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김현자
우연히 서가의 책들을 훑어보다가 [명상의 여자]라는 제목에 눈이 머물렀다. [이화 7인 에세이]라는 부제가 내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나는 얼른 책을 뽑아 책장을 넘겨보았다. 우중충한 표지와 노랗게 변색이 된 조악한 종이,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종서(縱書)가 이 책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출판연도를 보니 1978년. 29년 전에 나온 책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이 책을 받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동안 이 책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지금처럼 수필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들 결코 내 시선을 끌지 못했을 초라한 모습의 책, 나는 보물을 찾은 듯 기뻤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당시 선배들이 가졌던 꿈과 명상의 세계를 조심스럽게 더듬어보았다.
7인의 명상의 여자들은 잘 알려진 이화출신의 문재(文才)들이다. 우리나라 건국당시 유엔에서 많은 활약을 했고 주옥같은 작품을 다수 남긴 시인 모윤숙, 이대교수와 동구여상교장을 지낸 지성이 번득이는 김정옥, 이대 영문학과 교수로 셰익스피어 연구와 영어연극 지도로 유명한 김갑순, 수필가로 필명을 날렸던 전숙희와 조경희, 그리고 숙명여고 교장을 지낸 정충량과 이대 도서관장을 지낸 이봉순 등이 그들이다. 이 중 다선분이 타계했고 두 분은 노환 중에 계시다.
이 책을 쓸 때 그들의 나이는 60세 전후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전문학교시절 문과의 동창인 이들이 우연히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하다가 기숙사 추억으로부터 사회생활까지 달고 쓴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공동수필집을 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수필 중 하나는 반듯이 ‘더 늦기 전에’라는 제목으로 글 한편을 쓰기로 약속했다.
그들의 글은 꿈 많던 소녀시절을 암울한 일제시대에서 보낸 회고에서부터 시작된다. 매서운 감시의 눈초리 속에서도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청춘의 열정은 글 곳곳에 스며있다. 모윤숙이 전문학교시절 몰래 썼다는 [조국 노래]라는 시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노래도 말도 없습니다./ 숨어 우는 땅이여!/ 이 뛰는 맥박과/ 달려가는 그리움은 어찌합니까?/ 한번 불러본 조국/ 한 번 노래한 내 나라/ 검은 흙 속에 몰아넣고/ 숨마저 못 쉬게 짓밟히는 탄식, 노래, 눈물,/ 저 하늘 별들에게 맡깁니다./ 저 젊은 학생들의 고독/ 조국노래 즐거운 멜로디야!/ 언제 다시 너를 만나랴! 노래여! 자유여! 강물이여!/ 아, 깨어진 꿈이어! 생명이여!’
‘더 늦기 전에’에서 이들은 하나같이 화살처럼 지난 빠른 시간과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아쉬워했다. 문득 깨달은 늙음에 대한 자각이 그들을 한없이 슬프고 외롭게 만들었다.
‘길이나 교회당 같은데서 얼굴에 주름살이 진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그들은 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늙은이 나라의 사람들로만 생각되었다. 그들의 지팡이나 굽어진 허리를 볼 때엔 측은하고 가엾게 생각은 하면서도 언제 나 자신도 그처럼 늙은 인생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음은 이토록 푸르른데, 생각도 젊은 날 그대로인데, 어쩌자고 어디를 가나 모두들 할머니라고 서슴없이 불러주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놀라고 싫어지도록 주름투성이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지나 이미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한 이들이지만 내가 그 동안 해 놓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자책의 소리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의욕은 숨기지 않는다. 연극이 전문인 김선생은 생전에 멋지고 웅장한 연출로 이상적인 무대를 창조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수필가 한 분은 언덕 위에 하얀 양옥집을 짓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장작불 쬐며 사랑과 평화 속에 잠겨보고 싶다는 소녀 적인 꿈을 내비친다. 평소 감정표출이 많은 또 한 분은 왜 아직도 인간을 늙지 않게 하는 약이나 식품은 안 만들어 내나하고 투정을 하듯 말하다가도 늙어 죽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라 죽는 날 죽더라도 최소한 50대의 외형과 결음걸이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유난이 꿈과 의욕이 많았던 그분은 말년에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을 하다가 수년전 작고하셨다.
나도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이 나이에 ‘더 늦기 전에’를 읊조리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기 전에’라고 하면 몰라도. 마음이 짠해진다.
가기 전에 보고 싶은 것은 많다. 가능하다면 나라의 통일도 보고 싶고, 우리나라가 서로 싸우지만 말고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가 되는 것도 보고 싶고, 손자, 손녀들이 인재로 쑥쑥 커가는 것도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손자 며느리까지도 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불로장생의 약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는 과(過)장수는 좋지 않고 명만큼 살다가 깨끗이 고종명(考終命)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할 일이 있다면 더욱 감사하고 더욱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아, 감사하고 사랑할 일은 너무 많은데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김현자(金賢子) 수필가
직업 : 전 국회의원, 사회기관단체인
출생 : 1928년
경력
1999뇬 한국여성재단 부이사장
대한YWCA연합회 공보출판위원,사회문제위위원 (1998년)
한국여성정치연맹 총재 (1997년)
한국여성정보원 이사장 (1996년)
한국여성개발원 이사장 (1995년)
YWCA 세계대회 준비위원장 (1994년)
한국여성정치연맹 부총재 (1991년)
인간교육학회 이사 (1988년)
민정당 국책평가위원 (1985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1985년)
민정당 중앙위 부의장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민정,전국) (1985년)
국무총리실 여성정책심위원 (1983년)
아시아여성의원세미나 준비위원장 및 의장 (1982년)
대한YWCA연합회 공보출판위원,사회문제위위원 (1981년)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정,전국) (1981년)
민정당 15인창당준비위원회 위원 (1980년)
세계YWCA 실행위원 (1971년)
대한YWCA연합회 부회장 (1970년)
전문직업여성클럽 회장 (1969년)
대한YWCA연합회 실행위원 (1963년)
대한YWCA연합회 이사 (1963년)
이화여대,숭실대 강사 (1954년)
수상경력
삼성생명공익재단 비추미 여성대상 해리상 (2003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제1회 김활란 여성지도자상 (1999년)
소롭티미스트한국협회 여성지위향상상 (1998년)
정무제2장관실 주최 제1회 여성주간기념전국대회 대통령표창 (1996년)
저서 『풍요한 삶』(’79. YWCA출판부). 『열린 세계를 향하여』(’87. 동화출판부). 『아름다운 만남, 자전적 에세이』(’98. 푸른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2007년세손출판사).
출처:http://people.nate.com/people/info/ki/mh/kimhyeonj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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