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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암 一枝庵
윤주홍
초의선사(艸衣禪師)의 오우(五友)
늦은 봄날이다. 사수회(思隨會)동인들이 가사문학의 원류를 찾아서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의 생가와 다산이 유배지에서 피운 문학의 향기를 쫓아, 나선 김에 유적을 둘러 오느라 강진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지는 벚꽃의 뒤를 따라 찾아온 우리들을 아쉬워하듯 아직 남아있는 꽃잎을 마음껏 쏟아 부어 눈 인양 우리 길에 뿌려 환대한다. 한 발치 물러서 환하게 피어있는 백목련들은 내 여린 여심(旅心)을 흔들고….
그저 이 고장의 산수화가 소치(小癡)의 병풍 한 폭 한 폭을 펼쳐 놓듯 명소 곳곳이 감탄스럽다. 그 풍경 속에 파묻혀 긴 시간을 두고 완상(玩賞)의 느린 걸음 걷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고산의 생가에서 시간을 나우 보내고 남도의 산수풍광에 눈을 팔다가 밤이 늦어서야 숙소인 유선관(遊仙館) 여관에 들었다. 대흥사(大興寺) 바로 경내에 있는 옛 모습 그대로의 여관이다. 여행의 멋과 정취를 더하기 위한 치밀한 배려이였으리. 유서 깊은 대사찰 대흥사를 돌아보고 우리나라 다문화를 중흥시킨 초의선사(艸衣禪師)가 40년을 지관(止觀) 참선에 전념하여 불이선(不二禪)의 득도로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지암을 들러보고 싶음에서 정한 터이다.
초의선사(艸衣禪師)는 일지암에서 당대에 유명한 詩 書 畵의 명사 다산, 추사, 소치들과 벗하였지만 홀로일 때는 다감(茶龕)에 다른 벗을 불렀으니 달과 구름이었다. 그의 시에
밝은 달 촛불삼고 또 벗 삼아
흰 구름 자리 펴고 또 병풍도하여 (東茶頌 16頌 일부)
흰 구름 밝은 달 두 손님 모시고
나 홀로 한잔 따라 마시니
道人이 앉은 자리가 이보다 나을 손가 (東茶頌 31頌)
일지암
귀 설게 목탁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잠을 흔들지만 머뭇거리다가 산행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나도 서둘러 신발끈을 맸다.
일지암은 대흥사의 무염지(無染地) 앞을 지나 700m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면 동남방 분지에 낯설게 앉아있었다. 사방에 테 마루를 하고 있는 방엔 아직도 불이 밝혀 있고 토방에 앙증한 검은 고무신 한 켤레 외롭다. 비구니일까? 밤새껏 번뇌를 털어 올리는 천배가 아직도 채움이 남아있나? 아니면 아직도 셈이 남은 백팔염주 때문일까? 궁금한 방안을 뒤로하고 인적을 낮추었다.
하산하며 가벼운 수다에 산 동백꽃은 지고 진달래는 드문드문 되돌아서 서있다. 제 시절 다 잃고 떨어진 꽃을 본다. 서글픈 심정을 달래주듯 다기(茶器)를 미리 장만해온 동행인이 벌써 끓인 옹달샘 물에 울어난 차향은 꼭 초의선사의 그것보다 더 깊은 정이 서린다. 나는 떨어진 꽃 하나 집어 들어 찻잔에 띄운다. 꽃잎은 꽃잎대로 색깔도 선명하게 활짝 살아나 잔에 가득히 배여 나와 아름답기 하나의 예술품이다. 차마 입에 댈 수 없는 그 동백꽃차를 끓인 두륜산이 바로 초의의 다실이요, 앉아 있는 바위는 다감(茶龕)이 아니겠는가. 이 황홀한 차는 오직 오늘의 두륜산 일지암에서 만이 얻을 수 있는 초의선사의 마음이리라. 나는 잠간 눈을 감고 새되어 짐짓 가지에 한밤을 머무를 동백나무를 그려 보는데 차향에 아침 산 냄새가 가슴을 적신다.
선유관에 돌아와 환속을 서두르듯 아침식사 후 노트에 이렇게 적어본다.
一枝庵
하루 밤 자고 가는 나뭇가지 외로운 새
숨어 우는 소리에 두륜산 동백꽃 진다
평생이 가지에 한밤 자고 나는 새 같거니.
흔적 없이 왔다가 그림자도 거두어서
業으로 안고 가는 바람 따라 구름 간다
대흥사 無染地 지나 일지암에 가느니.
차 잎에 이슬방울 아침햇살 영롱하다
초의선사 장삼 젖네 차 잎 뜯기 바빴으리
어느새 끓이는 水根 茶香 같은 산 냄새.
*無染地: 대흥사 대웅전 앞에 팻말로 써 붙인 글귀.
水根: 茶文化에 쓰이는 낱말로 아주 깨끗한 물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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