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의 노래 / 정 목 일
느티나무 아래 앉아 매미소리를 듣는다. 바람조차 미동도 하지 않는 여름 한낮이다. 바람이라도 한 자락 불어왔으면 좋으련만, 나의 나른한 졸음 안으로 매미 소리는 끼어 들고 있다.
옥수수꽃에 앉으려는 잠자리 한 마리, 날개를 파르르 떨며 앉을 듯 앉을 듯 도로 딴 곳을 기웃거려 보다가 제 자리에 도로 돌아와 살며시 내려앉고 있다. 한지(韓紙)빛 날개 사뿐히 시골 여름의 무료와 평화와 수직으로 마주 앉고 있다. 날렵한 날개에 와 머무는 평행이 그림 같다.
정말 바람은 꼼짝도 않을 셈인가. 파르르 떨던 잠자리 날개짓이 멈추어지자 여름의 한낮이 숨을 딱 멈춘 듯 정지해 버린다. 더위에 찌는 풀 냄새만이 열기를 뿜고 있다. 열기 머금은 풀냄새를 헤치고, 나의 졸음을 들추고 찌르르 매미소리가 기어들고 있다. 매미는 느티나무 푸른 가지 어디쯤 붙어 소리치고 있는가. 매미가 소리치고 있다는 사실이 전연 새롭게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갑자기 매미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문득 솟구쳐 오른다. 온통 여름을 자기의 세계로 만들어 버리는 매미 소리…… '맴맴 쓰르르……' '맴맴 쓰르 르……' 혼자서 여름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귀를 소라 껍질처럼 열어놓고 매미 소리를 따라가 본다. 매미 소리에, 더위에 늘어졌던 초목들이 생기를 되찾고 한결 푸르러지고 있다. 나른한 염천(炎天)의 한낮을 찢어 놓은 목소리로 노곤한 여름의 시골 풍경들이 부시시 졸음에서 막 꿈틀거리며 깨어나고 있다. 제왕이다.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있다. 지쳐 몸조차 움직이기 싫은 여름날을 홀로 예찬하고 있는 목소리……. 아무래도 강한 뙤약볕에 무기력한 여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 목소리 때문인 것 같다. 답답하고 숨막히는 이런 상황을 노래할 수 있는 건 매미뿐일 성싶다.
매미는 노래한다. 매미 소리는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다.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떨어 져서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맴맴 쓰르르……' 심신의 정열로 몸이 떨리는, 끝소리 부분 의 그 파동을 짜르르 전해 주고 있다. 젊은 날, 흠모하던 분의 웅변을 들을 때 느끼던 감동이다.
누가 매미를 나무 위에서 한가하게 노래만 부르는 한량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가. 하품 과 졸음과 나태의 여름을 일깨우기 위해 매미의 목소리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떨고 있다. 대장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시우쇠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노동이다. 단단한 근육질의 팔뚝이 시뻘건 쇠붙이를 향해 내리치는 묵중한 힘의 맥박을 느끼게 해 준다. 여름의 한낮을 찬미하는 노래꾼으로서만이 아닌,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름에 매미가 없다손 치더라 도 여름이 크게 달라지는 법은 물론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미 노래가 있어야만 여름이 여름답지 않으랴. 매미 노래가 있어야만 더위를 마신 잎들이 파릇파릇 기운을 차리고, 열기를 내뿜는 대지는 땀을 씻지 않으랴.
매미 노래로 아이들의 가슴은 별빛처럼 설레이고 어른들도 동심의 푸른 숲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게 아닌가. 매미는 단순히 자신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의 최후처럼 엄숙하고, 선각자의 생애처럼 고독한 매미의 노래를 듣는다. 목소리를 부르는 노래, 가슴으로 순간을 부르는 노래가 아닌, 생애를 통하여 체득한 고결한 정신을 노래 부르는 장엄한 열정과 엄숙을 느낀다.
매미는 알고 있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여름에 죽도록 땀흘리며 일하는 개미와 풀밭에서 뒹굴며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의 이야기를, 식량을 구하러 간 베짱이의 최후와 행복한 개미집의 이야기를. 무슨 상관인가. 매미는 노래할 뿐이다. 노래 이외에 자신의 해낼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는가.
다만 목청껏 노래 할 수 있는. 오오. 자유! 그것만이 그들이 지니는 생명이요. 기쁨이다. 어떻게 해서 부르게 된 노래인가. 얼마나 꿈꾸어 오던 노래인가. 불과 몇 날의 여름을 노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어둠 속에 침묵 속에 파묻혀 지내왔던 나날인가.
식물의 조직 속에 산란된 매미의 알은 2∼6주간에 부화되어 땅 속에서 살게된다. 짧게는 2∼7년 동안, 길게는 13∼17년 동안을. 그것은 차라리 천형의 형벌이었다.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형국의 세월이었다. 그 세월을 참고 견디어 비로소 허물이라는 쇠사슬을 벗어 던지고 땅 속에서 뚫고 나와 매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매미는 기껏 십여 일 만에 일생을 끝내고 만다. 불과 십여 일 간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십여 년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굼벵이'란 모멸을 받으면서. 그러나 굼벵이는 모멸 속에서 꿈꾸었다. 그들이 펼쳐낼 우람하고도 빛나는 자유의 노래를, 푸른 녹음, 이글거리는 태양, 바람과 별과 꽃향기를. 춥고 쓰라린 겨울은 아무리 길어도 참아낼 수 있었다.
'나에게, 나무 위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노래할 수 있는 여름을……'
매일 되뇌어보는 굼벵이의 기도였다.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랴. 매미는 당당한 목소리로 소리지르고 있다. 드디어 여름을 맞이하였다.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노래인가. 하루종일 소리 쳐 노래 불러도 목청이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차진다.
매미가 노래하고 있다. 바람이 접었던 부챗살을 살며시 펼치고 있다. 더위에 시무룩해졌던 잎들이 윤기를 닦아내고 있다. 매미는 생명의 실꾸리에서 소리를 풀어내고 있다. 그들은 여름을 대변하는 시인이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생명의 절박한 부르짖음이 가슴에 맥박쳐 온다. 그들의 열창, 그들의 생애가 사방으로 짜르르 울려 퍼진다. 그들은 애오라지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을 바치는 정열로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삶을 노래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남에게 한 가락의 감동의 소리를 전할 수 있을까. 나의 지나온 어두운 세월을 굼벵이의 세월이라 여겨두자.
이제 나도 매미가 되고 싶다. 생활이라는 무더위에 지친 육신의 나태를 허물처럼 벗어 던지고 날 개를 달고 싶다. 삶이란, 그리고 노래란 최후의 눈물이어야 될 것 같다. 부르다, 부르다 죽어가도 한이 없을 노래를, 매미는 지금 노래하고 있다. 노래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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