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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차 향기
이 일 헌
아직은 언 땅인데 꽃 소식이다. 남녘에서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한다. 매화차 생각에 벌써 마음이 바빠진다.
매화차를 처음 마시던 날이 생각난다. 오래전 이른 봄, 고(高) 시인이 나에게 매화 꽃가지 하나를 작은 스티로폼 상자에 넣어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젖은 솜에 감싸인 가느다란 가지에 몇 개의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다. 꽃잎 아래 푸른 기운이 감도는 청매였다.
김이 오르는 작설차 잔에 조심스레 꽃 두어 송이를 옮겼다. 찻물이 입술에 닿기도 전에 코끝에 스치는 고아한 향, 방안은 어느새 맑은 향기로 그윽해진다. 탐매인들이 이른 봄 설산에 들어가 한 떨기 매화를 찾아다닌다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그 후 봄이면 매화 분을 사다 나르기도 하고, 어렵게 구한 꽃을 말려서 갈무리하기도 했다. 예부터 시인 묵객들의 예찬을 받으며 노래와 그림으로 수없이 살아나던 꽃. 나는 가끔 흑유 찻잔 속에 여리고 하얀 꽃잎을 피워내 그 향과 멋에 취하곤 한다.
꽃향을 차에 스며들게 하거나, 꽃잎을 찻잔에 동동 띄워 별다른 향과 운치까지 맛볼 수 있는 것은 매화만이 아니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쟈스민이 그러하고, 여름 내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장미와 연꽃, 또 늦가을에 피는 소국(小菊)과 차꽃도 그렇다.
사실 나는 평시 꽃차를 즐기지 않는 편이다. 차맛에 분칠한 듯한 그 꽃들의 향기가 대개 내 구미를 당기지 못한다. 차라면 역시 작설잎의 담백한 맛과 향 그대로가 좋다. 하지만 매향(梅香)만은 아니다. 늘 그리운 님처럼 마음이 끌린다.
세종 때 시서화의 삼절로 불리던 강희안은 꽃을 9품으로 나누었는데 매화를 일품군으로 꼽았다. 꽃 모양보다는 화품(花品)으로 우열을 가린 것이리라. 차가운 눈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 새봄을 알리고, 맑은 향기를 내뿜어 늘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꽃이 아닌가.
선거가 있는 올 봄엔 매향 소식이 더 반갑게 들린다. 정초부터 적이 흐리고 어지러운 날들, 어서 매화의 청향(淸香)을 허기진 듯 흠씬 들이마시고 싶다.
월간 『책과 인생』2004년. 3월호 신춘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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