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 정하린
처마 밑 페이트칠이 벗겨져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다. 보일러도 꺼진 지 오래, 냉골 방이 아버지가 안 계심을 실감나게 한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벌써부터 여러 방의 보일러를 켜놓고, 아랫방 구들장도 달궈 놓으셨을 텐대... 바닥에 하얀 먼지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얘기해 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 어머니가 혼자 사실 형편이 못되어 그 동안 고향의 집은 비어 있었다. 사방이 병풍으로 둘러친 듯한 1)황석산 밑 고향집-.평생을 이 곳에 살고자 하셨던 아버지의 뜻이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어 제사를 고향집에서 모시기로 했다.
제사상차림을 위한 음식을 만들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30분. 한참 지난 후 다시 한 번 보았다. 시계보기를 몇 번하다가 멈춰진 시계임을 알고는, 둥그런 시계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올라 목울음만 삼킨다. 애매한 부침개만 자꾸 뒤집어도 지나간 일 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주고 간 건전지 1.5볼트 밥을 얼마나 아껴 먹었을까. 다시는 주인의 밥을 얻어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서러웠을까. 일 년 전 아버지 생명의 시계는 멈췄지만, 아버지의 여운이 남은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떠나고 흐르던 시간이 몇 날인지는 알 수 없다. 초침이 멈춰 서던 그 날, 시계는 아버지의 혼을 담고 흐르다 4시 30분에 멈춰서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남은 체취로 흐르던 그 시간, 아버지의 영혼은 무엇을 하셨을까.
한동안, 2)파래골, 여부개, 마랑골, 안심뜰을 차례로 살폈을 것이다. 남은 뜰을 두고 감이 못내 아쉬워 다시 둘러보았으리라. 지난 한 해는, 다른 사람에게 맡겼던 농사가 아버지의 음덕으로 잘된 것 같다. 해마다 태풍으로 쓰러진 나락을 세우느라 힘들었는데, 작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항상 하시던 것처럼 아침을 들기 전에 논을 둘러보던 시간, 아버지의 시계는 그 시간을 또박또박 일러주었을 것이다.
음식냄새 때문인지 고양이가 마루 밖 섬돌에서 기웃거리고 있다. 아버지는 남은 음식을 담벼락 위헤 갖다 놓곤 하셨다. 집에서 기르는 짐승만이 아니라 도둑고양이도 아버지의 말년엔 멀리 떨어진 자식보다 나은 식구였다. 아마 아버지가 안 계시던 일 년을 영문도 모른 채, 고양이들은 매일 사람을 기다렸을 것이다. 사람소리를 듣고 찾아온 그들에게 차마 아버지가 안 계심을 알려 줄 수가 없다. 대신 저녁상에서 남은 생선가시를 선물로 줄 수밖에, 아버지가 남긴 그들을 위한 만찬으로.
그들을 자세히 보려고 문을 열고 나가자 집 모퉁이로 꼬리를 감춘다. 따라가 보니 그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열 3)강다리가 넘을 것 같은 장작이 슬레이트 모자를 쓰고 말없이 앉아 있다. 아버지는 여든 아홉의 연세에도 저 장작을 팼을 것이다. 장작더미 앞에서 초라히 잠자고 있는 4)모탕의 모습은 아버지의 삶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서울로 떠나간 자식들이 보고파서, 당신보다 앞에 이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 생각에, 얼마나 저것들을 패댔을까. 심지어 장손을 잃고 난 뒤에는 얼마나 많은 날을 장작에 한풀이를 하였을까. 모탕은 장작과 함께 찢기고 패이며 죽은 듯이 아버지의 한을 받았으리라.
아랫방 아궁이에는 오빠가 지핀 장작불이 여울여울 타고 있다. 한 시도 몸을 놓아두지 못하는 아버지 성미에, 가을걷이가 끝나면 내 숙제는 나무를 하는 것이었다. 어린것이 나무를 하면 얼마만큼이나 할까마는 아버지는 고사리 손이라도 쉬는 꼴을 못 보셨다. 막내오빠는 주로 5)물거리를 해서 지게에 지고 오고, 나는 6)마들가리를 해서 매동거려 이고 왔다. 7)가시섶이 있는 나무를 하면 온 옷에는 가시랭이가 붙어서 나를 괴롭히곤 했었다. 꾀를 부리느라, 부피가 많은 굴밤나무 잎을 해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핀잔을 하셨다. 나무로 치자면 8)갈비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넓은 잎이 금방 불붙었다 힘없이 사라지는 것보다 적은 부피에도 좀 더 오래도록 탈 수 있는 갈비가 좋은 것은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가마솥은 그 때의 추억들을 삶아내며 아스라한 기억들을 하얀 김으로 날려버린다. 아궁이 속에는 지게 지고 산을 오르던 아버지의 젊은 기운이 너울거리고, 가마솥 9)전두리에는 내 가슴에 전해 오는 아버지의 긴 눈물이 흐르고 있다. 타는 장작소리가 아버지의 커다란 외침으로 들려온다.
마루 한 켠 책상 위에 장식품 하나가 놓여 있다. 아버지는 농사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살 줄을 모르던 분이셨다. 때를 잇기 위한 것이 아니면 낭비라고 생각하셨다. 깨어진 플라스틱 바가지도 꿰매어 쓰던 그런 부이 암탉과 수탉 그리고 알이 두 개 있는 닭가족 모형을 손수 사 오신 것이었다. 옆에서 소리를 내면 '꼬끼오'하고 소리를 내는 장식품이다. 여름휴가 때 내려가니 아버지는 그것을 내놓고 자랑을 하셨다. 소리도 낸다며 신기해 하시며 계속 닭을 울렸다. 그 때 아버지의 그리움을 봐야 했다. 아버지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닭울음으로 번져 나옴을 진작 알아야 했다. 아무도 아버지의 공허함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신기해서 쳐다만 봤을 뿐, 그렇게 울고 있는 아버지의 하직인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장식품의 닭울음도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조용히 입다물고 있었다.
오빠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건전지를 사왔다. 나는 문득, 우리가 떠나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쉼없이 일할 시계를 떠올렸다. 들을 사람도 없는 빈집에서 바람결에 울 닭들이 애처로웠다. 누구를 위해서 일할 것인가. 누가 그들에게 하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눈길을 줄 것인가.
다시 시계가 째깍거리며 간다. 아버지의 체취로 움직이는 시간은 이미 없어졌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 흐를 뿐......
(2006.9 선수필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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