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할머니
송암 조 한 석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기도를 하고 계셨다. 새벽마다 장독대 앞에 정안수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손을 비비고 있었다. 식솔을 데리고 야반도주한 자식을 위해 삼신할머니에게 빌고 계셨던 것이다. 종교가 없던 당신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기도였을 것이고, 현실을 이겨내려는 탈출구였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금산읍에서 양복점을 하셨다. 교복을 맞춰 입던 시절이라 손님이 많았다. 금산성당 부설 유치원을 다녔던 것으로 보아 부유하지는 않았어도 살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 가족이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이와 남동생을 데리고 통영으로 갔다. 왜 고향을 떠났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자식이 성공해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기를 바라며 장손을 인연의 끈으로 잡았다. 할머니의 기도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시골생활은 적응하기 정말 힘들었다. 내가 아프면 할머니는 무조건 “할머니 손이 약손이다”며 배를 쓸어 주셨다. 의료시설이 없던 곳, 의지할 곳 없던 시절 할머니의 선택은 간절한 기도뿐이기에, 어머니가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모습을 그리다 사르르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 손’은 당신의 손을 의미했던 것일까? 아니다. 삼신할머니를 의미한다. 어릴 때 삼신할머니가 아기를 점지해준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삼신할머니는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여성이 아기를 낳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삼신이라는 명사에 할머니를 붙였던 것이다.
삼신(三神)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섭리다. 자연의 섭리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고 탄생시킨다. 선조들은 만물을 낳는다고 하여 조화신(造化神), 만물을 기른다고 하여 교화신(敎化神), 세계를 다스린다고 하여 치화신(治化神)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을 삼신이라고 했다. 세월이 지나 삼극(三極), 천지인(天地人)으로도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과학의 눈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과 질량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 순간에도 알게 모르게 “3”이라는 숫자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를 생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곡기를 끊으면 죽는다는 말을 종종 듣고 산다. 곡기만이 아니다. 물을 끊어도 죽는다. 공기를 끊어도 죽는다. 공기와 물과 곡식은 우리에게 생기를 주고 원기를 준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공기를 주제하는 하늘의 천기(天氣), 물을 주제하는 수기(水氣), 그리고 곡식을 주제하는 땅의 지기(地氣), 이것이 바로 자연이고 삼신할머니인 것이다. 길가의 풀 한포기도, 나뒹구는 낙엽 하나도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있는 통영으로 데려다 주셨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큰 도시에서 다녀야 한다며, 그렇게 떠난 고향은 차츰 내 기억에서 잊혀 졌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가을에 한 번씩 벌초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겨울철에 처마 끝 구멍으로 참새를 잡던, 라디오 있는 집에 모여 드라마를 청취하던 추억이 아련할 뿐이다. 초가집이 있던 자리에 유럽식 주택이 들어서고 TV가 집집마다 있다. 삼신할머니를 찾기보다는 옆 마을에 있는 교회를 찾는다.
아름다운 꽃이 지고 녹음이 우거지는 오월의 끝자락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졌던 삼신할머니가 새삼스레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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