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격
조순영
어머니가 기분이 언짢으신 채 절(寺)로 떠나셨다. 그 분은 어딘가로 가기로 마음을 정하면 마음이 바빠져 집안 단속을 하다 힘이 부치면 역정을 내고는 휑하니 떠나버리신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곳이 없는 나로선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남은 사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곳이 있는 어머니가 부럽기도 하다. 아래 위로 신경 써야할 일이 많은 나의 처지로는 꿈밖의 일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해야 할일이 많은 내가 인생의 절정을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한 때 나와 어머니는 큰 손자와 세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아들네 집에 도움이 될까 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다. 운동이 됐는지 어머니는 대퇴부 고관절 수술로 불편한 다리도 많이 나아지고 건강도 좋아졌다. 지방에 살던 아들네가 네 자녀를 데리고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올 때까지만 해도 아들네와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의 언덕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행여나 돈독한 고부 사이가 어려운 관계로 변할까봐 내심 두렵기도 했는데 손부의 따뜻한 보살핌과 아이들과 노는 재미로 어머니가 몰라보게 좋아지셨으니 우리에겐 일석이조의 기쁨이 찾아왔다. 아기들에게 둘러싸인 어머니와 나는 짝짝궁과 곤지곤지로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몰랐다.
그즈음 로마에서 신부님 서품을 받고 휴가차 나온 며느리의 오빠가, 여동생 네 집에 와있겠다고 했다. 그들 오누이 정이 애틋한 것을 아는 나는 배려차원에서 어머니보고 잠시 그 집에 다니는 일을 좀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섭섭했는지 “젊은이만 사람이지 늙은이가 사람이냐.”며 내 맘에 돌풍을 일으키고 집을 떠나셨다.
그 무렵. 며느리가 나보고도 오지 말라고 했다. 몇 번인가 내가 가면 어미가 저희들을 두고 나가는 것을 알게 된 손자들이 더욱 제 어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꺼번에 울어대니 힘이 들었나보다. 나는 나대로 혼자 서서 찬밥 먹는 것도 불사하며 퇴근하는 남편을 채근해 저녁을 차려주고 저희 집 다니느라 시간에 쫓겨왔는데 이해는 하면서도 서운했다. 내가 해 온 일들을 돌이켜 보니 입이 짧은 며느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가져다 주는 반찬은 또 얼마나 버거웠을까는 나 역시 같은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가슴은 아팠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마음을 달래며 지냈다.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점도 그렇고, 사정이 있을 때 일일이 며느리에게 알리지 않아도 되는 점이 편하기도 했다. 열흘이 지나자 아들에게서 왜 요즘 엄마가 오시지 않느냐고 전화가 왔다.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엄마를 얼마나 고마워하는데 그러시냐면서 오시고 싶은 때 언제라도 오시라.”라는 아들 말을 들으니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내가 그토록 말려도 입맛에 맞는 식사대접과 살갑게 대해주는 손주며느리가 좋아서인지 아침밥 먹기가 무섭게 아들네 집에 가시는 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나는 목이 잠겨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힘들면 목소리가 우선 반응을 보인다. 목소리가 가라앉고 탁해지면 나를 아는 친구들은 어디 아프냐고 묻듯이 세심한 며느리 역시 그랬다. 시간이 지나자 며느리도 맘이 불편했는지 전화를 걸어와서 “아무래도 어머니가 편찮으신 게 제 탓인 것 같아 죄송하다고, 제가 너무 어리석어서 잘해 주시는 어머니 귀한 줄을 몰랐다고, 어머니께 한약 한제 지어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 편하게 지내시라는 뜻도 포함되었다.”고 말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퇴근한 후 가는 나도 때로 불편할 때도 있었겠지만 아침부터 젊은 사람 일에 일일이 참견하시는 시외할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기도 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싫어했을 일은 안 봐도 본 듯하다.
그 후로는 어머니는 내가 가자고 하기 전엔 아들네 집에 가시지 않으니 다행이다. 어머니가 애당초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처를 나누고 나서야 고친 일이 안타깝다. 나는 며느리에게 “네가 걸어준 전화 한통화가 보약보다 낫다.”고 말했다.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으면 아쉬움이 남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후회만 남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을 몸으로 겪어낸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닐까. 더불어 사는 데 인내와 배려만큼 좋은 보약이 어디 있으랴. 한바탕 아픔을 겪은 우리 가정은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왔다. 내가 동행하지 않는 한 어머니는 손주네 집에 가시지 않을뿐더러 나도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며느리 또한 부모 그늘이 얼마나 든든한가를 단단히 느꼈으리라. 사람이 노쇠하면 자식의 말도 들어야한다는 것도 어머니는 체험으로 깊이 느끼셨는지 얼마 전까지도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시더니, 이젠 귀찮아서도 집에 가야겠다고 스스로 전화를 하셨다. 내가 언제 집에 오시냐고 목맬 때는 왜 자꾸 귀찮게 하느냐고 큰 소리 치시더니, 이제는 집으로 오시겠단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당신 뜻대로만 살아오신 어머니도 어쩔 수 없나보다. 이제야 먼 길 돌아서 제자리로 온 걸까? 어떠한 인간관계도 사람사이엔 일정한 간격이 있어야 무리 없이 평화롭게 유지 된다는 것을 그때는 우리가 왜 몰랐을까. 오늘도 아들네 집에 갔더니 “얘들아 할머니 오신다.”는 며느리의 경쾌한 목소리가 해맑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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