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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
김 선 화
건강이 안 좋아 대전에서 얼마간 요양하게 되었다. 그런데 옛 추억이 깃 든 서대전 쪽으로 발길이 닿았다. 요즘에야 굳이 서대전 동대전을 구분 지을 필요가 없으나, 전에는 '서대전'하면 나지막한 판자집이 빼곡해서 시골스러움이 배어있는 곳이었다.
유천동과 도마동을 이어주는 유천교를 사이에 두고, 몇 개의 피혁회사와 섬유회사가 있었다. 그곳에 여러 지방의 여공들이 모여들었다. 어쩌다 휴일이면 호남지방으로 닿는 좁다란 국도 정류장에는, 드물게 오는 신도안 행이나 부여·논산·강경 행 버스를 기다리는 처녀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도로변에는 예외 없이 의상실과 사진관이 촘촘히 자리잡고 있어, 한창 멋 낼 나이인 그들의 주머니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렇던 곳이 변해서 훤히 뚫린 도마 네거리와 계룡로가 뻗은 그 곳은, 서울의 광화문거리를 방불케 하고 있다. 군데군데 학교 건물과 교육청 깃발만이 보여, 여기가 지난날의 그 곳임을 말해줄 뿐, 10수년사이에 낯선 도시가 되었다. 오래 전에 내가 잠시 머물렀던 섬유회사는 인력난 탓인지 오간 데가 없고, 그 터만이 하늘까지 닿을 아파트덩이로 변해 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게 충남 고등학교의 전나무 울타리이다. 눈발이 날리는 추위에도 전통을 자랑하고 곧게 서서 '내 다 알고 있다'고 손을 흔드는 듯하다. 나는 반가움보다 다져 묻어둔 기억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고 엄습해왔다.
시골 농가에서는, 특별한 수도 없으면서 딸자식을 객지에 내놓길 꺼려하는 고집이 있었다. 그러한 부모님을 설득해 내가 발 들여놓았던 곳이,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섬유회사였다. 고희를 넘긴 노인이 유년시절을 엊그제 일만 같다고 회고하듯, 나 역시 그 때 몸담았던 일들이 엊그제 일만 같다.
기숙사 314호실. 그 곳에는 경상도, 강원도 등의 말씨들이 섞여 있었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그들과 쉽게 어울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가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질감 따위는 느낄 필요가 없었다. 유난스레 눈이 검고 겁이 많던 친구는,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오빠를 위해, 야식거리를 사들고 밤길을 다녀오곤 하였다. 그 후 그 오빠가 선망의 대상인 대학에 입학해 무한히 기쁘다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근무시간을 줄이고 야학에 다니며 코피를 쏟아대는 소녀도 있었다.
꽃샘바람이 불던 봄날이었다. 나는 읽고 싶었던 책을 몇 권 사들었다. 그리고 친구 몇몇과 푸른 전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었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자신들의 처지에 비애를 느낀 하루였다.
늘어진 나뭇가지에 반쯤 가리워진 얼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때의 그 사진이 그것을 말해준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지만 우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지금 그 사진을 들여다보니, 가슴속 비밀을 들킨 것만 같다. 어쩌자고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교정에서 사진을 찍었던가.
잘 차려입은 숙녀처럼, 빌딩들이 그 옛날 터에 미끈하게 서 있다. 그 전 날 소녀들의 애환을 모른다는 듯하다. 아련한 추억의 거리에서 나는, 물정을 모르는 소녀들과 맞닥뜨리는 것이 내키지 않아 서둘러 차에 올랐다.
때마침 내리는 함박눈이 시야를 덮는다. 생활 하수로 얼룩진 유등천에 세월의 무게가 눈발이 되어 흩날린다. 안으로만 삭이던 계룡로 복판에서, 텅 빈 듯한 가슴으로 흘러간 시간을 회상한다. (9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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