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건강 비결
나는 음식을 많이 먹는 편이다. 40 년도 지난 과거의 얘기인데, 결혼 전에 잡지에서 ‘미인 소식(美人 少食)’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고 간단하다. 한 남성이 어떤 예쁜 여성을 좋아하게 되어 그 매력에 빠졌는데,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이 탈이었다. 그 미인이 많이 먹는 것을 보고는 정이 뚝 떨어져서 그 녀와 헤어졌다는 글이었다. 읽을거리로는 흥미로웠으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나는 많이 먹는다. 먹는 일이 최우선이다. 방해 받기는 물론 싫어하고 중간에 멈추는 일도 피한다. 그 글을 읽었을 시기가 나의 약혼시절이었다. 미인도 대식(大食)하면 연인을 잃는데, 미인도 아닌 내가 많이 먹는 것을 보면 약혼자가 환멸을 느낄 수도 있다. 그 글을 읽은 이후로 데이트할 때면 식당에서 메뉴에 올라 있는 것 중 두 가지를 선택하고는 먹고 싶다고 말했다. 사 달라고 말 만 한 것이 아니고 두 그릇을 다 먹었다. ‘갈 테면 초저녁에 떠나라’ 는 마음이었다. 연분은 따로 있나? 약혼자는 굶주린 사람처럼 퍼 먹는 나를 보며 오히려 즐거워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에 작고하셔서 어머니는 30 대 때부터 혼자 남매를 키우셨다. 일제 말기 전쟁 중인 일본은 군량미의 확보정책으로 공출(供出)을 독려하고 농촌에서 생산 된 쌀이 도시로 반출되는 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었다. 시골의 농토에서 받는 도지 쌀을 서울로 가져오려면 쌀자루를 가지고 기차를 타고 오게 된다. 서울 역에 도착하여 집찰구에서 표를 내고 나오면 지키고 있던 형사들이 역 직원과 함께 쌀자루를 압수한다. 무거운 것을 고생스럽게 서울까지 가져왔으나, 다 와서 빼앗기고 낙심하며 빈손으로 집에 가시던 우리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허탈하고 안타까웠을까. 여러 번 동행하며 목격하였던 나도 어렸을 때의 기억이지만 불안과 분개는 아직도 생생하다. 마침내 우리 어머니는 편법을 궁리해 내셨다. 큰 옷감을 두 겹으로 겹쳐서 속치마를 만드시는데 널찍널찍 세로로 누비면 여러 개의 홈이 생긴다. 한 칸 한 칸 그 공간에 쌀을 채우면 파이프처럼 불룩불룩 해지며 많은 쌀이 들어간다. 여기에 조끼모양의 윗부분을 만들어 이으면 쌀자루 누비치마가 된다. 속에는 쌀자루 누비치마를 입고, 겉에는 일반 치마로 쌀을 숨겨 어깨로 짊어지고 오셔서 우리 남매를 먹이셨다. 암거래하는 쌀조차 귀한 시절이었으나, 맛 있어하며 많이 먹는 남매를 보시고 늘 흐뭇해 기뻐하셨다. 나는 많이 먹기만 하면 칭찬 받는 일이며, 잘 하는 짓인 줄 알았다. 이제 나도 백발이 무성해지고야 어머니의 깊고 뜨거운 사랑을 깨달으나 이미 우리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다.
내가 젊었을 때도 식량난이 계속된 세월이었다. 대 가족으로 20 명이 넘는 가족을 거느리시며 거두어야 하는 시부모님의 고충도 매우 컸으리라.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고 갓 시집 온 새 색시가 사양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먹을 만큼 먹어야만 수저를 놓는다. 살게 마련이라는 말이 맞는지, 시부모님께서는 잘 먹는 것이 예쁘다하시며 ‘더 먹어라, 더 먹어라’ 하셨다. 신이 나서 먹고 또 먹었다. 이 무슨 주책인가. 식량난이 얼마나 극심하였던지, 6.25 직후 군대에 나간 국민방위병 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세상인데, 배꼽이 뽈록 나오도록 먹어야 일어나던 나는 시부모님께서도 타계하신 지금에야 철이 드는지 보답할 길 없는 은공에 한숨짓는다.
