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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호준(2007-03-21 21:31:05, Hit : 1187, Vote : 151
 가을의 약속

가을의 약속 / 구호준



  10월의 언덕에 올라서면서 한낮의 무더위도 어디론가 도망했군요. 조석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가을바람에 나뭇잎도 이젠 단풍들면서 조락을 준비하는군요. 단풍드는 나뭇잎 사이로 비죽이 얼굴을 내민 사과도 빨간 웃음을 토하고 있습니다. 잎은 나무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나무는 열매를 맺으려 모든 것을 바쳐가는군요.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그런 풍경을 연주해주는 가을은 그런 소망들을 이루어주는 계절이여서 더 풍성한 것이 아닐가요?



  가을의 문턱에 올라서면 공연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아니, 가을같은 당신과 마주하면 자꾸만 초라해지는 자신을 어쩔수 없습니다. 늘 풍성한것으로 채워주는 당신이였고 그래서 당신과 마주하면 나는 그렇듯 앙상한 모습으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만큼의 부끄러움을 안고 사셨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내 앞에서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사내라면 약속을 함부로 남발해서는 안된다. 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것은 아버지와 약속하지 말고 너 자신과 약속하거라. 약속은 한 사람의 인격이다. 그러니 자신과 약속부터 충실히 지키고. 약속을 어기고서는 어떤 이유도 만들지 말거라. 그 시각부터 넌 책임없는 인간이 되느니라. 무책임한 인간이 되면 너는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어린 시절 엉망이 된 시험지를 놓고 결심하는 내게 하신 당신의 말씀은 약속에 충실하라는 당부였습니다. 그런 당신 앞에서 나도 결국 흐트러질수는 없었습니다. 누구와의 약속이건 열심히 지켜주었고 함부로 약속을 남발하는 일도 없었구요.



  허나 남들과의 약속은 그렇듯 깔끔하게 지킬 수 있었지만 당신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채 세방살이로 떠돌아다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저를 찾아오신 당신을 모시고 처음으로 불고기점으로 향했습니다. 평소에도 고기를 그렇듯 즐기는 당신이였으니 그날도 예외가 아니였습니다.



  《나서 처음 이런 것을 먹어보는구나. 오늘 생일을 쇠는 기분이야.》

  평생을 시골 농부로 살아오신 당신이였으니 언제 불고기점에 눈길이나 주었겠습니까? 그날 불고기점을 나오면서 당신에게 불고기가마 하나 사드린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심히 던진 그 한마디였지만 당신은 그렇듯 즐거워했습니다. 허나 정작 노임을 받고 불고기 가마를 사러 가보니 내게는 천문숫자였습니다. 358원. 그때는 한달 노임이 겨우 280원이였고 거기다가 집세 130원을 내고 나머지로 살아가는 내게는 358원이란 하늘이 별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언젠가 좋아지면 하나 사드리지 하고 그대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후 노임도 오르기 시작했고 사정도 조금씩 좋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과 약속을 지킬수 없었습니다. 연인을 만나 거기에 정력을 쏟다보니 당신과의 약속은 까맣게 잊고 살아야 했습니다. 늦게나마 결혼을 했고 얼마전에는 딸애까지 안고서야 비로소 언젠가 당신과 했던 약속을 다시 떠 올렸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말했더니 언제 고향에 가면 하나 사드리고 오자고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늦게라도 지킬수 있으니 저도 안도의 숨이 나오더군요.



  허나 정작 딸애를 안고 당신을 찾아갔을 때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수 없음을 알게되였습니다.

  《이젠 이가 없어서 고기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

  실날같이 고기를 썰어서 올리는 아내를 보면서 버얼건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시는 당신 앞에서 나는 다시 할말을 잃었습니다. 틀 이를 해드린다는 아내의 말에 틀 이는 음식을 먹어도 제 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당신은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힘들게 살아가는 저를 걱정하셨습니다. 자식을 셋을 키워 놓고도 아직 초가집에서 먼지를 먹으며 살으시는 당신이지만 자식에 대한 원망보다는 주지 못하는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살으시는 당신이였습니다. 제가 당신과 한 약속은 그냥 묻어버리고 남들에게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기를 바라는 당신이였습니다. 그런 저를 키우기 위해서 당신은 내 앞에서는 단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으셨고.



  《부모가 되는 순간 자식에게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였다고 자신과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란 이름은 자식에게 끝없이 베풀어주는것이야.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킬 때 합격된 부모가 되는 것이고.》



  이 글을 적으면서도 제가 아빠가 되던 날 저를 잡고 하시던 당신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줄수있는 여유를 갖고 살으신 당신, 그런 당신이여서 항용 풍요로운 모습으로 살으신것은 아니였을가요?

  가을은 또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가을 앞에서 당신과 이루지 못한 약속을 떠 올려야 하는것은 나도 이젠 가을 속에서 다시 영글어야 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가을 앞에서도 아직 미숙한 자신의 모습을 아프게 보았습니다.



  잎새는 가을이 깊어가면서 색바래지만 당신과의 약속은 색바래지 않습니다. 지키지 못한 당신과의 어제 날의 약속이 오늘은 또 다른 하나의 열매가 되여 영글어야 하니깐요. 지키지 못한 약속은 가슴에 새기고 새롭게 맺어 가는 약속에 다시 한번 자신을 버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이 가을날 당신과 내가 해야 하는 또 다른 약속이고요.


  
구호준 수필가 : 중국연변방송국 피디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2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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