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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일헌(2007-08-30 17:05:01, Hit : 2733, Vote : 144
 내가 연주하는 유리알 유희

내가 연주하는 유리알 유희/ 이일헌



1.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헤세

홍선생님. '가까이 느끼는 헤세' 강연회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의 훌륭한 강연을 듣게 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대문호라고만 알고 있던 헤르만 헤세가 음악학자이고, 이천여 점의 그림을 남긴 화가이며, 동서양 사상에도 대가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지난 여름 신문 한 모퉁이에서 "데미안의 향기 물씬 느껴보세요"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을 때 저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목원대학교에 헤세 전문도서관을 개관하신다는 교수님의 웃는 사진도 보았습니다. 도서관이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전화를 드린 저에게 여러 참고 자료를 보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헤세의 많은 저서 중, 제가 지금까지 손에 잡았던 것은 젊은 날에 읽은『싯다르타』와『데미안』,『知와 사랑』등 불과 네댓 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아에 눈뜨는가, 깨달음을 얻는가, 사랑하고 죽는가 하는 문제들을 주인공과 함께 고뇌하던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의 만년의 대작『유리알 유희』⑴를 처음 접한 것은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은유와 상징과 기호로 가득 찬 소설은 난해하기 그지없어 책장을 쉬이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두어 번 더 읽었으나 역시 제 사유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였습니다. 다만 '유리알 유희'는 무슨 뜻일까,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 크네히트가 왜 그렇게 돌연 죽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들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내내 관련된 논문과 새로 구입한 『동방순례 』등 몇 권의 책을 들고 조금씩 헤세에게로 다가갑니다. 한 걸음 내디딜수록 망망대해를 바라보듯 아득합니다. 하지만 제가『유리알 유희』를 왜 그리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가 하는 이유를 어렴풋 알 것 같습니다. '유리알 유희'가 제 중년 이후의 삶을 사로잡았던 '차(茶) 유희'와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차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옛 성현들이 즐겨 마셨다는 그 차 말입니다. 그런데 수 년 동안 차를 달이거나 그에 관한 공부를 할 때면, 어쩐지 화두처럼 머리 속에 맴도는 언어가 '유리알 유희'였습니다. 간혹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묻곤 하였으나, 그 답은 언제나 아쉬움만 남겼을 뿐입니다. 이번 '헤세 展'과 '헤세 문학 강연회'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2. 신세계 카스탈리엔

오늘도 한 잔의 차로 이른 새벽을 엽니다. 미래 2400년 경, 한 전기 작가의 서술로 시작되는 소설『유리알 유희』에 눈길을 모읍니다. 유럽의 어느 교육주 '카스탈리엔'을 꿈속인 듯 헤맵니다. 이 글은 그곳의 유희 명인 요젭 크네히트의 삶을 추적하는 글이지만 20세기를 회고하는, 지금 우리시대에 대한 비판과 성찰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청빈과 음악이 있는 카스탈리엔, 그 곳은 학문과 예술뿐 아니라 동서 성현들의 지혜를 가르치는 '영혼의 수련장', 마치 중세 유럽의 수도원인 듯, 당나라 선불교의 총림인 듯, 맑고 경건하여 절로 가슴을 여미게 합니다. 그 소설 속의 신세계는 세계 제2차 대전이 막 끝날 무렵의 폐허 속에서 탄생된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물질 위주의 가치관으로 휩싸인 시대, 저속한 예술과 온갖 허위 구호들이 언어의 탈을 쓰고 판을 치던 '잡문시대'라 불리는 20세기, 그 압박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수의 사람들이 애써 이룩해놓은 '유토피아'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유리알 유희'는 카스탈리엔의 정수요 상징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형체로 잡을 수도 없는 추상적 유희라 처음부터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 유희는 "인류 역사가 축적한 모든 학문과 사상, 예술 등, 즉 정신적인 가치가 있는 풍부한 재료를, 마치 오르간 연주자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듯 유희하는 것……" "구조는 수학과 음악, 바탕은 명상" 또 "숭고한 예배" 라는 신비적인 언어들을 담아내기에 제 그릇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우주적인 기호에 점점 끌려들었습니다.

