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못하는 새
- 안귀순
백령(白翎)이라 했다. 검푸른 바다에 날개를 펴고 앉은 한 마리 학이다. 여차하면 물을 차고 훨훨 날 수도 있으련만. 마음껏 날지도 못하는 박복한 새.
망망대해에 고단한 등 누이고 칭얼대는 파도를 달래야한다. 갈매기, 가마우지 텃새들에게 얄팍한 가슴 내어주고, 연약한 생명 끌어안고 끙끙대는 저 몸짓이라니. 무슨 업보를 치르는가. 한도 많고 사연도 많은 백령도와의 만남은 해당화가 붉게 핀 유월이다.
일찍이 중국 제나라 원나라에서 귀양 객을 보내왔고, 태조 왕건의 의형제 유금필도 무고로 쫓겨와 귀양살이를 했다. 현재 오 천 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는 황해도 등지에서 고기잡이 나왔던 어부들이 많다. 전란 때 갑자기 내려진 이념의 철책 앞에 만선의 깃발을 돌리며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설마하니 죄 없는 가족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오십 년이 지나도록 모른 체 할 줄을 귀신인들 눈치 챘을까. 고향 쪽으로 바람만 불어도 해안의 언덕에 올라 목이 터져라 그리운 이름을 불렀던 사람들. 그들은 이제 이산의 한을 안고 차례로 저승길을 떠나고 있다.
정부는 북한에 수백 마리의 소와 식량을 보냈다. 알게 모르게 돈 뭉치를 건네며 화해의 악수도 청했다. 그런데도 남북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지. 여기는 섬 주민보다 군인들이 더 많다. 살벌한 군사경계선에 걸려 있어 섬이지만 마음놓고 고기를 잡을 수도 없다. 날개가 있으나 날지 못하는 고독한 새, 이 비운의 땅을 일러 젊은 병사들은 청춘의 유배지라 부른다. 지금은 인천에서 쾌속선으로 4시간이면 가지만 지난날은 12-14시간 소요되었다. 그것도 바람이 불거나 안개가 있는 날은 배를 띄울 수도 없는 멀고도 험한 길이다. 이 섬에 근무를 명 받은 군인들은 유배지에 간다며 울고, 나갈 땐 섬 주민들의 따뜻한 인심에 정이 들어 또 울며 떠난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눈물 흘리고 한숨만 짓겠는가. 이 시대 마지막 자연 생태계가 꿈틀대는 원시 그대로의 땅이다. 어린 날 효친 사상을 일깨웠던 심청전의 청이가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뛰어든 바다, 인당수가 여기에 있고, 그 인근 바위 숲에는 물범들이 장난을 치며 논다. 이 섬의 백미(白眉)라면 북녘 땅이 마주 보이는 두무진 해안이다. 장산곶 마루를 스쳐오는 바람결에 몽금포 타령이라도 들려올 듯 한데, 오늘도 바위를 희롱하는 무심한 파도는 허연 이를 드러내어 웃기만 한다. 그 해안 절벽에는 섬섬옥수 빚어낸 신의 손길이 있다. 형제바위, 촛대바위, 선대바위, 온갖 형상의 석물들로 만물상을 차려놓았다. 그 절벽의 바위틈새마다 까만 깃털의 신사, 가마우지들이 북녘 하늘을 향해 명상에 잠긴 듯. 이런 아찔한 풍경도 아랑곳없이 내 마음은 절벽너머 산 속을 더듬고 있다.
"아저씨 저 산꼭대기에 해병 초소가 있나요."
"그럼요 죄다 해병들이지요."
당연한 이야기를 뭐 싱겁게 묻느냐는 듯 유람선 기사는 더 말이 없다. '내 아들이 저 후미진 산 속에서 매운 해풍과 싸우며 조국의 하늘을 지켜낸 포병이었지요.' 이 말이 목까지 차 올랐지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백령도 여행을 준비하는 내게 아들은 자신이 머물렀던 초소를 방문해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민간인 신분으로 어렵기도 하거니와 함께 간 일행도 있어 아쉬움을 접고 돌아서니 언젠가 그가 보내준 편지 한 토막이 떠오른다.
'며칠 빙벽에 갇혀 지내다가 오늘은 본부에 다녀왔습니다. 밥보다 더 신나는 어머니 편지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등에는 물통, 양손에 부식물 들고 가파른 산길을 올랐지만 루루랄라 콧노래를 불렀지요. 몇?(보안 문제로) 명의 병사와 군 견 한 마리가 며칠을 버텨야할 물 한 통, 그것으로 밥짓고, 세수하고, 속옷 빨고, 그야말로 모세의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
거친 해풍에 하나같이 난쟁이가 되어버린 고목들 사이로 봄이 오면, 눈을 뚫고 피어나는 노란 춘란들이 초소를 지켜주어 외롭지 않단다. 그 산정에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화사한 월광아래 한시(漢詩)집을 들추며 동파의 적벽가를 부르고, 피리소리 은파에 띄우며 그리움 달랜다고.
아들은 이 섬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귀한 선물을 안고 왔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불굴의 해병정신과 상부상조하며 우정과 의리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끈기의 해병 혼, 무엇보다 순수한 자연과의 교감으로 한결 넉넉해진 마음이다.
초여름 장마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두무진 바닷가 언저리에 구름 같은 해당화가 기다리고 있다. 초록빛 숲과 푸른 바다, 하얀 모랫벌에 펼치는 붉은 꽃 덤불은 한편의 드라마다. 어느 수필가는 이 꽃을 일러 전쟁에 쏟아 부은 통한의 피, 그 미망인이 쏟아내는 피울음이라 했던가.
바다건너 명사십리에서 파도에 실려왔을까. 떠나고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다 한을 품은 사랑의 화신(花神)인가. 살그머니 얼굴을 묻어 화피(花被)의 숨결을 들으니 그를 에워싼 까칠한 잎새들이 가시 날을 세운다. 당돌한 듯, 수줍은 듯, 해무(海霧)에 젖어 흐느끼는 두무진 해당화는 우표 없는 편지다. 이 땅의 아픈 역사를 비장하게 품고 있을 혈로 쓴 붉은 편지.
삶이 시들하고 권태롭거든 섬에 가 보라 권하고 싶다. 얼마나 해풍에 시달려야 모 없이 탐스러운 조약돌이 되는지, 얼마나 그리움을 앓아야 핏빛 고운 꽃으로 피어나는지. 백 마디 말보다 몸짓으로 전하는 존재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
누가 아는가. 첫사랑의 달콤한 입술 같은 한 송이 파초(芭蕉)라도 만날지. 바람 부는 해안 절벽의 산꼭대기에 핀다는 고고한 꽃, 뿌리 채 뽑아 바윗돌에 두어도 기어이 꽃은 피우고야 시든다는 강인한 생명의 화신. 그들이 분단의 모진 세월을 지켜온 백령의 혼일지도 모른다.
그 혼령의 기를 받아 시시하고 권태로운 어제를 훌훌 털고, 용기 있게 일어설 수 있다면, 그대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2,003 에세이 문학 가을호.
2,003 에세이 20선 선정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