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묵화 한
점
- 이 진 영 -
그림을 그리려 한다.
먹을 갈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둥글게 돌린다. 먹을 갈고 있는 손끝 힘의 적절한 배분과 속도가 먹의 빛을
가름한다. 담묵(淡墨)을 위해서도 진하게 먹을 갈아야 하는 이유는, 물기와 혼합된 먹물의 농도가 먹의 빛을 맑고 투명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흡사
가벼운 일상의 한 부분이라도 진지한 마음가짐이 바탕에 깔려져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얼만큼의 물기를 간직하고 있는 붓끝에 조심스럽게
먹물을 묻혀본다. 서서히 배어 올라오는 검은 흔적. 방안 가득 솔향처럼 그윽하게 퍼지는 묵향(墨香). 하얀 화선지를 정갈하게 펼쳐놓는다.
화선지가 지닌 습기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서, 먹물이 자연스럽게 물기를 날릴 수 있도록 약한 바람이외는 방안으로 불려들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선풍기나, 강한 바람 그리고 지나치게 뜨거운 열기를 배제해야 한다. 그러기에는 주어진 공간에 익숙해짐과 참음이 필요하다.
전지(全紙), 반절(半切)지, 그 실제적인 크기보다는 더 넓은 듯한 공간을 달음질치고 싶은 마음은 서둘러 붓끝을 재촉하지만
서두르면 가지 않음만 못하다고 했다. 조용히 결을 다듬은 마음의 붓으로 조심스럽게 한 획 선을 그어본다. 적당한 습기를 포근하게 간직한 화선지
위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먹선은 살아 숨쉬듯이 꿈툴거리면서 산을, 구름을, 바람을 만든다. 아스름한 운무(雲霧)가 산허리를 두르고, 폭포는 하얀
포말(泡沫) 같은 물줄기를 솟구치듯이 떨어뜨리고 있다. 가파른 벼랑 끝에 홀로 선 소나무(孤松)는 여전히 꼿꼿한 자태를 접지 않고 있으며,
청아(淸雅)한 강물은 제 그림자를 안고 흐른다.
붓이 화선지에 오래 머물면 너무 많이 번져버려 제 형태를 가름하기 어려워진다.
너무 빨리 지나가면 갈라진 붓 사이로 하얀 빈자리가 들어선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머물 곳과 빨리 지나가야 할 곳의 적당한 판단이 필요하듯이 그
속도를 조절하기에 숙련이 필요하다.
그렇게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다본다, 푸른 나무를 몇 그루 더 심어
보기도하고, 투명한 물빛을 몇 겹 산허리에 두르니 계곡은 더 푸르고 깊어진다. 강가에 작은 집 두어 채 지어 신선인 듯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여름 한 철 머물러 보기도 한다.
이제는 조심스럽게 붓을 움직여본다. 손끝이 떨린다. 결코 지울 수 없는 먹선은 붓을 따라가며 한
폭의 山水畵 를 옮겨오고 있었다.
'없었던 걸로 하자고......' 가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함께 했던 시간도 나누었던
이야기도 모두 없었던 걸로 하자고 했다. 어느 유행가처럼,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리라.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지워버리고
그렇게 쉽게 자신의 그림을 구겨버리거나 지울 수 있는 이들. 나도 한때 어떤 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없었던 걸로 해요" 그와의 짧지
않았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다시 아무 것도 그리져 있지 않았던 하얀 공백을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그림 속, 그
붓끝이 심어준 나무는 뽑아버릴 수가 없었다. 흐르는 강줄기를 돌려놓을 수도 없었다. 산은 그 허리를 낮추라고 눈을 크게 뜨고 호령해도 결코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했다.
하얀 화선지 위에 먹물로 그려진 그림은 그 작은 흔적 하나라도 버리지 않는다. 화선지의 포근함은
언제나 먹기가 스며들어 그 기억들을 아름답게 번지나가게 만든다. 그리고 놓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이와 주는 이가 함께 만들어 가는 그림.
유화처럼 캔버스에 스며들지 않은 물감의 흔적들을 다시 긁어내어 지우거나 덧칠 할 수가 없다. 깊이 스며든 기억들은 쉽게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나는 화선지가 지닌 매끄럽지 않으면서, 습기를 머금은 따스한 성품을 좋아한다. 그리고 농묵과 담묵이 주는 그 수많은 단계를
좋아한다. 먹의 색이 단지 검은 색이라고만 여기는 이들은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사이의 그 수많은 단계를 헤아리지 못한다. 사랑과 미움 사이의
수 많은 갈피 속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존재하고 있음을 미쳐 알지 못하는 것처럼.
색채가 주는 화려함에 미치지 못할지는 몰라도,
물기와 먹빛이 어우러져 내뿜는 미세한 차이로 인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없던 걸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그림. 구겨 태워버리거나, 찢어서
버리기 전에는 그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수묵화 한 점은, 진정 나의 삶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오늘도 나의 화판에는, 소심한
마음의 밑그림 위에 조심스런 붓자국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색채를 담았던 형태가 사라진다해도 먹(墨)선이 남긴 흔적은 천년이 지나가도 누렇게
빛바랜 시간의 화선지 위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