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김부순
삶에서 느껴지는 감사한 순간들이 있다. 겉으로 볼 땐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으나 보내는 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가슴이 시릴 만큼 아프고 고마운데, 그걸 어리석게도 그냥 지나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난 후, 기회가 되면 말해야지 하고 있다가 때론 그 기회를 영영 놓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내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어리석고 못됐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첩첩산중 산골마을이다. 내 기억으로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즈음하여 버스를 처음 타 보았던 것 같다. 마을로 들어서는 연둣빛 커다란 버스를 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던 기억이 난다.
“우와! 깨벌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너무도 우습다. 어떻게 커다란 버스를 보면서 깨벌레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따라서 참깨 밭에 갔다가 엄청나게 큰 애벌레를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연둣빛 커다란 버스를 보는 순간 참깨 밭에서의 경험이 버스와 하나 되어 그런 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그런 산골마을에서 자란 덕분에 나의 경험들은 대부분이 자연과 뗄 레야 뗄 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즐거웠던 일은 나물 캐는 일이었다.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초봄이지만 남쪽 마을에서는 봄을 알리는 나물들이 땅을 뚫고 머리를 내민다. 납작 엎드린 냉이랑 뾰족뾰족한 달래, 그리고 오종종종 탐스럽게 올라오는 돌나물들. 지금도 그 때의 풍경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물을 캐서 바구니에 채워지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친구들과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들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특별한 놀 거리가 없는 산골에서 친구들과의 속삭임처럼 즐거웠던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 때의 그 즐거움이 가끔은 나물을 캐고 싶다는 간절함을 느끼게 한다.
내 고향은 남쪽이지만 시댁은 그보다 더 아랫녘 남도마을이다. 그래서인지 겨울철에도 그곳은 푸릇푸릇 냉이가 돋아나 있다. 설날이면 매번 어머님이 계시는 그 곳에 가게 된다. 그곳에 가서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찬바람을 맞으면서 냉이를 캐보고 싶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런 나를 보시고 어머님께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눈치셨다. 먹을 것도 많은데 뭘 그런 걸 캐려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그러한 어머님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냉이도 캐고 싶고, 파릇파릇 돋아난 시금치도 캐고 싶어 어머님을 졸라댄다. 막내며느리의 애교에 넘어가신 어머님은 앞장서서 밭으로 향하신다. 그런 어머님의 뒤를 기분이 좋아 꼬리를 흔들어대는 강아지마냥 졸래졸래 따라나선다. 시댁에서 맛보는 가장 즐거운 순간이다. 냉이를 먹겠다는 것보다 추억을 먹는다는 느낌이랄까.
살다보면 의도치 않게 관계가 멀어지는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냥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을 가졌으면 좋으련만 시시콜콜 따지려 들 때가 있다. 그것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임을 깨닫게 되지만 본성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문제를 걸 고 넘어지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대로 문제 삼지 않으려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얘기다.
언젠가부터 시어머님이 계시는 곳에 가지 않았다. 처음엔 일을 하느라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다가 아들이 고등학생이라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몸은 집에 있어서 편했지만 마음은 너무도 불편했다. 그래서 그 불편한 마음을 덜어내고자 밤새워 전을 부치고, 고기를 재어 남편에게 들려 보냈다. 어쩐 일인지 남편은 안 가겠다는 나를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님한테 다녀오면 어머님께서 얼마나 늙으셨는지 그것을 나에게 알렸다.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죄송스러웠고, 한편으론 마음이 아팠다.
그런 죄송스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제철 과일이나 어머님께서 좋아하시는 전복, 홍어 등을 시시때때로 보내드렸다. 또 우리가족이 뭔가를 먹었는데 맛이 있으면 그것 역시 택배로 보내드렸다. 굳이 내가 찾아뵙지 않아도 택배를 통해서 얼마든지 생색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가끔은 어머님께서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 몫까지 보내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난 내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 20주년 기념일에는 보석을 사주겠다는 남편을 따라나서서 어머님께 인심을 쓰기도 했다. 난 언제든지 받을 수 있으니 날 사주었다고 생각하고 어머님께 루비목걸이를 선물해드리자고 남편을 설득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효는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남편과 아들만 보냈다. 그리고 그 알량한 택배랑 선물들로 불편해진 그 마음들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불편함은 더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해 설 연휴에도 밤새워 전을 부치고 고기를 재어 남편과 아들만 어머님께 다녀오라고 했다. 명절을 지내고 돌아온 남편은 보따리 보따리 먹을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직접 농사지은 걸로 짜신 참기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명절음식과 반찬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겨울 냉이였다.
