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그리고 환상
김순재
도회의 봄은 문 앞에 와있는데, 이곳 강원도 산골은 깊은 눈 속에 잠들어있다. 봄을 덮고 있는 눈을 보기 위해 대관령을 넘어서 왔다. 설한도 아닌 조춘에 눈을 찾은 것은, 이곳에 때 아닌 폭설이 내려 쌓였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품어온 눈에 대한 환상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나는 눈에 대하여 약간의 퇴폐적 환상을 갖고 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눈 쌓인 산골에서의 몇 밤. 휘영청 달빛 반사광이 가슴 저리도록 푸른 설원. 눈물 같은 설원을 건너 내 창가로 지나가는 밤의 소리. 그리고 라라와 지바고.
제설된 길을 두고 순백이 쌓인 소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이곳에 1미터가 넘는 눈이 내려 고립되었다는 기사가 났지만, 지금은 내 정강이가 묻힐 정도의 높이로 줄었다. 그 사이 오대산 봄바람이 시나브로 지나다닌 것이다. 그래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정강이가 빠지는 산골 눈을 밟아보기는 처음이다. 짜릿한 쾌감과 함께 낭만에의 기대로 가슴이 부푼다.
사그락 한 발자국, 사그락 한 발 자국. 설핏 얼어있는 눈에 빠지며 환상을 찾아간다. 오감이 상기된다. 내가 동경해 왔던 눈과의 해후가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이 행복을 상상하며 지난밤을 설쳤다.
건너편 산막이 있는 곳도 솔밭만큼이나 눈이 쌓였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음이 역력하다. 주위의 금강소나무들은 눈을 털었는데, 두껍게 쌓아놓은 산막 지붕은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희다. 그게 되려 적막해서 마음에 맺힌다. 눈 덮인 광활한 러시아 평원, 떠나고 없는 라라의 텅 빈 얼음궁전 같다. 저 곳에 갇혀서 눈과 밀월을 속삭였더라면… 내 귀는 신비롭게 열려 산골짜기를 지나는 밤의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옷을 벗은 자아가 자연과 합일하는 충만에 흐느껴 울었으리라.
젊은 날에는 환상이 많았다. 꿈과는 다른 공간. 생활을 잉태하고서도 생활이 없는 공간, 거기를 많이 배회했었다. 이해 할 수 없는 인생이,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막막한 청춘이, 영화 같은 사랑이, 신화 같은 기적이, 수시로 드나들며 배회했다. 수 없는 환상이 뜨고 지고 부서졌는데, 눈에 대한 환상은 왜 지금껏 남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눈 쌓인 솔밭을 걷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푹푹 빠지는 발을 떼놓을 때마다 중심이 흔들린다. 비틀거려 몇 차례 넘어질 뻔도 했다. 처음에는 설레고 흥분됐지만, 발을 떼놓는데 열중하다보니 눈을 느낄 겨를이 없다. 그토록 달콤한 꿈을 꾸게 하던 대상이 거센 태클을 걸어온다. 애를 쓰며 걸어보지만 더는 갈 수 없을 것 같다. 퍼뜩, 평온한 눈 바닥에 무엇이 숨어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험한 바위와 구렁이 있고, 자빠진 나뭇가지와 불거진 나무뿌리가 숨어 있을지 모르겠다. 자칫 위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 난감하다.
아직도 나는 꽃으로 필순 없어도 꽃노래는 부를 수 있는데, 눈은 냉정하게 나의 노래를 거절한다. 시퍼런 오만으로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눈과의 해후를 이렇게 망치다니. 산골짝 깊은 눈을 보고 싶어하는 나를 위해 이곳에 사는 문우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를 걱정하듯 차편을 마련해주고, 길동무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고마운 정을 생각하니 무모한 내 자신이 더욱 무모하게 느껴진다.
환상은 환상으로 있을 때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순간의 것일지라도. 눈을 걷어 터놓은 길로 돌아가야겠다. 내 한계가 어느새 여기에 와있었던가. 그래도 미련이 남는다. 가볼 수 없는 곳에의 미련이 떨쳐지지가 않는다. 더 깊은 골에는 어떤 설경이 펼쳐있을까. 세차게 떨어지던 폭포는 얼음꽃을 피워 놀라운 경치를 만들어놓았겠지. 산산이 부서진 환상을 옆에 두고 또 환상을 만든다.
내 환상은 늘 바보스럽다. 조잡하고 비생산적이다. 위대한 환상이 우주를 개척하고, 극지를 정복하고, 불후의 예술작품을 남기지만 나의 환상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 향기로운 집착과 애증과 배신. 욕망, 잡히지 않는 유혹. 미래, 교활한 사기꾼. 그런 것들이다. 그것들이 환상 속에 들어오면 무중력 상태가 된다. 지고한 사랑도, 지고한 아름다움도, 환상에서 가능하다. 비록 내 환상이 비생산적이고 조잡할지라도, 때론 그런 환상에 매몰되기를 환상한다. “인간은 누구든 환상이 그에게 빌려주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졸졸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려다보니 얼어있는 눈 계곡 가운데로 실개울이 지나가고 있다. 물살에 갉아 먹힌 개울 가장자리가 흡사 벌레 먹은 이파리다. 듬성듬성 가냘픈 고드름도 달렸다. 지금은 저래도 한 때는 우렁찬 계곡물이었을 것이다. 약하지만 쉬지 않고 흐르는 소리. 봄이 깨는 소리.
봄은 저렇게 냉혹한 겨울을 끊임없이 쪼며 온다. 단단한 얼음을 깨어 길을 내며 온다. 잊혀진 아픔으로 여름을 건너고, 보람을 빼앗긴 가을을 돌아서 이만큼에 와있다. 제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 멀고도 고달프기는 자연도 사람과 마찬가지다.
그 길에 환상은 없다. 설원은 설원일 뿐이고 라라는 라라일 뿐이다. 전율할 설광은 자연스런 풍경이며, 밤은 언제나 소나무 숲길을 지난다. 지금 나는 그것을 확인 하고 돌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있어 삶을 꿈꾸게 하는 광휘였다.
환상! 기대하고 실망하고, 쌓고 부서지는 허망. 그러나 존재의 고독이 쉬었다 가는 마법 같은 공간. 어쩌면 허망에 기대어 꿈꾸다 가는 우리의 삶도 환상이 아닐는지.
삼백초 차를 끓이고 있을 산 아래 문우가 새삼 따습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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