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指」의 세계
- 鄭木日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겼거나, 난처한 제안을 받았을 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도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의 심연에 잠겨야만 난마처럼 얽힌 고뇌의 실타래,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양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슬기롭고 가치로운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生覺)」이란 무엇인가. 「깨달이 생긴」라는 뜻이니, 「생각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 된다. 깨달음은 진리를 얻는다는 것이므로 어떤 문제든지 해답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지극히 평범한 듯 느껴졌던 「생각」이란 말이 본질적이고 오묘한 깊이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인간의 영원한 화두이며 물음이다. 오래 동안 생각의 심연에 잠겨 있다 해도 「깨달음」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기, 집착,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깨달음」의 하늘을 볼 수 있고, 비로소 대 자유를 숨쉴 수 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세속적인 모든 기쁨을 포기하는 일이어서 도달하기 매우 어려운 세계인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했으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같은 말들을 종합하면 「생각= 존재」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인간이 동.식물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척도로서 「생각하는 존재」를 들 수 있다.
인간이 「생각」을 통해 지향하는 삶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 진리」에 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닌 삶을 통해 실천적으로 체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구도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생각= 존재」라는 등식은 무언가 미흡함을 느낀다. 나 는「생각」을 표현(기록)해야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고 본다. 「생각」을 잊지 않고, 전달하려면 「기록」이란 방식을 통해서라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인정하면, 자신의 삶을 기록하지 않았을 때는 「존재하지 않은 삶」이 된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동.식물처럼 생태적으론 살아왔지만 문화적으론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고 만다. 「역사」라는 것도 「기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기록이 없는 삶」이란 결과적으로 「역사가 없는 삶」인 것이며, 「존재하지 않은 삶」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새삼 기록의 힘과 중요성을 실감한다. 자신의 인생을 기록해야만, 역사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인생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자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최근 「청주고인쇄박물관」에 간 일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1377년(고려 우왕3년) 7월에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에 위치하며, 1992년 3월17일 개관한 고인쇄 전문 박물관이
다. 이곳에서 「직지(直指)」라는 말이 내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손가락을 펴서 가르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필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깨달음」의 세계를 가르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가슴이 섬짓해 짐을 느꼈다.
지상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 금속활자본인 「불조직지심체요절(간략 서명)」은 고려 말기의 고승인 경한(1298~1374)이 역대 조사스님들의 법어.어록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역은 것을 1377년 7월에 흥덕사에서 찍어낸 것이다. 이 책은 현
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 1책 영본이 간직돼 있는데, 1887년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여 근무한 콜렝 플랑시(1853~1922)가 우리 나라에서 수집해간 것이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오게 된 것이다. 그 실물이 1972년 「국제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책의
전시회에 출품됨으로 인하여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된 금속활자본임이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 말의 고승 경환이 말하고자 한 「직지」의 세게는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이것을 기록을 통해 영원 속에 남겨 놓으려 했다. 영원 속에 남기려는 기록 정신이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된 금속활자본으로 구현돼 존재케 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민족의 영원을 향한 깨달음과 기록정신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다. 금속활자를 우리 민족이 발명했다는 것은 영원을 기록하는 가장 완벽한 장치를 얻어냈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활자매체시대가 전개되었으니 한국인은 천부적인 정보유전인자를 타고났음이 입증됐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을 비롯한 고인쇄본 책들은 모두 한지에 찍혀졌다. 오늘의 종이 수명은 불과 백년 밖에 가지 못하지만, 한지는 천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백년 미만을 사는 인간에겐 「천년」이란 곧 「영원」을 뜻한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영원의 세계를 추구
하고, 이를 기록하여 남기려 하였다. 영원 속에 퇴색되지 않는 불변의 언어, 깨달음의 세계를 「직지(直指)」로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 지구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인류문화사상 중대한 일이지만, 「직지」를 통해 영원과 깨달음
의 세계를 발견하고 있음도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인쇄매체시대가 가고 영상매체시대를 맞이했지만, 한국인은 천부적 정보유전인자를 지닌 덕분에 인터넷 사용률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통해 새로운 정보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직지」가 가르키는 영원성, 기록성, 정보성, 깨달음의 세계는 일찌기 우리 민족이 터득한 문화창조의 원동력이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다녀온 이후부터 깨달음의 큰 손인 「직지」가 나의 폐부를 찌르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원을 향한 깨달음의 길을 찾고 있는가?』
먹장구름 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며 내는 천둥 같은 그 질문이 내 가슴을 쿵쿵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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