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륜정기(四輪亭記)
이진영
일찍이 이런 집을 지어 살고 싶었다. 네모반듯한 집을 짓되 한가운데 거실을 두고, 사방 벽면에 창을 만들면 어떨까. 동쪽 창에서는 어둠을 가르고 신선한 아침의 빛이 들어서고, 남향의 창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햇볕을 집 안 깊숙이 끌어들이니 좋고, 서향의 창은 연지 빛으로 물든 저녁하늘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천장에도 지붕 대신 큰 창을 달아서 눈이 오는 날 누워서 하늘을 보면 눈 속에 파묻힌 듯 참 좋겠다. 비가 내리면 빗줄기가 온몸에 젖어드는 듯이 분위기가 있으렸만... 물론 아쉽게도 이제껏 그런 기발하고 운치 있는 집을 짓고 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위 관리 층의 비리를 들추어낼 때 으례껏 부동산 투기 운운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집이야말로 움직이지 않는 재산으로 부의 축적에 확실한 한 몫을 하는 것이다. 나는 집에 대해서 큰 욕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왔다. 물론 어찌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욕심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만은, 이미 오래 전에 좋은 집보다 더한 건강을 잃어버려 본 사람이기에 그런 저런 욕심보다는 몸과 마음이 건강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希望)만을 빈 가슴에 대신 채워 넣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비바람을 막아주고 햇빛을 가려주는 누옥(陋屋)이나마 거처할 곳을 지니고 있으니 이 아니 좋을 건가. 이에 한 수 더 떠서 다정한 벗을 불러 주거니 받거니 한 잔 술을 기울이고 세상을 논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언가.
그런 내가 얼마 전에 욕심을 내어서 운치 있는 정자(亭子)를 하나 지니게 되었다. 웬 정자냐고 하시겠지만, 웬만큼 여유 있는 분들이라면 경치가 좋은 곳에 별장을 지니고 있지 않는가 하여, 나도 어렵사리 정자를 한 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작년이었다. 평소 꿈대로 정자를 지을 터를 물색했었다. 모든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불편함이 없는 위치, 이는 어린 시절부터 다소 배타적(排他的)이라는 성격 탓에 좀 더 많은 분들과 교류를 할 수 있기를 원함이었다. 그러다가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여서 고심하던 중에 이규보 선생의 '사륜정기'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며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게 되므로 그 때마다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그래서 바퀴가 달린 정자를 만들어 필요한 도구를 실은 채 쉽게 옮겨 다닐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였다. 바퀴가 달린 정자라... 나도 그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여, 사방을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웹(web site)이라는 사이버 공간 안에 터를 잡고 마련하는 홈페이지였다. 간단한 손놀림 하나면 가까운 곳이나, 바다를 건너 이국 땅에서나 객이 드나들기에 불편함이 없는 곳이니 바퀴가 무색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을 짓는 것이 어디인들 쉬울까, 도메인이라고 하는 이른바 주소를 등록하고, 지을 터를 마련했다(계정) 드디어 서툰 목수가 되어 정자를 완성하던 날, 난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듯한 흡족함으로 몸둘 바를 몰랐었다. 일찍이 내가 꿈꾸었던 대로 사방으로 지나는 바람과 객이 들어서기에 막힘이 없다. 그리고 산 좋고 물 좋으니 어찌 풍류를 마다하랴, 그래서 거문고를 타는 사람, 소리를 하는 사람, 시에 능한 사람, 바둑을 두는 사람, 주인까지 여섯이라는 '사륜정기'의 인용처럼 풍류를 사랑하는 객들을 초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오시는 분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시 한 편에 흥겨운 가락까지 들고 오시니 가는 세월도 잊고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사륜정기'에서는 바퀴를 4개로 하는 것은 사계절을 뜻하는 것이요 라고 했다는데, 나의 정자에는 객들이 바람결에 이른 계절의 변화를 싣고 오신다. 아직 눈 덮힌 하얀 산이 채 녹아 내리지 않았는데, 객은 꽃향기 스며들어 있는 봄바람을 싣고 온다. 봄의 꽃들이 채 떠나지 못한 채 미적거리고 있을 무렵이면 객은 서둘러 푸르른 여름을 불러들인다. 뜨거운 열기의 햇살이 정자 그늘 밖에 이글거릴 때, 객은 가을의 낙엽을 읊어주고, 다시 그 마른 가지에 설화를 피우게 한다.
사 계절이 머물렀다가 다시 가버리는 정자(亭子) 안에서 객들은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탄다. 펼쳐진 정한 화선지에 난(蘭)을 치는 선비가 있는가하면, 흐트러진 몸짓으로 어깨춤을 추기도 한다. 주인은 덩달아서 절로 흥에 겨워 서툰 시를 읊조리고 어깨춤을 따라한다.
나의 정자는 오늘도 글을 사랑하고 풍류를 사랑하는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태여 바퀴를 달지는 않았으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대구, 대전, 창원... .뿐인가. 저 멀리 미국이나 일본,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올 수 있으니 바퀴가 달려 있다한들 이보다 더 넓은 세상을 다닐 수는 없으리라. 또한 객들을 직접 볼 수 없으니 그들의 지위 높고 낮음과 빈부의 차이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들과 자연을 읊고 바른 세상을 논하고 글과 음률을 벗삼아 보여지는 현실에서 잠시 이탈(離脫)하여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마음의 여유로움을 줄기는 것이다.
고려 때 정자의 기능은 그저 생활의 여유를 즐기는 퇴폐성보다는 식자와 지도자의 깊은 학문을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수준 높은 상류층 지식인의 멋과 생활 철학을 충족시켜 준 건축물이자 공간이었다. 또한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라고 했으나 생활이 항상 한가하다는 뜻은 아니다. 소위 고급 관리로서 국가의 녹을 받는 처지에 날마다 그렇게 한가롭게만 지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한가로이 지내게 된 여가를 말함일 것이다. 나 또한 이공간을 문학을 깊이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과 아름다운 만남의 공간으로 가꾸어 가고 싶은 바람을 갖는다,
지금, 정자에 누워 보이지 않는 객이 가져다 준 시 한 수 읊조리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 흡사 별을 덮고 누워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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