그 유희의 이름이 왜 하필 '유리알'이었을까요. 모래와 불의 조화로 빚어낸 불변의 물질인 유리의 특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위적으로 가한 고열에서 탄생한 것, 다양한 색깔과 빛을 투과 반사하는 것, 맑고 매끄럽고 투명한 것, 연성상태에서 불고 새기고 늘리고 자르면서 작가들의 표현을 자유롭게 하는 인공보석입니다. 더하여 새로운 생명을 의미하는 알, 유리알은 고난에 찬 인간완성의 길과 잘 어울리는 상징물이라 여겨집니다. 이상향 카스탈리엔에서 연주되는 유리알 유희, 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세계를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3. 명인 요젭 크네히트

주인공 크네히트는 '유리알 유희'가 진정 가치가 있는 것인지, 형식적인 예술에 지나지 않는지 의심을 갖기도 하지만, 그의 타고난 맑은 영혼, 뛰어난 음악성, 그리고 긴 세월 수련으로 마침내 그 진수를 깨달았습니다. 학문의 완성, 정신의 최고 경지를 상징하는 유리알 유희의 명인(名人)에 올랐습니다. 그의 모습은 조용하고 온화하며 명랑하면서도 위엄이 넘칩니다. 예(禮)와 악(樂)으로 절조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성인'이나 '군자'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런데 너무 맑고 빛나게 다듬어진 유리알, 그 생명에서 완벽한 미(美)가 숙명적으로 안아야 하는 외로움과 아픔도 읽을 수 있습니다.

크네히트에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그 성소(聖所)를 비판하고 위협하는 바깥세상에까지 마음을 열고 있다는 점입니다. "카스탈리안 사람은 인공적으로 사육되고 노래하는 어린 새" 라며, 세속적 삶을 역설하는 친구 데시뇨리에게 저항하면서도 공감합니다. 또 "진리는 그 시대 공동체끼리의 약속이며, 세계사 속의 일부일 뿐"이라는 역사학자 야코브스 신부의 비판에도 조용히 귀 기울일 줄 압니다. 주인공은 정신과 육체, 개인과 사회, 규칙과 자유, 삶과 죽음 등 다양한 대립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립은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대립적 요소들이 서로 충돌과 소통을 통해 하나의 화음을 이루는 데 있다는 것을.

명인으로서의 안주가 아닌,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하는 일에 번민하는 크네히트의 영혼을 따라가노라니, 저도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들숨 날숨처럼 대립을 자연스러운 법칙으로 인식한 그는 "너무도 희박한 공기 속에" 살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결국 울음과 웃음이, 환멸과 고통이 가득 찬 현실사회를 위해 과감히 그 성소를 떠납니다. 데시뇨리의 아들 티토의 가정교사를 자청함으로써 속세에의 봉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온실 속의 카스탈리엔 사람이, 현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얼마나 '유리알 유희'를 연주할 수 있을지, 또 양(陽)의 극은 음(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은근히 가슴이 조여듭니다. 하지만 이 작품 서두에서 운명처럼 찾아온 음악의 노대가와 함께 바흐의 '푸가'②를 연주할 때의 소년 크네히트를 보면서 '카스탈리엔'의 입문을 예감하였듯, 그 곳을 넘어서는 이 장에서도, 자유롭게 변주되던 푸가의 두 선율이 마지막 마디에서 완전한 화음을 이루듯, 장쾌한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문득 소설『장미의 이름』⑶에 나오는 '호르헤' 신부가 떠오릅니다. 중세 기독교의 절대 진리에 갇혀, 인간적인 행복의 상징 '웃음' 때문에,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도 파멸시킨 신부였습니다. 크네히트는 그와 달랐습니다. 카스탈리엔 정신의 진정한 의무는 세상의 온갖 삶과 화해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사에 그리 너그럽지 못한 저 자신의 삶을 여러 번 반추해 보았지요.

