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목걸이
김윤희
시내 한복판 도청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옥 음식점이다. 나무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그 집 문지방을 넘을 때부터 시계바늘은 대번에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마당가에서 밝고 따사로운 햇살에 올망졸망 스스로를 키우고 있던 채송화며 분꽃들이 치맛자락을 잡는다. 선뜻 방으로 들어설 수가 없어 멈춰 섰다. 아직 채 피지도 않은 분꽃 잎사귀 사이로 분가루를 파내어 얼굴에 문대며 키득대던 꼬마 계집애의 얼굴이 알찐거린다.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무렵 꽃잎을 다투어 열기 시작하던 분꽃. 종자의 배유가 분가루 같다 해서 분꽃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왜 하필 저녁에 피었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꽃잎을 닫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쥐눈이콩 같은 검은 씨앗 속에 하얀 분가루가 들어 있었다.
해는 앞마당 오른쪽에 널찍이 펼쳐져 있는 평상 끝에 길게 꼬리를 내리고 한가로이 걸터앉아 있다. 아슴한 기억 한 자락 옆에 끼고 함께 다가앉으려니 평상 위에는 햇살뿐만 아니라 별을 닮은 또 다른 무리가 쫘-악 깔려 있는 것이다.
‘감꽃? 감꽃이다. 아하! 감꽃이었구나.’
올려다보니 꽤 커다란 나무다. 그래, 감나무도 꽃을 피웠었지. 현재 피어 있는 꽃을 보고도 왠지 과거에만 피었던 꽃, 동화 속의 별꽃을 보는 것 같다. 한 움큼 모아들고 코끝에 대보니 애련한 향이 물큰하게 느껴진다. 꽃목걸이 주렁주렁 걸고 흐뭇해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꽃 향에 실려 이내 고향집으로 데리고 간다.
우리 집에도 감나무가 두어 그루 있었지. 밑둥치가 거의 한 아름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걸 보니 아마도 이 나무보다 좀 더 컸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지만.
오늘처럼 나무 밑에 감꽃이 소복이 쏟아져 내릴 때면 친구들과 이 집 저 집으로 감꽃을 주우러 다녔다. 그리고 그 꽃을 보석처럼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걸었다. 지천으로 깔린 게 꽃인데 다른 아이들보다 더 긴 목걸이를 만들려고 기를 썼던 것으로 보아, 천진했을 그때에도 욕심을 부렸던가보다.
마당 가득 쏟아져 있는 감꽃 향이 날아갈세라 아니, 그보다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옛 추억을 붙잡아 놓아야 할 것만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그래서 얼른 이 집 안주인에게 꽃목걸이 만들 만한 실 한 파람을 부탁했더니 물건 묶는데 썼던 빨간 비닐 끈 하나를 찾아다 주며 싱긋이 웃는다. 오늘따라 빨간 비닐 포장 끈이 유달리 생뚱맞아 보인다. 기억 속 그때에는 땀이며 꾀죄죄한 손때까지 다 받아들이던 무명실이었는데…….
잠시 나의 사념 속으로 까르르 아이들 웃음소리가 끼어든다. ‘하늘’이와 ‘희’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문우의 두 딸아이다.
“아줌마 어렸을 때는 이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었단다. 예쁜 목걸이 만들어 줄 테니 저기 떨어져 있는 감꽃 모아올래?”
아이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정신없이 조막만한 두 손 가득 꽃들을 모아 나른다. 마치 꽃 속에 벌이 드나들 듯…….
감나무가 해마다 먹음직한 홍시를 주렁주렁 매달기까지는 수많은 꽃들을 피워냈고 또 많은 벌들이 이 아이들처럼 조그마한 몸뚱이를 부지런히 움직여 꽃 속을 드나들었을 텐데, 어렸을 때 이후 한 번도 그 꽃을 눈여겨 본 일이 없었다. 감꽃이 피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감나무 하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를 연상했고, 빨갛게 잘 익은 감을 보고 꿀꺽 침을 넘기던 식탐에 혼자 부끄럽다. 어느새 과정은 건너뛴 채 결과만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감나무를 한 번 더 올려다본다. 내 어릴 적 감나무는 꽃이 필 때부터 까치밥으로 서너 개 홍시로 남을 때까지 아이들과 늘 함께 한 친구였고 그 그늘은 놀이터였다. 거기에서 꽃들은 목걸이가 되었고 떨어져 먹지 못하는 땡감은 소꿉놀이 음식이 되었다. 소담하게 익은 홍시와 처마 끝에서 잘 말린 곶감은 겨우내 든든한 간식거리였다.
그러던 감나무가 세월의 흐름 한쪽에서 잠시 잊혀 있었다. 떨어져 있는 꽃들만큼이나 많은 날들을 거슬러 꿰어본다. 목걸이를 만들며 연신 입에 꽃을 집어넣던 일이며, 왕밤톨만 해진 땡감을 주워 들이느라 앞자락이 온통 얼룩덜룩했던 기억까지 하나하나 더듬어 꿴다. 제법 낯익은 목걸이가 그럴 듯하게 완성되었다.
“어때, 이쁘지?”
“와! 정말 예쁘다.”
신기한 듯 뱅긋이 웃으며 목걸이를 받아 건 아이들. 이 아이들이 모아온 꽃은 꿈이었고, 그 꿈을 받아 실에 꿴 것은 추억이었다. 빨간색 가로줄 무늬 티셔츠에 딱 손바닥만한 짧은 청치마를 바쳐 입은 아이들에게도 이 감꽃목걸이가 썩 잘 어울려 보인다.
내가 살아온 만큼 세월이 저만치 흐른 후에도 여전히 감꽃은 피고 또 별처럼 쏟아질 것이다. 이 꼬마 공주들이 오늘 처음 만난 감꽃에, 그리고 감꽃 목걸이에 눈을 빛냈던 것처럼 먼 훗날 어디에선가 함초롬히 피었다 떨어지는 이 꽃을 또 누군가 우연히 만나게 되겠지. 늘 추억 같은 꽃 속으로 한 여인의 유년이 감꽃 목걸이를 걸고 자박자박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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