해져 환한 웃음으로 “감사합니다!”고 인사를 했다. 평생에 한 번 고려청자 접시를 선물 받는 기쁨이 벅차올랐다. 서 여사도 신문지로 아무렇지 않게 둘둘 싸 내놓은 까닭은 뜻밖의 일이지만, 나의 도자기에 대한 사랑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을 내놓은 듯하다. 색종이 쪽지 글이 없어도 아는 일이다.
내 선친은 진주지방에서 알려진 골동품 수집가이셨다. 어릴 적부터 고미술품을 보며 자란 탓으로 골동품을 보면 애틋한 감성에 젖곤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어 선친이 남긴 골동품을 모두 처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 여사는 1970년대에 마산 창동에서 ‘백자화랑’을 열었고, 마산지역의 골동품 수집가의 한 사람이었다. ‘백자화랑’에선 한 달에 한번씩 ‘시낭송회’가 열려서 문화의 명소로 알려져 있었다. 나는 시간이 있을 적에 서 여사가 수집한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구경하길 청하곤 하였다. 자택에 네 번쯤 구경을 간 적이 있지만, 아끼는 진품은 내놓지 않은 듯해서 애가 탔다.
꾸미지 않고 치장을 하지 않은 수더분한 청자 접시 하나-. 가마 속에서 꺼낸 생산품 중에서 시원찮은 제품에 속하는 고려청자 접시일 듯하다. 색깔은 좀 탁하지만, 바닥 한 가운데에 원을 그려 넣고 한 송이 국화꽃을 양각해 놓았다. 주변으로 국화잎을 양각 처리하였다. 섬세하고 정교한 데라곤 없고 희미하여 추상 문양처럼 보인다.
나는 이 청자 접시에서 8백 년 전 고려인의 마음을 보았다. 하늘에 바치는 국화꽃과 향기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같은 고려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국보급 청자를 박물관에서 보고는 찬탄을 발하던 심정과는 달리 이 청자 접시를 보고는 은근히 마음이 놓인다. 너무 고결하거나 청아하지 않아서, 고차원의 미학이 아니라서, 마음이 더 당기는 것을 느낀다.
완벽이 보이는 기막힌 솜씨, 신과 견주기라도 할 듯 더 이상의 완성을 바랄 수 없이 상상력의 한계선을 보여주는 걸작품 앞에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만다. 하지만 이 고려청자 접시를 보고는 외롬과 슬픔의 맛까지 느껴져서 동정과 연민의 정감까지 가슴에 닿아온다.
고려청자 그릇에서 이런 정감을 느끼긴 처음이다. 무덤 속 부장품으로 묻혔다가 출토된 것일까. 중산층을 위해 생산된 청자 접시일까. 청자 접시의 둥근 테가 물레로 돌려낸 듯하지 않고, 손으로 빚어낸 듯 둥그스름한 선형이 더 다정스럽다. 궁중이나 양반층에서 사용하던 고급 청자를 생산하던 관요(官窯)의 제품과는 달리, 민요(民窯)에서 제작된 것일 듯하다.
평생에 처음으로 선물 받은 고려청자 접시-. 고려청자를 좋아하지만 평생 동안 한 점도 간직할 수 없는 내 형편을 뻔히 알고 있기에 신문지에 둘둘 싼 채 나에게로 온 것이다. 쪽지 글을 보면 간단명료하지만, 많은 상념을 거친 끝에 온 것임을 알아차린다. 이 청자 접시는 어느 부분에도 흠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온전하다. 잘 나진 못하더라도 이가 빠졌다거나 비뚤어진 곳이 없음이 다행스럽다. 8백년이 지나도록 온전한 모습을 지닐 수 있음은 이 그릇의 음덕이 아닐까 한다.
한가한 시간이면 선물로 받은 고려청자 접시를 꺼내놓고 바라보곤 한다. 이 고려청자 접시가 하나의 무 생명체가 아니라, 8백년간 홀로 숨을 쉬며 생각을 가다듬어온 한 생명체처럼 여겨져 말없는 대화를 나눠보곤 한다.
아, 고려청자가 세상에서 최고, 최상의 도자기가 되기까지 이런 치졸해 보이는 형태와 색채를 수없이 빚어낸 결과, 비로소 세계 으뜸의 솜씨와 경지를 터득하였을 것이 아닐까. 이 고려청자 접시의 미완(未完)과 미숙(未熟)이 자라서 세계 제일의 고려청자가 완성(完成)되고 성숙(成熟)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고려청자 접시가 보인 색깔과 양각 무늬의 제작 시도를 보면서, 도공(陶工)들이 보다 완벽한 솜씨와 경지를 터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도 끝에 점차 절정의 미를 꽃피우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
팔순의 서 여사가 선물한 고려청자 접시에 나는 무엇을 담아 놓을까.
정목일: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수필집 <마음꽃 피우기>(청조사) <햇살 한 줌 향기 한 줌>(문학수첩) 한국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등 수상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