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날의
오수
이 일 헌
말복이다. 그 동안 줄곧 많은 비가 내렸음에도 역시 더운 날씨다. 한낮이 지나자 몹시 지쳐 한 숨 달게 자고 나면 살
것 같다.
지난밤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 말이 그 말 같은 낱말들을 넣고 빼고 하느라 새벽 3시를 넘겼다. 그러고도
소재에 대한 통찰과 관조, 문장, 어느 것 하나 시원한 구석이 없다. 내 자신에 대한 연민과 한숨에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였다.
오후가 되니 온 몸에 땀이 흥건하다. 에어컨에 눈길이 가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여 선풍기를 돌린다. 앞뒤의 창을 활짝 열고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찌르르 찔～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 매미들은 왜 저리 목청을 돋우는가. 윙～～ 저 멀리 샛강 너머 88도로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차 소리, 드르륵 찌～잉 위층 어느 집에선가 수리를 하는 듯 전기드릴 소리, 골목길엔 부우웅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간다. 뻐꾸기시계도
한몫 거든다. 신경에 날이 선 탓일까. 창문을 닫고만 살아서일까. 오늘따라 쏟아져 들어오는 저 소리들이 몹시도 거슬린다. 집이 큰길에서 어지간히
들어앉았는데도, 그야말로 도시의 원음(原音), ‘소음교향악’이다.
문득, 왜 여태 한적한 곳으로 집을 옮기지 않았는지 후회된다.
생활이 불편한들 그게 뭐 대순가. 헤드폰으로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소리 나지 않는 피아노를 만들었다고 하여 좀 웃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럴 만하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모든 해악(害惡)을 상자 속에 가두어놓았다고 하였다. 내 오수의 훼방꾼들을 몽땅
잡아넣을 그런 상자는 어디 없을까. 잠은 글렀다. 몸을 뒤척이며 짜증을 부리다가 읽다 둔 책을 펼쳐든다.
미국의
사회학자 ‘모리 슈워츠’ 교수는 불치의 루게릭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산다. 그가 삶과 죽음, 그 여정의 다리를 건너면서, 수제자인 ‘미치
앨봄’과 화요일마다 만나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논한다. 그의 생 마지막 강의다. ‘미치’가 그 내용을 정리한 글이『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랑을 나누는 법, 받아들이는 법 등, 노교수의 초연한 인생관이 감동적이다.
스승 모리는
사랑, 일, 공동체 사회, 감정, 용서 등 인생 이야기를 교과서 대신 자신의 삶을 교재로 삼는다. ‘감정’을 주제로 한 여섯째 화요일날 모리의
건강은 바람 앞의 촛불이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 초조함, 그 축축함과 오싹함에서 벗어나는 법에 대해 말한다. “감정이 안으로 들어오게
내버려두어라, ··· ··· 늘 입는 셔츠처럼 입어버려라”고.
초록 형광펜으로 그어 놓은 이
대목을 다시 읽고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떠한가. 가족과 친지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욕구, 그에 따르는 애증과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잘 다스리지 못해 얼마나 부대끼며 살아왔던가. 글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글쓰기’란 나 스스로
선택한 일, 그 어려움 뒤에는 그저 그런 사물이나 삶들을 새롭게 인식할 때의 감동이라든가, 글 한 편이 그런 대로 다듬어졌을 때의 뿌듯함을
생각하면 새삼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다. 글쓰기에 대한 자학이나 회의 따위의 감정들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늘 입는 셔츠처럼
입어버려라’고 한 말은 명쾌한 해답인 것 같다.
소음도 그렇다. 짜증을 내며 자신을 상하게 헌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가. 사실 소음이란,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나 아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우리 삶의 소리들이다. 집을 고치고 차와 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따르는 행위들이다. 큰소리나 교묘한 말로 남의 가슴을 찌르고 어지럽히는 수많은 말들의 공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저
소음들은 지금 나의 현실, 저것으로 인한 불편한 감정들을 셔츠를 입듯 껴입어야 한다. 그래, 이제 소음들과 화해를
해야겠다.
다시 누웠다. 여전히 드릴 소리가 요란하다.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28년 전,
부산에서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처음 지을 때를 생각한다. 저 드릴로 그 옛집의 부엌에 선반을 설치한다. 요즈음 같은 세련된 기성품이 아닌
주먹구구로 설계한 것을 목수가 짜 맞추어 벽에 붙인다. 그 때에는 망치로 꽝꽝 두들겨 박았는데 이제 몇 번 드릴로 드르럭 하면 된다. 몇 달
동안이나 먼지와 망치, 톱 소리를 잘 견디어 준 고마운 이웃들이 생각난다.
아직도 매미들이 울어댄다. 작은 몸집에서 어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어둔 땅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칠 년여 애벌레로 살았다고 하지 않는가. 삶을 확인하듯, 한을 풀 듯, 남은 생 겨우 달포
가량을 위해 한껏 노래하는 저들이다. 나는 젊은 시절 음악을 공부했건만 저렇게 겨웁고 여한 없이 노래 불러본 적은 없다. 매사가 다 그렇다.
맴～맴～ 소리에 화음을 맞춰 허밍으로 조용히 가락을 붙여 본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서로 공명을 일으킨 듯
비행기 안에서 듣던 소리와 유사하다. 지난 7월 초, 울산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그 인상적인 그림은 아마도 ‘장마 끝’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내다본 창 밖에는 수많은 구름 봉우리들이 층층을 이루면서 두둥둥실, 오후 햇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백(白)과 회(灰)의 명암(明暗)들이
자아내는 저 은빛의 환(幻) ··· ··· ···
1998년 창작수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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