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일락 필 무렵 / 도월화
내가 다닌 중학교의 도서관은 산뜻하게 지은 하얀색 2층 건물이다. 아래 위층으로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거기서 제일 먼저 읽은 책이 [엄마 찾아 삼만 리] 이다. 감동받아 눈물 뚝뚝 떨어뜨려가며 읽던 지난날의 추억이 스친다. [쌍무지개 뜨는 언덕]도 재미있었고, 라일락 필 무렵이던가, 하는 책에도 빠져들었다. 제목이 확실치 않아 PC로 검색해 보니 [라일락 피는 집]이 맞다. 그러나 나는 라일락 필 무렵이란 어감이 너무 좋다.
“라일락 필 무렵, 라일락 필 무렵......”
속으로 중얼거려 보면 라일락 향기가 난다. 따사로운 햇살, 부드러운 바람이 상큼하게 와 닿는 봄날, 미풍에 가지가 춤추는 듯 흔들리고 아직 대기에 오염되지 않은 연록의 잎 새가 반짝인다. 작지만 또렷또렷한 꽃이 소담스레 피어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흰색 보라색 리본으로 치장한 소공녀들이 모여, 도란도란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것 같다.
역사가 오래된 교정에는 수영장도 있고 조경이 좋았다. 교실 창 밖에 아주 큰 라일락 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었다. 바람이 일면 더욱 짙은 꽃향기가 실려 들어왔다.
갑자기 교실 가득히 라일락향기가 확, 퍼질 때마다,
"아아...... "
수업 중의 조용한 공간을 가르며 급우들이 일제히 탄성을 지른다. 연이어 까르르, 터져 나오던 그 시절의 웃음소리가 그립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라일락 꽃 소공녀들과 우리들은 달싹한 향기와 찬탄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대학 졸업한 다음해, 영등포 어느 중학교 교사로 발령 받았다. 도서관도 없고 수영장도 없었다. 교정에 나무도 별로 없었다. 교실과 학생만 있으면 학교가 되는 건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 급조된 학교가 들어선다. 나의 여중시절처럼 교실 창가에 라일락 나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그 햇병아리 교사 시절은 내 인생의 라일락 필 무렵이었다고나 할까. 그 때만 해도 나의 눈에 광채가 났고 그렇게 반사되어서인지 나를 쳐다보는 이들의 눈도 빛났다. 지금은 나의 눈빛이 흐릿하게 되어 그렇게 반사되는지, 사람들이 흐릿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을 때가 있지 않던가.
동료들 중에 국어과 안 선생과 과학과 최 선생이 대학 동기였다. 교감선생님은 독일 유학중인 따님과 우리가 동기라고 하시며 각별한 정을 보이셨다. 멀리 있는 따님이 보고 싶으신지, 우리 셋을 데리고 경치 좋은 곳을 찾으시기도 했다. 북악 스카이웨이 부근의 교감선생님 친지 댁도 같이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곳은 라일락 피는 집이었다. 차 한 잔 나누며 그 댁의 연보랏빛 라일락과 칠면조와 다른 이름 모를 새들을 구경하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 대외적인 일은 교장선생님이 하시고 교무실내의 일은 교감선생님이 주로 관장하신다. 그 시절 교감선생님은 갓 대학 졸업한 고분고분한 여교사들은 교무실 중앙의 교감 책상 가까이 자리 배정을 해 주셨다. 빈정대기 잘하고 약간 반항기 있는 젊은 남 선생님들은 구석진 자리에 앉도록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모습이 단정하고 성격이 얌전한 젊은 수학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 분은 교감선생님의 특별대우로(?) 중앙의 여교사들과 교감책상 가까이에 앉았다. 외모는 [젊은 느티나무]의 비누냄새 나는 오빠보다 결코 못하지 않을 것 같으나 성품 탓인지 비누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대신 해묵은 장서들로 가득 찬 서재의 종이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지난달에는 막내가 입학한 고등학교에 갔다. 신학기 학부형 총회에 참석했다. 올해의 학사일정과 교사명단이 있는 유인물을 받았다. 교사명단에 아는 이름이 있었다. 분명 그 종이냄새 선생님의 성함이다. 이분 혹시 모습이 좀 단정하시고 경상도 억양의 수학 선생님 아니세요? 하고 일정이 끝난 후 막내의 담임선생님께 여쭈었더니, 맞아요. 키 크고 잘 생기셨어요, 했다.
"20 여 년 전 교무실에서 제 옆자리에 앉으셨던 선생님 같아서요. 지금 뵐 수 있을까요?"
하니까 조금 전에 퇴근했단다. 몇 주 후 종이냄새 수학 선생님과 전화 통화했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말씀 전해 들었다며 반가와 하신다. 그 곳이 첫 발령지 여서 옛날 생각이 더 나더라고 한다.
"벌써 20 여 년이 지났네요. 그간 학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라는 나의 물음에 그 선생님이 대답했다.
"똑같아요. 달라진 거라고는 학교에 컴퓨터 몇 대 들어온 것 밖에 없어요."
그 반가운 조우 후에 나는 다시금 옛날을 회상해보았다. 현대문명은 세상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십 여 년 전의 컴퓨터 광고가 우스개 소리가 되어 버렸다. 요즘 사람들은 손에 들어오는 작은 기기 하나만 휴대하면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멀리 있는 이와 대화할 수 있다. 곧 인터넷을 통한 화상전화기가 가정마다 들어올 판국이다. 그런데도 후세의 교육현장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니......
기술은 나날이 진보하는데 세상은 왜 더 각박해지기만 하나.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없어져 가는 탓이 아닌가.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시달리는 독일 국민에게 민족의 부흥을 위해서는 시(詩)를 짓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 1762.5.19~1814.1.27)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풍요로운 정신은 풍부한 정서의 함양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술문명의 발달만으로 정신문화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20 여 년 전 햇병아리 교사시절이나 지금의 막내가 다니는 학교 교정이나 그 옛날 나의 중학시절 보다 나은 점이 없을뿐더러, 요즘은 대학 입시 때문에 꽃이 언제 피는지 지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고등학교만 들어가면 도시락 두개 싸서 밤늦게까지 야자(야간자율학습)에 시달린다.
나의 중학시절, 아름다운 교정은 어떤 정취가 있었다. 그 때도 입시지옥이란 말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보다는 확실히 마음의 여유가 있지 않았는가. 밤늦게까지 학교의 큰 도서관에서 책을 보기도 하고, 문화교실이라고 해서 영화 단체관람도 많이 했다. 요사이는 아이들의 정서 함양을 위한 감동이 있는 영화도 좀처럼 없다. 영화도 기술적인 발전만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수록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위대성에 마음이 기울어진다.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재려고 드는 신세대식 사고방식이 안타깝다. 지금도 라일락 필 무렵이면, 모교의 후배들이 미풍에 실려 오는 라일락 향기에 `아아... ' 하고 다함께 탄성을 발하고 있을까. 그 때를 회상하면 다시 나의 눈에 광채가 나고 하늘, 나무, 회색 빛 건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난다.
- 도월화 수필집 ' 여월여화 (如月如花)'/2007년 봄 선우미디어 출간,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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