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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의 가을
정목일
달은 그리움의 끝에서 돛단배를 타고 왔다.
달이 닻을 내리자 하늘의 고요가 내려와 깊은 골짜기를 채워버렸다.
고요가 너무 깊어서일까. 풀벌레 소리가 천지 사방에 강물이 되어 흘러갔다.
가을 덕유산은 그리움의 신열을 앓았다. 이미 마음을 비워 놓고 두어 번 기침을 하더니, 마침내 각혈을 하고 말았다.
덕유산의 불타는 단풍, 그리고 뼈 속까지 물든 만추(晩秋)-. 그리움의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탄식이었다. 천년 만년의 침묵 속에서도 어쩔 수 없는 가을 산의 고독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산의 명상이 산그늘처럼 내려와 내 마음에 닿았다. 그러면 산이 되었다. 숲이 켜는 가을 연주를 혼자 들을 때 걷잡을 없는 마음이 되었다.
나의 가을걷이는 모든 게 종내는 홀로 남게 된다는 것. 어디론지 떠나야 하는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확인하는 일이었다.
가을날에는 한 마리의 곤충이 되어 이마에｢ 영혼으로 감지하는 예민한 두 개의 더듬이가 솟아났다.
숲에 한해살이를 하는 작은 곤충처럼 이 세상에 아무도 생각해 주는 이가 없다고 해도 나의 길고 긴 더듬이는 늘 깨어 있어 고독의 수풀 속에 그리움의 안테나를 곤두세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곤충이 되어 수풀 속에 숨어 버리자, 마음이 훨씬 넓어졌다. 여태까지 몰랐던 풀꽃이라든지 돌멩이. 산새, 풀벌레, 나무, 바람이 정답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되어서 별을 바라보았다. 한 그루 나무가 되어서 바람을 맞아 들였다. 이대로 나는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산이 맞는 단풍-. 선홍빛 채색은 이별을 앞둔 사랑하는 사람들의 포옹이었다.
짧았다. 만추는 잠시의 황홀한 순간이었으나. 가을 고독은 깊었다. 황량한 겨울 마차가 깊은 골짜기로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덕유산에서 보낸 두 번의 가을, 정갈한 눈물이었다. 통곡의 눈물이나 참회의 눈물이 아닌, 까닭도 모를 사무치는 정제된 한 방울 눈물이었다. 존재에 대한 외로움이 눈물로 맺히는 것을 느꼈다.
아는 사람은 멀리 있었다. 불타오르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을 홀로 바라보았다. 산길을 걸으면서 인생 길을 생각했다. 이 길로 가기만 한다면 어디에 도착할 것인가.
가을은 해마다 도지만 내 마음속엔 덕유산의 고요가 있다. 덕유산의 명상이 있다.
달은 그리움의 끝에서 돛단배를 타고 왔다. 가을이면 그 돛단배를 타고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떠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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