이 소설을 두고 여러 평자들은 말했습니다. 헤세가 찾은 삶의 지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나 전일(全一) 사상이라고. 그런데 저는 왠지 화엄(華嚴)이라든가, 중용(中庸)이란 말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즉 세상 어느 것도 독존이 아닌, 양극도 아닌, 무한히 변화하는 전체 속에서 나와 너들의 공능(功能)을 서로 주고받으며 화해롭게 상생하는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 '중용' 이란 생각이 듭니다.

역시 놀라운 것은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 크네히트의 죽음입니다. 그가 세속에서 봉사를 시작하는, 제자 티토와 만나는 첫날입니다. 동지와 하지의 가운데인 가을, 낮과 밤의 중간인 이른 새벽, 산세가 험한 높은 골짜기,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맞으며 넋 나간 듯 추는 티토의 춤, 명암이 교차하는 얼음처럼 차가운 산간호수에서 헤엄치는 제자와 스승, 그리고는 전설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크네히트. 한 판의 내림굿이 연상되는 사위에 저도 혼이 빠진 듯 얼떨떨할 뿐입니다.

우연일까요. 신의 소명일까요. 진정 헤세가 말하고 싶은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인공이 현실과 이상의 가교를 어떤 모습으로 놓을지 무척 궁금하였는데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의 질문에 헤세 자신은 그 죽음을 "용감하고 기쁘게 성취하는 희생"이라 말하였지만, 여러 논자들 역시 "희생과 봉사의 극치" "단계적인 상승" "정신적 승계"라고도 하였지만, 그러한 말들이 제 가슴에 그리 와 닿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적이 고대 샤머니즘적이라 느껴지는 이 죽음에 대해, 제 여력이 미친다면 한 번 더 붓을 들어볼까 합니다.


4. 색향미(色香味)를 찾아서

초의스님은 그의 저서『東茶頌』⑷에서 차나무를 일러 남녘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나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선인이나 귀신과 사람 모두 차를 사랑하고 중히 여긴다고 읊었습니다. 삼매경의 솜씨로 차를 달이면 묘한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나고, 그리고 그 차를 고즈넉한 마음으로 즐겨 마시면 뼈마디와 가슴 속이 맑고 시원스럽다고 노래하였습니다. 하여 예로부터 좋은 차는 '가인(佳人)과 같다' '군자(君子)를 닮았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차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였습니다.

순하고 맑은 향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진향(眞香)의 차 한 잔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다경』에는 차를 만드는 데 아홉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차를 따고 가리고 덖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차 달이기에서도 차와 불과 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의스님은 참된 차는 물, 불, 차의 아우름에 있어서 '중정(中正)'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던가 봅니다. 음료의 하나인 차, 그것을 매개로 하는 차살림, 차 한 잔의 그윽한 색향미를 만나려는 그 길은 바로 수행의 과정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즉 진선미를 추구하는『유리알 유희』의 '중용' 정신과 다를 바 없겠지요.

문득 제가 20여 년 전, 차의 세계로 입문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느 봄날 햇차 서너 종류를 구입하였습니다. 맛과 특성을 알고 싶었습니다. 숯을 피워 불기를 살피고, 저울의 금도 보았습니다. 물의 온도를 내리고 올리기도 했습니다. 화로, 주전자, 찻잔 책들이 온 방 안에 널브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차는 싱겁기도, 풋내가 나기도, 쓴맛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 마침 시골에서 와 계시던 친정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한참 이 광경을 보시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던진 한마디는 "자∼알 논다"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선생님. 저 유연한 시공을 펼쳐주는 차의 세계는, 게으르고 헐렁해진 제 중년 이후의 삶에 생기와 탄력을 부여해준 놀이터였다 할까요.

그 곳에서의 노닒은 때때로 새로움과 자유를 맛보는 순간이었고, 무수한 고독과 번뇌의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위로받고 쉼을 얻는, 제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오월의 나뭇잎 같은 생생한 유희었다 말하고 싶군요.


5. 유리알 유희

… 그리고 이제 심정 속에선
벌써 몇 년째 마음을 기울여 온
사유의 유희가 시작된다.
유리알 유희라고 불리는,
구조는 음악이요
바탕은 명상이어라
훌륭한 착안이.
요젭 크네히트는
내가 이 멋진 상상으로 인해
덕을 입고 있는 명인
즐거운 세월에
그것은 내게 유희이고 행복이며,
고난과 혼란의 시기에
그것은 내게 위안이고 사색이니,
여기 불가에서 체를 치며
나는 자주 연주한다 유리알 유희를,
비록 이제까지 크네히트처럼은 아니지만
….