며칠 전에 수필공부 모임에서 사찰에 간 적이 있다. 사전에 전화로 공양을 부탁하였으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행 중 몇몇 사람이 준비해 온 것만으로는 부족할 듯이 보였다. 동행한 사람들은 충분할 것이라며 걱정들을 안 하는데, 나의 먹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서슴없이 주방 앞에 있는 여러 개의 밥솥 뚜껑을 열어보았다. 밥이 남아 있었다. 주방을 들여다보며 ‘점심준비를 못 해왔는데 미안스럽지만 밥 있으세요?’ 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용감하고 뻔뻔할 수 있었던 것은 ‘배고픈 이 밥을 주어 기사공덕하였는가,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 공덕하였는가’ 라는 회심곡의 구절을 머리에 떠올린 때문일까? 이 대목을 굳이 말로 인용하며 밥주기를 청하지 않더라도 사찰 주방에 계신 할머니의 마음 속에는 자비의 온정이 새겨져 있었으리라. 시장하다는 나의 요청을 물리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식사를 충실히 하겠다는 나의 의지의 힘도 작용하였겠지. 제법 많이 퍼 준 밥을 전부 먹은 우리 일행은 하산할 때까지도 속이 든든하고 마음이 흡족하였다.
에피소드는 또 있다. 소도시의 역 광장에서 연세가 높으신 분을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점심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는데, 가보니 역 근처에는 주차할만한 곳이 없다. 멀리 차를 세우고 광장으로 뛰어가 기다리나 약속한 분은 좀처럼 오시지를 않는다. 12시를 훨씬 넘겼으니 내 배가 얌전할 수가 없다. 내릴 때 급한 마음으로 차 열쇠만 가지고 내렸기 때문에 쥐고 있는 것이라고는 열쇠뿐이다. 김밥 한 줄 사 먹을 수도 없다. 왕 짜증이다. 문득 보니 광장에서 노인들에게 무료급식으로 사발라면 한 개씩 나누어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반가워 뛰어가 줄을 섰다. 허기진 표정의 허름한 노인들이 줄 서 있었다. 그 줄 뒤에 가서 나도 차례를 기다렸다. 식사 약속인 그날따라 멋을 한껏 부려 옷을 골라 입고 잔득 모양을 내고 간 차림이었지만 무슨 상관이랴. 손에는 자가용차 열쇠를 들고 걸식노인들이 드셔야 할 끼니를 먹으려는 내가 염치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나도 걸식노인이다. 드디어 라면을 받고 다시 옆줄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부어, 급하지만 면발이 적당히 불도록 잠시 기다리다 뚜껑을 열어 후～후～ 불어가며 서서 먹던 그 라면 맛은 고급 식당에서 즐기던 어떤 요리보다도 더 꿀맛이었다. ‘사흘을 굶어도 체면을 중시해야한다’ 는 생각으로 사는 우리 남편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절 일보 직전까지 가겠지. 아무튼 먹는 행위에는 이렇게 정열적이며 규칙적인 식사 습관이 나의 건강을 지탱해주는 힘이라 생각한다.
매일 출근하는 사람처럼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서둘러 바쁘게 외출하고 늦게 귀가하는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나다녀도 지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건강 비결이 뭐냐’ 는 질문을 받는다. 정답은 하나다. ‘식사를 세 번 충실히 하는 것’ 이라 생각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체중감량, 또는 바쁘다는 이유로 아침식사를 거른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제대로 식사를 안 했으니 시장하겠지만 그 감각도 익숙해지면 배가 고픈 줄을 모르게 된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서서히 건강은 좀 먹어 갈 것이다. 우리 몸은 오래 전부터 하루에 세 번 식사 하는 것을 기본으로 생활하여 왔다. 가급적이면 제 때 제 때에 식사하는 습관을 갖자. 미용 목적으로 식사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미식(美食)이 아니더라도 즐거운 식사, 규칙적인 식사가 우리 몸이 무리 없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원동력일 것이다. 세 끼 꼬박꼬박 잘 먹어야 건강하고 활기차며, 건강해야만 사는 보람과 발전도 있을 것이다.
<2005년 5월>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7-27 0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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