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동창생 / 김현자
내 여고시절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40년대 초반이었다. 꿈 많은 문학소녀가 미래를 꿈꾸기에는 너무도 암담한 시국이었다. 이리여고는 일인을 위해 세워진 여학교였지만 약간의 한인학생만을 받아드렸다. 우리는 1945년 봄 황망한 가운데 졸업식을 마치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갑자기 해방을 맞았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뭔가 새 천지가 열리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고 희망이 솟아올랐다. 일본, 일본말, 일본인 친구는 서서히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갔다. 그 후 지금까지 55년 간 나는 함께 공부하던 일본인동창들을 잊고 지냈다. 일본에 여행을 갈 일이 있어도 일본인동창을 찾아본다는 생각은 전혀 내 머리 속에 없었다.
그런데 두어 달 전, 한국인 여고 선배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내 마음을 적지 아니 흔들어 놓았다. 선배는 일본에 사는 이리여고 동창들이 곧 대거 서울을 찾아올 것이며 그 때 한. 일 동창들의 간담회가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당부였다. “동생 동기생들도 여덟 명이나 오니까 꼭 나와야 돼. 그 사람들 꼭 현자를 만나기를 원하니까.” 선배의 이 마지막 말이 내 귀에 와서 박혔다. 내 동기생이라, 그들이 누구였지? 한 두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가물가물하게 떠올랐지만 곧 사라져버린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희미하게나마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떠오르고 대학동창들도 마찬가지인데 여고의 일본인 동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돌아가던 필름이 중간에 탁 끊긴 것처럼.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유일한 한국동기생, 의사출신인 순자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동창 간담회에 나갈 것을 약속했다. 하여간 만나보는 것이다.
다음날 저녁, 일본인 동창생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L호텔로 향하는 나의 기분은 묘했다. 우선 두 가지 염려가 앞섰다. 과연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것과 내가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어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호텔 2층 행사장에 들어서자 주름진 얼굴의 여성 4, 5명이 나에게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오하라상, 맞지?" "나는 다가하시야, 기억나지? 여기는 후꾸사까라고, " "오하라상 소식은 일본에서도 들었어. 아나따, 에라꾸 났다소데스네(당신, 성공했다며?)" "늙지도 않았구나." 이구동성으로 쏟아내는 말에 나는 얼떨떨하며 "그렇지 않아.“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오하라상',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일제 말기 우리는 모두 그렇게 일본이름 쓰기를 강요당했었다. 그러나 55년 만에 들어보는 그 이름이 이렇게 생소하게 들릴 줄이야! 그들 역시 결혼하면서 남편 성으로 바뀌어 이름 밑에 구명(舊名)을 적은 명패를 달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우리 동기생을 포함한 95명의 동창과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수행한 그들의 가족, 그리고 수 십 명의 한국인 동창생 등 약 200명이 자리를 그득 메우고 있었다.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여고 동창으로서의 끈끈한 정을 서로 확인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장내는 흥분과 열기로 뜨거웠다.
우리 테이블은 모두 10명의 동기들이 둘러앉았다. 반백의 머리에 주글주글한 얼굴들, 이들이 10대 소녀시절 같이 뛰놀고 공부하던 학우들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낯익은 얼굴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를 이렇게 잘 기억하는데.. 나는 순간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것은 내 기억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그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며 살았다. 거의 완전히. 그러면서 그렇게 잘 하던 일본어도 깡그리 잊어버렸다. 나는 억지로 일본말 단어를 기억해내며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입안에서만 맴돌고 잘 나오지 않았다. 공식행사가 모두 끝나고 자리를 뜨려고 일어섰을 때 동기생 하나가 자기 방에 올라가 더 이야기하고 가자하며 소매를 끌었다.
10층 좁은 침실에 옹기종기 둘러앉으니 우리는 어느새 10대의 소녀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떠들고, 웃고, 장난치고.. 그 중 한사람이 빗 바랜 흑백사진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얌전히 자리잡고 있고, 그 가운데 안경을 끼고 무뚜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내가 보였다. 우리는 서로 사진 속의 자신을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그래, 이 아이들이 바로 내 여고 동창생이야. 이런 생각이 불 현 듯 나면서 내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함께 공부하고, 노래를 부르고, 운동회를 하고, 근로봉사에 동원되어 모내기하고, 그 때 다리에 달라붙는 거머리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우리는 이 모든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누군가가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는 가을이면 교정의 화단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는데 지금도 있을까?” “아니 지금은 없어졌어.” 나는 자연스럽게 일본말로 대답하고 나서 스스로 놀랬다.
그들은 일본에서 1년에 한번 전국에 흩어진 동창들이 만난다고 했다. “우린 종전 후 일본에 돌아가 모두 평범하게 살았어.” “한국은 우리의 고향이야.” 이 말에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누군가가 가방 속을 뒤지더니 얌전히 포장한 작은 과자 상자를 꺼내서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자 너도나도 뭔가를 꺼내어 우리 앞으로 내밀었다. 손수건 한 장, 손수 만들었다는 휴대용 클리넥스 케이스, 부드러운 목욕용 타올, 영양크림 등,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정성을 담은 일본인다운 선물들. 아, 이 아이들은 한국과 모교를 그리워하고 있구나.
밤 10시 가까이 되어 순자와 나는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나오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손을 흔드는 주름진 얼굴들이 갑자기 어리고 순진한 10대 소녀의 얼굴과 겹쳐졌다. 아, 다시 찾은 내 동기생들이어, 잘 가거라, 그리고 또 만나자! 나는 이 말을 되뇌며 뭔가 충만 된 마음이 되어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20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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