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설수(臘雪水)
이 영 임
초가을 햇볕이 아직은 따가운 오후.
공연 시간보다 두 시간쯤 일찍 도착한 예술의 전당은 고요했다. 여름 내내 야외 전시회와 각종 행사로 북적이던 전당 뜰은 가을 하늘을 잔뜩 안고서 한가롭게 누워있다. 산책 나온 노부부 이마 위로 한 무리의 구름이 길다랗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흘러간다.
몇몇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너른 마당을 지나 오페라 하우스 뒤편으로 천천히 걸어본다. 대성사로 오르는 언덕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둔덕 위에 장독대가 보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사는 흔적은 없는데 인적 드문 우면산자락 아래 장독대라니.
도심에서는 사라져 가는 장독대가 옛 친구를 만난 듯 한없이 반가웠다. 누구의 손길인가. 그만그만한 돌을 쌓아 만든 장독대. 예술의 전당과 담 하나를 끼고 크고 작은 항아리 십여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모여 있다. 절에 오르는 불자들을 보라고 만들었을까.
장독대 주변에는 가을 들꽃이 하늘하늘 피어있다. 담에 기대어 편하게 앉아 본다.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자리 잡아서인지 항아리는 뜨겁게 달구어져 있다.
옛날 잘 사는 집에는 장독대가 두 개였다고 한다. 몇 년씩 묵혀 먹는 장(醬)항아리를 두는 양(陽)독대와, 별당 뒤 볕이 들지 않는 곳에 마련한 음(陰)독대이다.
양독대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간장 된장은 물론 고추장에 소금항아리까지 수많은 항아리들이 키 순서에 맞추어 나란히 놓여있다. 햇볕 바른 장독대 주변에는 철따라 꽃들이 피고 진다. 어디에도 그늘은 없다.
겨우내 묻혀 있던 빈 김치 항아리가 올라오면 가끔씩 개구쟁이 아이들이 숨바꼭질놀이에 숨어들기도 하는 양독대는 여인들의 살림터이다. 장독대만 보아도 그 집의 살림살이는 물론 안주인의 손끝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음독대에는 납설수(臘雪水)라는 신비한 물을 보관하였는데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차 맛이 기가 막히게 좋다고 한다. 또한 그 물을 사용해 담근 장으로 간을 한 음식은 쉬지 않으며, 약을 달이면 약효가 뛰어나 병이 쉬이 낫는다고 한다.
동지 후 세 번째의 술(戌)날을 납일(臘日), 또는 납평(臘平)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날 내리는 눈을 납설(臘雪)이라고 한다. 이 눈을 녹여 만든 물이 납설수이다.
납설이 내리는 것은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니 참으로 희귀한 눈이다. 옛 선조들은 납설이 내리면 돈이 내린다고 하여 집 안의 빈 그릇은 물론 이불보까지 마당에 깔고 눈을 받았다.
이렇게 모은 납설수는 씨앗을 뿌리기 전에 담가 두는 풍년수(豊年水), 돗자리 등에 뿌려 두는 살충수(殺蟲水), 눈병을 씻어내는 안약수(眼藥水), 얼굴을 가꾸는 화장수(化粧水) 등으로 아주 귀하게 사용하였다. 햇빛도 없는 응달의 지하에 있어도 이렇게 소중한 물을 보관하는 음독대야 말로 양독대 못지않은 살림살이이다.
장독대를 감싸고도는 가을바람은 부드러웠다. 들풀 내음이 코끝을 간질거린다. 불현듯 납설을 녹여 쓰던 옛날로 가고 싶다. 산뜻한 다홍 스란치마에 끝동을 단 유록(柳綠)저고리를 입은 새댁이 된다면 더욱 좋겠다. 햇볕을 따라 장 뚜껑을 여닫으며 장맛을 다스리는 살림꾼이고 싶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하얀 행주치마로 가뿐히 치마를 여며 매고는 항아리를 닦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적갈색 항아리가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몇 번이고 장독대를 맴돌고 싶다.
음독대에는 나를 위한 작은 항아리 하나를 숨겨 두고 싶다. 찔레 꽃잎 같은 납설이 내리면 옷장 속 치마란 치마는 모두 내어 눈을 받으리라. 알뜰히 모은 납설수를 숨겨 두고는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나 혼자만 쓰고 싶다면 욕심이 지나칠까.
정성껏 얼굴을 씻어 정갈하고 단정한 여인이 되고 싶다. 눈을 씻어내어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고, 귀를 씻어내어 내게 유익이 되는 것만 가려듣는 현명함을 얻고, 입을 헹구어서는 꼭 해야 될 말만 하는 그런 여인으로 살고 싶다. 달이 밝으면 정든 님과 함께 납설수로 빚은 술을 마시며 황진이의 시를 한 수 외운다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한 줄기가 부드럽게 들꽃들을 쓰다듬는다. 엷은 주황빛에 잠긴 가을 해는 저만큼 내려앉고 장독대 아래로는 항아리 그림자가 엉켜있다.
새해에는 이십사절기가 자세히 표기된 달력을 구해야겠다. 동지 뒤의 세 번째 술일(戌日)을 찾아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치고는 기다릴 것이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제사를 드린다는 납일, 그 납일에 눈이 내리면 온 몸이 젖어들도록 오래오래 눈을 맞아야겠다. 그리고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마음의 음독대를 만들어 두고 납설수를 저장할 수 있을 만큼 저장해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겨울 때마다 조금씩 꺼내어서 생명수처럼 소중하게 쓰고 싶다.
늘 청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쇠잔해 가는 정신에도 뿌리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흔들리는 마음에도 한 방울쯤 뿌려주어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