헤세의 시 '정원에서의 시간들'을 음미해 보았습니다. 그가 테신 산간마을 몬타뇰라의 전원에서 낙엽을 태우고 화단에 쓸 거름흙을 만들면서 남긴 시라 하지요. 그에게는 온갖 사색과 성찰의 유희가 쉼 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유리알 유희'가 사유의 유희라는 것을 쉬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노라니 왠지 제 머리 속엔 온갖 형상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 상들이 제 나름대로 삼매경에 빠진 모습과 그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음률을 듣기 위해 마음을 모았습니다. 생명을 다할 정도로 자기 믿음에 대한 봉사와 희생, 그 경지가 바로 최고의 진이고 선, 미이며 예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호는 언어로 해석될 때만이 기호로서 가치가 있다"라는 롤랑 바르트⑸의 말에 힘입어, 홀연 떠오르는 여러 상(像)들을 언어로 그려보려 애썼습니다.

온 마음으로 차를 달이는 여인이 아름답다! 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한 눈을 지그시 감고 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사를 떠올려 봅니다. 기사(棋士)들이 장고를 거듭하며 바둑판 위에 한 수 한 수 흑백의 돌을 놓는 엄숙한 대국, 불가에서 행하는 경건한 선의식(禪儀式)도. 또한 『역(易)』⑹의 괘를 나열하면서, 세상 어느 것도 한 순간 그대로 머물지 않는, 이 우주의 변화 법칙을 알기 위해, 아득한 옛날 복희, 공자가 바친 엄청난 사색의 유희도 한번 생각해 보았지요.

소설의 주인공 크네히트가 중국학자 '노형(老兄)'이 사는 죽림 속에서 몇 달을 보낸 것을 선생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붓을 씻고 먹을 가는 연습을 합니다. '시경(詩經)'을 읊고, 쑥대를 세면서 '역'을 공부하고 또 차 끓이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훗날 그는 그때가 "자기 각성의 시초"였다고 회고합니다.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또한 그가 노형에게 역경의 체계를 유리알 유희 속에 끌어들였으면 좋겠다고 한 구절에서는, 문득『다경(茶經)』⑺에 나온 풍로에 그려진 물고기, 범, 꿩이 생각났습니다. 물고기는 주역의 괘(卦) 중에 물을 나타내는 감괘(坎 · ), 범은 바람인 손괘(巽 · ), 꿩은 불인 이괘(離 · )를 상징하는 동물들입니다. 바람은 불을 일으키고 불은 찻물을 끓임으로써 세 가지 괘를 갖추게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중국인 집 유희"에 시선이 멎었습니다. 크네히트 창작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의 철학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 역시 분위기만 있을 뿐 묘사는 없습니다. 그 경내에 제 나름 '차'의 의미를 대입시켜 봅니다. 제8장 '양극'의 본문 한 대목을 그대로 옮기고 곳곳에 괄호를 칩니다. 첫( )안에는 물고기·범·꿩을 그려 넣습니다. 그리고는 제목을 '명선(茗禪)'이라 하였습니다.


6. 茗 禪

" … … … 유리알유희 명인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듯, 정결함과 지성과 품위의 빛을 발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축제장에 나타난다. 유희의 작품을 한 막 한 막 의식에 알맞은 동작으로 시작한다. 반짝이는 금붓을 들고 뒤에 있는 자그마한 흑판에 기호 ()를 하나씩 그려 나간다.