엄동설한에 불편하신 몸으로 쪼그리고 앉아 냉이를 캐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찾아오지도 않는 며느리가 뭐가 예쁘다고 그 많은 냉이를 캐셨을까. 그 추운 겨울에 냉이를 캐시면서 무슨 생각들이 오고갔을까. 밤새워 그 많은 냉이를 하나하나 다듬었다. 한겨울 냉이의 향 내음이 온 몸을 파고들었다. 팔순이 넘은 시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무엇이 내 입을 다물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있는데도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런 내가 싫어졌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어머님께서 많이 아주 많이 편찮으시다고 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남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바짝 여위신 몸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인사를 드렸더니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어머님의 눈동자가 동그래지셨다. 순간 아들 녀석이 나무라듯 한마디 던진다.
“엄마, 할머니 눈동자 보셨죠? 동그래진 할머니 눈 보셨죠?”
나를 혼내기라도 하는듯한 아들 녀석의 말투에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주방으로 들어가서 부랴부랴 청소를 하고 전복죽을 준비했다. 어머님께서는 안 드시겠다면서 약 드시게 라면이나 끓여달라고 하신다.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한 후 정성을 다해 전복죽을 끓이는데 어머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어머님께서는 기분이 좋아 하시는 말씀이지만 난 부끄러워서 어디든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 드시겠다던 전복죽을 드렸더니 조금만 달라고 하신다. 드시고 남기시면 되니까 천천히 드시라고 했더니 제법 많은 양을 다 드셨다. 그리고 최근에 드신 음식 중에 최고로 맛있었다고 하시면서 흐뭇해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식사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님께서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거부하셨던 것이다. 한 번이라도 더 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찾아뵈었다. 그 때 누워계신 어머님과 단둘이만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눈물이 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누워계시는 어머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2~30분이 흘렀을까. 가족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얼른 어머님의 손을 놓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엄마, 왜 울어? 누가 우리 엄마를 울렸어?”
아주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런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어머님도 함께 우셨던 것이다. 그렇게 어머님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님을 보내드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불효자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입관할 때 보았던 어머님 모습은 편안해 보였지만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효를 다했다면 아쉬울 게 없었을 텐데 온갖 것들이 다 아쉬움으로 남아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김부순 약력]
1969년 전북 정읍 출생
성호백일장 산문부문 장원수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우리독서토론논술지도교사
에세이 아카데미아 부회장
E-Mail dotori6912@hanmail.net
[당선소감]
시어머님 별세하신 지 1년이 좀 넘었습니다. 생전에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세대가 달라서 정서적으로 많은 차이가 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가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 ‘어머님께서도 그러셨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순간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소통하는 법이 서툴다보니 서로 오해하게 되고, 그런 일들이 쌓여서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을 정결하게 씻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프고 쓰라렸던 상처들을...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나와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 동시에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되고, 더불어 서운했던 감정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결국은 글을 통해서 화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과 생각들을 통해 나 자신을 깨우치고, 타인과 깊이 있게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항상 글을 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신 도월화 선생님,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정목일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갱년기/김부순
흔히 갱년기는 시간적으로 여유롭고, 신경쓸만한 일들이 없는 상당히 편안한 상태의 중년 여인들이 겪는 일쯤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쁜데 갱년기 타령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말들을 많이 한다. 나 역시 지인들로부터 갱년기와는 거리가 먼 중년 여인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십여 년쯤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나이 사십이였으니 새파랗게 젊었던 그 시절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바쁜 것은 타고났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바쁘기는 매 한가지다.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배우는 일이나 괜찮은 강의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만들어서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으니 이 몸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이 키우랴, 남편 뒷바라지 하랴, 그리고 내 일하랴 몸이 몇 개여도 모자랄 만큼 바쁘게 살다보니 구순포진을 항상 갖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젊다는 호기를 부리면서 약 한 번 지어먹지 않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바쁜 가운데 의료생협에서 주최하는 갱년기 강의가 있었다. 홍조, 얼굴 화끈거림, 목, 등짝 같은 곳에서 기분 나쁜 뜨거운 기운을 느끼는 현상 등이 가장 대표적인 갱년기 여성의 증상이라고 했다. 성숙한 여인이 노년기로 들어서는 가운데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분비가 줄어드는 게 원인이란다. 갱년기와는 거리가 먼 나이였지만 그래도 갱년기를 제대로 알고 맞이해야 나중에 나이 들어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수강신청을 해서 몇몇 지인들과 함께 들었는데, 강의는 이론일 뿐이었다. 다만 강의를 들었으니 적어도 갱년기를 알고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알고 지내는 지인들은 나와 열 살 이상 나이차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 함께 했던 분들 중에는 이미 갱년기가 시작된 분들이 몇 분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갱년기라고 하면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시어머님과 남편 험담으로 이어지면서 그것을 B형 혈액형과 연결시켜 B형 혈액형을 가진 나까지 묶음으로 몰아세운다. 시어머님과 남편이 B형이라는 이유로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참으로 억울했다. 그런데 한 마디도 못하고 그 지인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던 것 같다. 지인의 말을 듣다보면 참으로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B형인 나를 겨냥하는 걸 문제 삼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내 맘이 너무 여렸던 젊은 시절이었다.
