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白蓮 원화윤
입동절기도 지낸 이른 아침의 산하, 잔설이 내린 듯 된서리에 덮인 들판은 그렇듯 조용했다. 가끔 내린 찬비에 색조가 좀 변했지만 단풍색깔은 여전히 곱다. 겨우살이 준비에 숙연해진 나무들은 왁자하게 갈아입은 고운 옷을 조용히 벗고 있었다. 앙상해진 감나무 가지에는 주렁주렁한 감들이 연등처럼 곱다. 수북수북 소신공양하는 모습은 더없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전경이다. 상념 깊은 색감은 늦가을만의 특권이 아닌가.
감나무 상가지 끝에서 겨울을 보내는 홍시는 겨울양식을 갈무리 못하는 새들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그 숙연함 속 청일점 소나무는 겨울 산에 꽃이었다. 왁자한 푸름으로 꽉 찼던 밭뙈기에는 김장김치거리 배추와 무만 군데군데 남아있다. 볏짚에 묶인 만삭인 배추를 보니 김장거리배추를 동여매시던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이 떠오른다.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를 도와주시던 매사 자상하시던 아버지, 문득문득 그립던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을 추억하게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빈 논바닥에는 나락을 다 털어낸 푸석한 짚단만 군데군데 빈 논을 지키고 있었다. 허허로운 들판은 겨울의 문턱임을 절감케 했다. 감들이 예쁘게 매달린 감나무 옆 뒤뜰 굴뚝에서는 꾸역꾸역 하얀 연기가 핀다. 이른 아침 검푸른 하늘을 수놓는 하얀 연기는 더없이 평화롭다. 초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는 행선지에 다다를수록 산봉우리와 숨바꼭질을 반복하는 안개 띠는 마치 승무춤사위를 연상케 했다. 비단결 안개에 갇힌 색조의 풍경은 한 폭 추경 운치였다.
더벅머리 가르마 같은 철길이 한눈에 든다. 저 철길을 따라 행선지도 모르는 여행길에 오르고 싶었다. 정겨운 간이역도 만나고 싶었다. 찬비에 흠뻑 젖은 플랫폼을 걸으며 울고 있는 홈 등에서 아스라한 추억을 캐내고 싶었다. 교차하는 만감은 멀어지는 기적소리가 뽀얗게 핀다. 동맥 같은 협곡을 가로지르는 물살은 체증이 뚫릴 것 같은 후련함이다. 평화로운 물살을 굽어보는 상념 깊은 늦가을 정취는 한 땀 한 땀 어머니가 지은 조각보를 연상케 했다. 고요 속 단아함은 그렇듯 애련했다.
늦은 오전에 도착한 첫 행선지 청령포, 가을 하늘이 누워 있는 거울처럼 맑은 호수 속에는 이름모를 치어들이 깔려있었다. 잠깐 나룻배로 닿은 청령포,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됐다.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는 출입 할 수 없는 섬과도 같은 곳이다.’ 유배지 뒤 편 깎아지른 암벽이 병풍을 이룬 요새 같은 청령포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육지 속 작은 섬이었다.
가을비에 젖은 한 폭 그림 같기도 한 청령포에는 위풍당당 위엄을 과시하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린 단종은 지독한 외로움에 갇힌 끔찍한 고독감의 무게를 어떻게 삭혔을까. 겁에 질려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육지 쪽을 바라다보며 엄마를 그리며 얼마나 울었을까. 충절의 노송들은 가여운 단종을 호위하며 든든한 등도 되고 포근한 품도 되었으리라. 그렇듯 세월의 테를 삼킨 노송들은 어린양의 멍울진 한을 토닥토닥 보듬으며 윙윙- 같이 울었으리라.
밤이면 밤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기웃거리는 별도 달도 소리죽여 흐느꼈으리라. 낮이면 동무가 되어 준 새들도 청솔모도 다람쥐도 속울음을 삼켰으리라. 상상만으로도 절규의 그 애처로움은 아, 가슴이 저렸다. 족쇄의 삶에 핏빛 한이 묻혀 있는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일대를 두루두루 돌아보는 내내 간 간 다녀가는 바람소리도 어린 단종의 처절한 울음소리로 느껴졌다. 나룻배에 오르니 치어들이 마음을 잡는다. 물속을 활보하는 물빛보다도 더 맑은 은빛 치어들은 비련의 삶을 살다 스러진 단종애사의 눈빛 같았다.
‘장릉, 장릉은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능으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이 17세 되던 해에 죽음을 당하여, 그 주검이 동강에 띄워졌으나 호장 엄흥도가 그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능이 있는 장릉에 암장하였다.’ 양지바른 능선에 안장된 무덤은 가없이 평화로웠다. 그 지역의 별미라는 곤드레만드레비빔밥, 양념장에 비벼먹는 비빔밥은 담백한 맛이었다. 은빛 물결이 흐드러진 강변로를 따라 약 40여 분 만에 조선민화박물관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민화 등 3,000여 점이 전시 되어 있는 조선민화박물관, 1988년 05월에 착공해 2000년 07월 29일 개관한 민화박물관은 전시관 등 건물이 330평에 부지가 7,400평이다.’ 호기심에 찬 생소한 작품에 상세한 해설은 흥미진진했다. 두루두루 심취하노라니 생동감의 그 기교에 빼앗긴 마음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약 1시간 동안을 돌아본 우리그림 민화는 돌가루와 천연염료가 빚은 사랑의 결정체였다. 영구적일 것 같은 유형의 귀중한 작품들은 장인정신의 모체였다.
좀 늦은 오후에 민화박물관을 나서니 서산에 걸린 해는 그새 산그늘을 지우고 있었다. 산 속 어둠은 도심 속 어둠보다 빨랐다. 어둠이 내리는 어스름 저녁, 저 만치 민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정겨웠다. 어릴 적 이글거리는 잉걸불에 감자 고구마를 구어 먹던 작은집 사랑방아궁이를 추억케 했다. 짜여진 일정에 코스에서 제외 된 김삿갓문학관에 마음 한 자락 내려놓은 일정. ‘강원도 영월 향토문화 유적답사’ 는 매사 헛헛했던 삶 그릇에 요소요소 소중한 견문을 넓힌 뜻 깊은 여정이었다. 감사한 마음이다.
2007.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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