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來가 하는 말
수필문학 공동제 수필
내가 걷는 수필문학
안귀순
풀리지 않는 원고를 붙들고 시름하다 거실에 나서니 달콤한 향기가 우르르 밀려든다. 밤에만 피는 꽃 야래 향이다. 무슨 사연이 있어 빛도 인기척도 없는 한밤에 이렇듯 아릿한 향기로 가슴을 풀었을까. 세상을 향해 나를 알리는 글을 쓰듯 야래(夜來香)는 냄새로 넋두리를 쏟아놓았나 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자신을 표출하고픈 욕망이 있다.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식물은 향기로, 동물은 소리로 몸짓으로 자신을 알린다. 심산의 백합은 향으로 벌 나비를 부르고, 우리 속의 짐승은 소리로 사랑을 찾고 먹이를 구한다. 작은 새가 그 울음소리가 처량하고, 모진 풍상을 겪은 매화나 수선화가 향기가 깊다. 대나무는 텅 비워낸 겸허함으로, 청솔은 변할 줄 모르는 의연한 기상으로, 고결한 선비의 표상이 되는 게 아닐까.
가끔 글을 쓰게된 동기라든가. 자신의 문학관을 얘기해 달라는 이가 있다. 그럴 때면 말문이 막힌다. 자손대대에 전하지 않으면 안될 사무친 한이 있어서도 아니다. 험난한 시대의 파수꾼이 될 정의의 붓을 들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넘치는 지성과 감성을 감출 수가 없어서,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왜. 빚에 쪼들리는 가난뱅이처럼 얄팍한 감성을 쥐어짜고 있는지. 알피니스트가 목숨걸고 험난한 산을 오른다.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대답한다. 나 역시 그냥 쓰고 싶어 쓴다. 조금 더 솔직해 지라면 처음엔 멋모르고 썼고, 지금은 수필을 에워싸고 있는 고결한 분위기가 좋아서이다. 숲길을 걸으면 영혼이 평화롭다. 이름 모를 풀꽃도 고와 보이고, 못생긴 청설모도 귀엽다. 그처럼 맑은 영혼이 깃든 수필을 만나면 무작정 즐겁고 행복하다. 이십여 년 전이다. 바람에 뒹구는 낙엽이 무녀의 휘파람 소리를 내던 으스스한 가을밤이었다.
새로 이사든 이웃 내외가 손수 재배했다며 탐스런 국화 분을 들고 왔다. 찬바람을 가르고 꼭꼭 잠긴 대문을 두드리며 집집마다 꽃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달빛 속에서 지켜보았다. 무서리에 젖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달콤한 향기를 풀어내는 국화가 그날 밤 유난히 아름다웠다. 이웃을 위한 사랑과 희생이 담긴 국화 분 하나가 마을에 보이지 않은 변화를 몰고 왔다. 누가 이사를 가고 오는지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함께 꽃을 재배하면서 자연스레 얼굴을 마주했다. 서로의 기술정보를 나누고, 꽃모종을 나누었다. 가을이면 차례로 티파티를 열어 작품 품평회도 있었다. 마을은 온통 꽃밭이었다.
인정의 향기, 꽃향기가 도심의 야박한 울타리를 허물고 마음의 문도 열게 했으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그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자성의 소리를 들었다. 붓을 들어라. 아름다운 것은 나누어야한다. 그렇게 국화마을 이야기는 내 무딘 필설로 신문 방송 전파를 타고 미담으로 흘러나갔다.
갑자기 평범한 아낙이 글쓰는 아줌마로 업그레이드되어 마을에 소문이 났다. 메마른 들판에 쏴! 하고 내리는 빗소리였다. 중년의 심연에
빈사상태로 죽어가던 감성이 꿈틀대며 살아나는 느낌, 잊고 살던 문학의 불씨가 꿈틀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음성 좋은 방송국PD,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의 부추김도 한몫 했던가보다. 밤이면 신들린 듯 원고지를 붙들고 씨름했다. 그러나 문학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다가 와 주지 않았다.
그때 결심을 했다. 기왕 내친걸음이니 제대로 써 보자. 그때부터 문학 강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부산 여성문학회에서 주최하는 '문학과 독자의 만남'부터, 주부클럽 주최 문학당, 시와 비평사 부설 문예대학, 영광도서 소설학당. 그러면서 유수한 문예지에 추천도 받고 아직도 동인 활동을 하며 글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국화이야기는 불나비가 멋모르고 뛰어드는 유혹의 등불인지 모른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태산 오르기. 오르면 오를 수록 아득한 절망을 느끼는 것이 문학의 길임을 십 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야 알 것 같다. 누군가는 그래서 도전할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 얄팍한 지성으로 거창한 철학을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도심의 시멘트 틈새에서 손짓하는 풀꽃 한 송이에 감동하고, 칼국수 한 사발에 허리띠 풀어놓고 행복해하는 소박한 사람들이 내 문학의 뜰이며 사유(思惟)의 대상이다. 아픈 날을 회상하며 참회하고, 그리움을 앓고, 그러다가 글 한 줄에 눈물 한 바가지다. <현대인이 수필을 읽는 이유>에서 김열규님은 수필을 펼치면 글쓴이의 살 냄새가 난다고 했다.
불길처럼 타오르던 경험, 얼음처럼 경직된 느낌, 전류처럼 온몸을 전율케 한 감동, 이것들을 고스란히 풀어내어 병아리처럼 푸드득 부화하는 순간이 수필 속에 있다고 했다. 수필은 생활의 때가 이끼처럼 자욱히 낀 인간화 된 물건의 시장, 곧 벼룩시장이라고. 수많은 말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말을 찾아 독자들은 수필을 읽는다고 한다. 나를 향해 질책하는 소리로 들린다. 우아한 향기에 젖어 고상한 척 그만하고 사람 냄새나는 저자거리로 뛰어 들어보란다. 삶의 땀방울이 흥건히 묻은 속옷도 내놓고, 남몰래 흘린 눈물의 손수건도 드러내어 육화된 벼룩시장을 펼쳐보라는 얘기다.
어차피 글을 쓴다는 건 벌거벗고 뛰어든 무대가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슬쩍 가리운 커튼을 치울 용기가 없다. 굳이 벗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부끄러운 곳은 슬쩍 가리고, 아름다운 것은 나누면서 중용의 미를 살리는 게 작가의 개성이 아닌가. 어쩌면 이것이 자신을 향한 변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더러는 천박하게 노출하기보다 슬쩍 가리운 커튼 속에서 신비감을 느끼지 않을까.
글 몇 줄에 온밤을 끙끙대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야래 꽃은 밤새 장편 소설을 풀어놓았다. 야래가 풀어내는 향이 있는 사설에 누옥이 둥둥 떠내려갈 것만 같다. 부럽다. 그침 없이 쏟아내는 저 맑고 고운 이야기. 내 문학도 누군가의 마음에 한줄기 맑은 향기로 남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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