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크 이야기
창작수필 安 貴 順
46년에 제작한 미국영화 ‘멋진 인생’이 상영되는 극장이다. 불이 꺼지기 전에 한 젊은이가 마이크를 들고 나직하게 멘트를 한다.
“오늘 여기는 영화보다 더 연륜이 깊은 어르신들도 오셨습니다. 3대가 함께 우리 시네마를 찾아주시니 저희는 정말 일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고희에 이른 부부와 불혹의 딸, 중학생인 외손녀가 마주보며 싱긋 웃는다. 30대 젊은이가 40년대 아득한 영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객석에 앉으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날 우리 내외는 영화보다 더 늙은 사람이 되어 영화의 전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이 보여주는 멋진 인생을 만났다.
부산의 대표 예술영화 전용관 시네마테크다. 영화는 인생의 거울이라 했다. 날로 발전하는 문명에 따라 인간생활도 복잡다양하다. 그 만큼 영상물도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난해하여 가족끼리 감상해볼 영화가 드물다. 이런 때에 부산시민을 위한 시네마테크는 고향집 사랑방처럼 편하고 아늑해서 좋다. 여기는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에서 청소년을 위한 화제작, 어른들을 위한 고전영화까지 세계 영화 백년사에 빛나는 엑기스만 추려 모아 상설특별전을 열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열을 올리며 드나든 지도 십 수 년이 넘는다. 세기의 별들이 내 고장을 찾아오는 가을이면 공연히 들떠 설레곤 했다. 해마다 영화제를 알리는 신문기사를 캡처하여 문우들 사이트에 퍼 나르며 초대장을 띄우곤 했다.
‘바다와 강바람이 상큼한 해변에 별들의 축제가 있습니다. 허공에 걸리는 대형 스크린 위에 영화가 익어가고,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들이 어깨를 기대어 영상에 취하면 초승달과 별들이 살며시 스크린 곁으로 다가옵니다.’부산국제영화제‘의낭만을 즐겨보세요.’
덕분에 찾아오는 손님들 치다꺼리로 허리가 휠 때도 있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하고 행복했다. 문제는 티켓을 구하느라 허둥대다보면 어느새 잔치는 끝나고, 실컷 눈독만 들이던 영화는 사라지고 없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기웃거리다 이곳을 만났다. 여기는 나 같은 관객을 위해 잔치 끝에 남은 별식을 골라 선물해 주었다.
호젓한 영화관 벽면에는 세계영화사를 주름잡는 별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있다. 본인들의 친필 사인과 핸드프린팅 등이다. 내가 좋아하는 중국의 장예모 감독을 비릇하여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독일의 빔 벤더스, 한국의 신상옥, 최은희부부와 프랑스 배우 잔 모로 등 그들의 필체와 손 모형을 보면 손을 내밀어 악수라도 청하고 싶어진다.
올 봄, 시네마테크엔 ‘예술영화의 향기’와 월드시네마‘ 특별전으로 풍성하다. 어제는 히치콕 감독의 ‘해리의 소동’과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이탈리아 여행’ 두 편을 연타로 보았다. 잠깐 틈이 나는 시간에는 매점 아줌마가 내려주는 따끈한 원두를 마시며 요트경기장을 산책해도 좋다. 바다와 강이 토해내는 야릿한 갯냄새와 봄꽃들의 향기를 먹고 자애로운 햇살에 흥건하게 샤워를 하다보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박경리 선생은 ‘세상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좋다.’고 했지만 영화와 문학이 있고 맑고 푸른 해변에서 영상에 취해보는 호젓한 시간이 참 좋다. 늙어서 좋고, 외로워서 더 좋다.
사람은 떠나도 예술은 남아 인류의 가슴에 영롱한 별이 된 마리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등을 만나는 날은 숨이 막히고 가슴이 뛴다. 내게도 저런 청춘이 있었던가. 저들이 화려한 파티에서 비단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춤을 출 때 나는 무엇을 했던가. 전쟁의 공포에 떨며 까칠한 삼베옷에 송진을 빨고, 산딸기를 먹고 동전만한 하늘을 보며 꿈을 키웠으리라. 그 산골아이가 지금 별들의 안방을 기웃거리니 이는 모두 영화가 주는 선물이다.
영화 ‘클라라’에선 슈만이 사랑했던 천재 피아니스트를 보았다. 별처럼 고귀한 ‘클라라’ 그녀도 아이를 일곱이나 줄줄이 낳고, 우유 값을 걱정하며 똥을 치우던 손으로 미친 듯 음반을 두드렸다. 말없이 그녀를 향해 애달픈 짝사랑을 보내며 고독한 생애를 바친 브람스가 너무 가여워 울기도 했고, 톨스토이의 ‘마지막 시간’을 보며 인생의 허무에 쓸쓸하기도 했다.
지금 수영강변 센텀시티에는 오는 가을에 개관할 제 16회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 ‘두레라움’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수영강과 바다가 만나고, 청둥오리, 할미새 등 고운 철새들과 숭어들이 펄펄 뛰며 묘기를 부리는 호젓한 강변에서 벌어질 영화 축제가 기대된다.
‘어떤 이는 영화를 인생의 한 조각이라 하지만 내 영화는 케이크의 한 조각이다.’ 히치콕 감독의 말이다. 가끔은 짜고 맵고 얼큰한 우리네 일상을 뒤로하고 달콤하고 부드럽고 향기 있는 맛을 찾아 시네마로 간다. 천재 예인들이 차려내는 예술의 성찬은 나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즐길 수 있어 좋다.
영화를 보며 세상과 소통하고, 흘러간 어제와 내가 없는 지구의 미래를 본다. 생경한 문화와 풍경에 감동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아옹다옹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우면 나는 시네마테크로 간다.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