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꽃피는 나무
이 영숙
꽃의 계절은 가버리고 초록의 잎들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뜨거운 여름날 연녹색에 덧칠을 할 즈음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삼복의 경황 중에도 초롱하고 현란한 빛으로, 초복에 한번, 중복에 한번, 마지막으로 말복에 또 한번. 꽃은 세 번의 열매를 약속하는 것이다.
주택으로 이사 오던 해 손바닥만한 공간의 마당에 기념수로 심은, 어리디 어린 대추나무가 근 칠 년의 세월 속에 제법 어른티를 내며 해마다 제구실을 다하는 편이다.
가지마다 조잘조잘 매달리는 열매는 해를 더해 갈수록 숫자도 많아지거니와 굵기도 대추 축에 들 정도여서 울안에서 지켜보는 우리 가족은 물론, 오가는 이웃들도 부러움을 표한다.
소출이래야 큰 바가지로 하나 정도이지만 그 흐뭇함은 두어 말이 넘는 것 같다. 둘레 몇 집과 나누고 나면 실상 우리에게 차례 오는 건 한 대접에 불과하다. 나무에 달려 있는 동안 흐뭇함을 맛보았기에 조금의 입가심으로도 배가 불러온다.
콩 반쪽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사람의 도리라고 이르시던 부모님의 가르침이 이만큼 살아와서야 실천으로 행해지는 것 같다.
외출해서 시내 거리를 오 가노라면 많은 신호등을 접하게 된다. 푸른 신호등을 건너갈 때 유심히 살펴보면 거반 뛰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본다. 아직 빨간불이 바뀔 몇 초의 여유가 남아있는데도 무엇에 그리 쫓기는지 교차지점에서 사력을 다해 뛰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는 듯싶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일에 쫓기는 현대인을 보노라면 우리 집 마당의 대추나무는 늘 여유가 있다.
타원형의 둥그런 풋대추는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햇빛을 온 몸으로 빨아들이며 붉은 빛깔의 대추가 되기까지를 무던히 참고 견디어낸다.
조금이라도 덥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 비하면 땅속에 제 발을 묻고 붙박이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조건에도 의연히 참아내며 참 더위를 이겨낸다. 불을 들어붙는 듯한 여름을 훌훌 떠나보내고 대추는 입추의 문턱을 넘어선다. 언제 괴롭기나 했느냐는 얼굴로 가지가 꺾일 정도의 열매를 매달고 있을 뿐이다.
연약한 풀 한 포기, 하찮은 풀벌레, 보아주는 이 없는 들꽃도 아무런 인연 없이 태어난 것은 한 가지도 없다.
바람 속에서도 공기 속에서도 우리가 배울 것들은 주위에 널려 있다. 좀더 여유로운 자세로 자연의 삶을 닮아가고 싶다.
올 가을도 단계적으로 세 번의 수확을 안겨 줄 통통한 대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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