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美) / 정목일(鄭木日)
가을이 깊으면 농가(農家)마다 감나무 가지 끝에 덩그러니 홍시 하나를 그대로 달아두었다. 그것은 까치가 와도 섭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인의 따뜻한 배려이기도 하다.
한 점의 잘 익은 홍시를 맑은 하늘에 바치는 이 마음을 알기나 할 것인가. 하늘이야 알 것이지만, 까치가 찾아와서도 아주 섭섭하지 않게 주인에게 깍깍… 반가운 인사를 할 것이 아닌가. 까치밥은 빈 창공에다 인정의 붉은 점 하나를 찍어둔 것이다. 그냥 여백으로 남겨놓으면 어쩐지 허전하여 붉은 낙관을 찍어놓았듯이…
해질녘 산사(山寺)의 범종소리는 조용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산등성이를 넘어 산그리메를 지나 어디로 가는가.
아주 갑자기 끊어지면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산과 들과 강물, 저녁 어스름에 얼굴을 내놓는 별들이 서운할까보아, 끊어질 듯 이어져서 은은히 사라진다. 그냥 영원히 이별인 듯 돌아서서 가지 않으려는 듯 미련을 두고, 또 언제 그리움이 간절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듯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저녁하늘에 곱게 물든 노을도 그냥 어둠을 맞아들이면 너무 허전할까보아 잠시 찬란한 빛살을 모아 단장을 한다.
노을이 물러가고 나면 적적할까보아 맑은 별들을 띄워놓는다. 그래야만이 노을도 어둠 속으로 무채색이 되어 사라질 수 있지 않으랴.
창호지 방문엔 달빛의 고요와 새벽 어스름이 가장 잘 물든다. 그래도 한지(韓紙)의 부드럽고 그윽한 빛만으로는 어딘지 무료하여서, 간혹 국화 잎사귀나 단풍잎을 붙여놓기도 했다. 창호지 방문을 무심결에 바라볼 때, 빛의 깊이나 마음을 감지할 수야 있지만, 그래도 국화 잎사귀 몇 낱을 붙여놓은 그 마음 때문에 창호지에 비치는 빛살도 향기로울 수 있지 않겠는가.
조선백자 항아리를 보면 눈이 맑아진다. 볼수록 마음이 맑아지는 가을 달빛이 젖어 있다. 오동잎 한 잎 두 잎 지는데, 풀벌레소리를 뒤로 물리고 누가 가야금을 뜯고 있는 듯 달빛의 선율이 넘쳐흐르고 있다. 아, 미(美)란 첫눈에 얼을 빼앗길 때도 있으나 자주 보면 곧 싫증이 날 때도 많은 법이다.
백자만은 마음을 비워놓음으로써 그 자리에 달빛을 채워두었기에 아무리 바라보아도 물리지 않고 그 순백(純白)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백자의 마음 바닥에 달빛이 가라앉아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은은한 달빛 속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너무 담백하기만 하면 무료하지나 않을까 하여, 진사(辰砂)로 붉은 점을 찍어놓거나 사군자를 그려놓았다. 흰 바탕으로 그냥 남겨두는 것이 더 좋았을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눈 내린 들판이 맑아서 적요로울 때도 있다. 눈부신 대낮의 고요에 외로움을 느낄 때와 흡사하다. 백설의 세계만으론 한적해할까 보아 살며시 눈 속에 매화를 피게 한 것일까. 그 향기가 은근히 봄을 부른다.
먹을 갈아 화선지에 묵란(墨蘭)을 치고는 무언가 미흡하여 낙관을 남기는 것처럼 그냥 공백만으로 남겨두면 아주 빈 마음인 듯하여 안심이 되지 않는다.
첩첩 산중의 사찰에 밤이 깊으면 몇 만 년의 고요가 사방으로 첩첩이 둘러싸 산 높이와 골짜기에 깃들이는 어둠에 묻혀버린다. 그래서 대웅전 처마 끝에 풍경을 달아두어 댕그랑댕그랑… 바람과 고요를 만나면 알은 체 인사를 나누도록 만들어 두었다. 알고 보면 풍경은 영원 저쪽에서 오는 달빛이라든지 바람과 별빛을 맞아들이기 위한 문이 아닐까.
여백이란 자신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영원을 맞아들이기 위한 문인가. 어쩌면 마음의 빈 뜨락이 아닐까. 그냥 텅 빈 것은 어쩐지 공허하여 난초라도 한 포기 심어두어야만 될 성싶은 심사를 어쩔 것인가. 달밤이라면, 어디선가 피리소리라도 들려와야만 더욱 마음이 끌리는 이치를 알 것 같다.
마음을 비우기란 실로 어렵다. 그 빈 마음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깃들인다는 건 생각해도 모를 일이나, 무언지 하나쯤은 애써 남겨두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들의 삶도, 사랑도, 죽음도, 그냥 여백으로 남겨놓을 수 없는 데서 아름다움은 싹트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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