그러자 같은 기호와 유희기호 ( · · )가 백배로 확대되어 이내 뒷벽의 큰 흑판에 나타난다. 나직한 수많은 목소리가 그 뒤를 한 자 한 자 따라 읽어간다. 대변자가 큰 소리로 그것을 (이것은 茶의 성인 육우가 제작한 풍로 안, 세 개 칸막이에 한 마리씩 그려놓은 기호이니라. 바람은 불을 일으키고, 불은 찻물을 끓이노라. 차 달이는 요지는 불 다스림이 먼저이다. 불기운은 약하지도 세지도 않은 中和를 이루어야 하느니라. 묘하고 참된 차를 얻으려면 물과 차의 아우름이 中正을 잃지 않아야 함이라. 차끓임을 의미하는 물고기, 범, 꿩은 바로 균형과 조화인 中庸의 세계를 이름이니라) 읽으면, 라디오는 국내와 전 세계에 이를 전한다.

제1막 끝머리에 이르자 그 막을 총괄하는 법식 (茗 禪)을 마술처럼 흑판에 써 보이고는, 우아한 모습으로 명상의 규정을 표시한 뒤, 붓을 놓고 자리에 앉아 모범적인 태도로 명상의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 회장에 앉아 있던 사람이나, 세계 각국에서 유리알 유희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조용히 앉아 명상에 들어간다. ……"


7. 놀이하는 인간

큰 소리는 들리지 아니하고, 큰 모습은 형태가 없고, 큰 도(道)는 숨어 있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노자(老子)'⑻의 말이 생각나, 저는 이 가당찮은 놀이에 그만 머쓱하였습니다. 하지만 헤세의 사유(思惟) 범주와 우리 차의 미학(美學)을 합일시켜 보는 그 유희 자체만으로도 남모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유희를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만이 세상 온갖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정의한 어휘들이 많습니다. '생각하는 인간' '만드는 인간' '직립 인간' 등. 저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⑼이라고 한 J. 호이징하의 말에 공감합니다. 그는 인간 두뇌활동 전체가 고도의 유희이며,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8. 선의식(禪儀式)의 미학

'유리알 유희'가 정신적 유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본문 중 크네히트 제자가 남긴 '유희' 고찰 기록은 한번쯤 새겨 볼만 합니다. 일부를 간추려 옮깁니다.

"… 유리알 유희는 자기감정을 집중시킨 일종의 정신 훈련이었다. 그 내용은 종단의 법칙에 따르고 명인에 의해 전수된다. 그 유희가 종단의 정수로 자리잡게 된 배경은 먼저, 고대부터 좋은 음률은 마음의 균형에서 생긴다고 한 음악성을 중시하였고, 철학적 사고로 이끄는 수학의 발달, 또한 동방순례자의 지혜에서 얻은 한 방울의 기름이었다. 유리알 유희는 정신과 예술의 생생한 미(美)를, 정밀하고 엄격한 규범의 신비적 힘과 결합시키려는 꿈이었다. 그 본질은 인간의 비극성과 운명을 긍정하는 것, 또 그 운명을 명랑하고 우아하고 침착하게 초인적으로 극복하여, 우리생활에 밝게 울려 퍼지게 하는 것……."

돌아보면, 20세기 중반 유럽의 문예사조는, 19세기 말에 시작된 상징주의(象徵主義)⑽가 한때 만연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잡문' 시대에 무참히 짓밟히는 인간 존재의 문제들을,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에 대한 내적 성찰로 구원하려 했던, 또 그 주제를 신비로운 상징적 언어와 예술성으로 표현하려 했던 시대라고 사가들은 말합니다. 소설『유리알 유희』에서도 인간정신의 회복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 예술을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이르게 한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헤세에게 다가갈수록, 그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불교와 힌두교, 중국 고대철학 등, 동서양 인류 모든 종교와 철학을 두루 천착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노년에는 선불교(禪佛敎)에 심취했던 흔적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선종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책『벽암록』⑾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고,「좋아하는 책들」에서는 "지금까지 민족들이 얻고자 추구해 왔던 것 중에서 禪이 최고의 보물 중의 하나"라고도 하였습니다.

