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길의 길따라 글따라
단양에 갔었다.
지난 해 봄, 어머니 생신을 단양에서 가족모임으로 가진 이후
두 번째 길이었다.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여행 삼아 다녀왔다.
가는 길이 경치도 좋은데다 기차도 깨끗하고 안락하여 기분이 참 좋았다.
사실은 그냥 경치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정한 것이 있어서였다.
퇴계 이황 선생과 관련이 있었다.
얼마 전 출장길에 공항 서점에서 우연히 퇴계선생에 관한 책을 골라
여행 내내 읽게 되었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선생을 직접 뵌 듯 기뻤다.
선생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다.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되
선생의 인간적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마흔 여덟의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했다.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떠나보내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살아가던 퇴계는
그곳에서 뜻밖에 설중매(雪中梅)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 두향(杜香).
그는 관기(官妓)였다.
시와 서와 가야금에 능했으며, 난과 매화를 좋아했다.
퇴계를 만날 당시 두향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퇴계가 풍기군수로 옮겨 가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9개월 만에 끝이 났다.
두향은 퇴계가 떠난 후 그와 노닐던 강선대(降仙臺)에 초막을 짓고 수절하며 지낸다.
그로부터 20년 후, 안동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지도하던 퇴계가 세상을 뜨자
두향은 그곳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강에 투신한다.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가다 보니
단양팔경 중 하나인 구담봉 건너편 산자락에 두향의 묘가 있다.
원래는 강선대 밑에 있던 것을 댐을 건설하면서 위로 옮겼다 한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주었네.
- 임방 <수촌집>
꽃다운 두향을 두고 홀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퇴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직접적으로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퇴계의 많은 시 속에 등장하는 매화들을 보면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두향을 그리워했음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밤이었다.
두향이 퇴계에게 묻는다.
“나으리는 봉원사의 범종(梵鍾)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들어보았느니라.”
팔베개를 하고 있던 퇴계가 두향을 보며 대답했다.
그 종은 세조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등에 종창이 나 고생이 심하였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신하들을 물리고 계곡에서 홀로 종창을 드러내고 씻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승(童僧)이 거들어 주었다.
“너는 임금의 종창을 보았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임금께서도 여래불(如來佛)을 보았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씻은 듯이 종창이 나았다.
고마움을 느낀 세조는 근처 봉원사에 가장 소리 좋은 범종을 안치할 것을 명하였다.
어느 시골에 있는 절에서 당대 최고의 범종을 발견하였다.
무려 800년 된 종이었다.
“하오면 범종이 어떻게 왔는지도 들어보셨는지요?”
두향이 다시 물었다.
범종을 옮기는 것은 국가적인 대역사였다.
그런데 고개를 넘던 범종이 느닷없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종을 옮기던 수십 명의 장정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동네 노인이 말하였다.
“한낱 미물이라도 정이 있는 법인데, 한 곳에서 800년이나 지낸 종이
제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데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종의 젖꼭지 중 하나를 떼어내 원래의 절에 안치하고 나자 종이 움직였답니다.”
두향이 스스로 답했다.
마지막 밤이건만 두향은 너무도 침착했다.
그리고 가슴에 품고 있던 은장도를 내어 놓았다.
“나으리, 저에게도 그리 하여 주십시오.”
퇴계는 조용히 일어나 은장도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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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에서 달밤에 매화를 노래함>....이 황
홀로 기댄 山窓에 밤기운 찬데
매화 가지 끝에는 둥근 달 뜨네.
이제 다시 미풍이 불어오지 않아도
맑은 향기 스스로 온 뜰에 가득해라.
나막신 끌며 뜰을 거니니 달이 따라오네
매화 곁을 돌고 돌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날 줄 모르니
향기는 옷에 배고 그림자는 몸을 덮네.
늦게 피는 매화의 참뜻을 깨닫노니
추운 때를 겁내는 내 몸을 아나 보군.
어여뻐라, 이 밤에 내 병이 낫는다면
밤 새도록 달빛 아래 바라보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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