그 지인이 이사를 해서 연락을 안 하고 지낸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면 귀가 아플 정도의 큰 목소리, 그리고 입에서 쏟아지는 불평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참으로 우습게도 딸아이와 늦둥이 아들자랑을 할 때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 싫어하는 대상은 목이 아플 정도의 큰 목소리로 험담을 해대고,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끝없이 너그러워지는 태도들이 뭔가 아이러니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기준과 잣대는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선을 긋는다. 본인이 옳다면 누구나 옳아야 하고, 나쁘다고 하면 모두가 나쁜 것이다. 그 지인과의 대화에서는 그것이 답이었다. 그것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지라도 그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갱년기라는 말이 나오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 지인을 떠올리는 가 보다.
사십 중반부터 죽음을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내가 죽어서 이 세상을 하직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나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겨진 가족들 귀에 모진 말들이 들어가면 어떡하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잘 살아야겠다는 과거의 생각들이 이젠 잘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하고 싶은 말들을 많이 참으려고 노력한다. 더불어 좋은 말들은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들이 어떤 의도인지가 내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안 보고 싶은데 보이는 것들 때문에 괴로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알면서 모른 척 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뻔히 알고 있는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인정하면 좋은 관계가 유지될 텐데 그런 약삭빠른 태도를 보면 참으로 관계유지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모른 척 지나치는 아량도 있어야할 나이이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마음은 이미 멀리 떠나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남들은 세상살이를 참으로 잘한다는 생각에 부러울 때가 많다. 그 어떤 것들도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그럴 때 난 그 사람들이 인생을 잘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정한 프로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성격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남들은 저리도 잘하는 것들을 왜 나는 아직도 서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가끔은 내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지면서 우울감이 동반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신체적인 이상 징후들이 발견된다.
나도 모르게 실언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이 먼저 튀어나온 후 수습이 잘 안 되어 당황하게 되면 등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온다. 부끄러움이 그런 신체적인 증상을 만들어내는 경우다. 그냥 더운 정도가 아니라 등짝에 뜨거운 열판을 깔아놓은 것처럼 몹시 기분 나쁜 기운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쉽게 용서해주고, 그럴 수도 있다면서 이해해주는 척이라도 해주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용서를 구했는데도 그럴 땐 대략난감이다.
또 다른 예로는 본인이 잘못하고서 끝까지 남의 탓을 하면서 비난하는 경우다. 최근에 겪은 일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분도 갱년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비논리적인 말들로 자신의 잘못은 없고 상대방을 비난하는데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끝까지 대응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쿵쿵쿵쿵’ 절굿공이가 절구질을 하는 느낌처럼 내 심장소리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멈추려고 해도 내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고, 내 몸은 나와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들 녀석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엄마, 요즘 들어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내는 거야? 화 좀 내지 마!”
그러면서 웃는다. 오늘은 별것도 아닌 일로 남편이랑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더니 또 한마디 던진다.
“엄마, 아빠랑 또 싸우는 거야? 그게 싸울 일이야?”
놀리듯이 한 마디 던지면서 또 웃는다. 남편은 말없이 일어나더니 설거지를 하러간다.
소파에 앉아서 보니 테이크아웃해온 아메리카노 한 잔이 식탁위에 놓여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임에 틀림없다.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다는 태도로 방에 들어간 아들 녀석을 불러 식탁위에 있는 커피 좀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또 한마디 던진다.
“엄마, 커피는 아빠에게 부탁하세요. 그리고 저는 잠깐 나갔다가 올 테니까 두 분이서 화해하세요. 오늘은 두 분이 화해하는 날이에요.”
이러면서 웃는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과일과 함께 커피를 가져다준다. 나름대로 갱년기를 겪고 있는 나를 배려해주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 오래전 그 지인을 떠올렸다. 가족들의 이해와 배려가 없는 가운데 갱년기를 겪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불만족스러움이 불평으로 쏟아져 나왔을 거란 마음에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던 것들이 조금은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20대에 혼자되셔서 아들 셋을 키우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시어머님 생각이 났다. 팔십 남짓한 삶을 살아오시면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 순간 부끄러운 마음에 등을 타고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