차가 발전한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부터 대체로 차는 초옥의 선비나 선승들과 깊은 관련을 맺어왔다고 합니다. 정성껏 차를 만들고 달여 부처님 전에 바치고 이웃에도 돌리며 자기도 마신다는, 이런 일들은 이미 선종(禪宗)의 승려들이 늘 해 오던 일종의 수행법이며, 그 과정의 엄숙한 예(禮)는 자성(自性)을 발견하고 불생불멸의 심경에 이르게 하는 선의식(禪儀式)의 일부였겠지요. 그래서 '차는 선(禪)이다', '명선(茗禪)이다' 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책머리에 "동방 순례자들에게" 바친다는 글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헤세에게 있어서 '유리알 유희' 개념은, 서구에서 한때 꽃핀 상징주의 물결을 타고, 동방의 심오하고 경건한 예배 즉, 선의식의 미학에서 그 착상의 실마리를 얻은 것이 아닐까요.


9. 내가 연주하는 유리알 유희

이미 토인비, 타골 등 세계의 지성들은, 20세기의 서구 물질문명 위기를 잇달아 경고했었지요. "기술 사회가 붕괴된 다음에야 비로소 정신적 부흥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위대한 광명이 반드시 동아시아부터 비쳐올 것이네"라고 쓴 게오르규⑿의『25시』를 읽으면서 은근히 고무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양권에서도 물(物)이 신(神)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제 썩지 않은 쓰레기가 산하에 가득합니다. 질보다 양, 느림보다 빠름은 미덕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복제 변형되는 생명들,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범죄들……, 두렵습니다. 농경, 산업, 정보화 시대는 물론, 동서양의 의식과 정서마저도 한 몸으로 껴안아야 하는 우리들, 너무 무겁습니다. 하여 환경만큼이나 짓눌리고 오염된 우리들 정서가 아닐까요. 저는 이 현실에 조화롭게 적응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가끔씩 차는 무엇일까, 내 혼을 지탱해주는 그 무엇일까, 오랫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던 저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문해봅니다. 차는 예(藝)다, 도(道)다, 선(禪)이다 라는 명쾌한 답은 제게 있지 않습니다. 또한 차의 본질이나 가경(佳境)을 언어나 문자로 완전하게 읽어낼 수 없다는 것도 절감합니다.

다만 차는 맑고 향기롭습니다. 또 정이 많습니다. 가끔 다향은 실바람이 되어 저의 아픈 가슴을 쓰다듬어 줍니다. 시심(詩心)을 일깨우고 생각을 넓혀줍니다. 그리고는 제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묻곤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순수와 진실, 그리고 화(和)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저는 때때로 차 앞에서 평상심을 얻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 세상이 좀더 환해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차와의 윤무(輪舞)로 하여, 제 스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유롭고 용감해진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러 다관에서 마지막 똑 똑 떨어지는 찻물방울, 그 향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제 가슴속 깊은 현을 건드리는 저릿한 울림입니다.

제가 연주하는 '차 유희'는 '유리알 유희'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 유희는 어쩌면 잿빛거품 그득한 세상과, 쉼 없이 파도치는 삶의 여정에서, 저 이상향 '카스탈리엔'을 바라보고 싶은 간절한 기도일지도 모릅니다.


10. 에필로그

그런데 선생님. 제 '유희'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크네히트의 죽음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만 말을 잃었습니다. 흔히 현자들이 '삶과 죽음이 둘 아니다', 죽음은 '불멸의 절대단계'라고 했을지라도 저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나치독일의 폭력, 그리고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는 뭇 인간의 속성을 훤히 꿰뚫어본 만년의 대문호 헤세는, 정신적 가치를 갈구하는 일부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마저도 모두 헛것으로 본 것일까요. 그래도 그가 동양의 지혜를 담은『유리알 유희』를 긴 문장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인류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었을까요.

헤세와 만난다는 것은 제겐 너무 벅찬 일임을 고백합니다. 그가 그린 수채화인, 녹색의 풀밭에 빨간 집, 테신⒀ 스위스 작은 마을을 보면서 찻잔을 들었습니다. 다향이 새롭습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는 듯도 합니다. 헤세에게 조금은 다가갈 수 있게 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2000년)



* 茶가 있는 에세이집 『빈 벽』 중에서 (2002. 범우사 刊)
* 헤세 도서관 사이트 내 '학술논문, 비평, 강연회 발표문, 독후감' 코너
* 『문학 웹진』 2003년 3월호 '이달의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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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설수(臘雪水)
수묵화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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