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족
조 한 금
세월이 화살 같다더니 한해가 사흘 남았다. 돌아보면 내겐 그 어느 때 보다 의미가 깊은 한해였다. 집시 같은 마음의 방황을 끝내고 이제야 마지막 이사(?)로 안착을 했다. 초가지붕으로 비가 새어들면 윗목에 받쳐놓은 그릇에 떨어지는 누런 낙숫물 소리로 잠을 깨곤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그 가난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지 실로 50년 만이다.
신접살림을 차린 이후 이사를 무척이나 다녔다. 심지어는 6개월 살다가 이사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이삿짐 싸는데 이골이 났고 남편은 퇴근하면서 집을 물어 찾아들 때도 있었다. 아이들 기죽이지 않으려고 전셋집으로 옮겨 다니느라 수없이 쌌던 보따리, 아마 스무 번은 좋이 넘으리라.
등 따시고 배부른 그 원초적 본능을 목표로, 잘 먹고 잘살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살아온 세월이니 집 없는 설음 그 한을 내 손으로 푼 감회가 남다르다. 이젠 누가 대궐을 준다 해도 더는 이사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어본다.
하루 종일 빛이 드는 남향집이다. 18층 꼭대기에 올라앉았으니 꽤 높은 자리에 오른 셈이다. 사방이 막힘없는 공간에서 천기를 마시며 길게 심호흡을 해본다. 공기가 맑다. 밤이면 무수한 별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밤새 깜박이고 그 별들은 비가와도 숨지 않는다. 고즈넉한 새벽에 도로를 흐르는 은하수도 본다. 내 발아래 풍경이다. 도시에 살면서 이만한 풍경 만나기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나에게는 고진감래요 조삼모사다. 이제 어엿한 내 방이 있고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나만의 서재도 있다. 나는 마음 놓고 나를 불러내 마주앉아 새벽까지 대화한다. 그리고 아침이면 베란다에 나가 식물들과 교감한다. 베란다 한켠에 미니정원을 꾸며놓고 한눈에 사계절을 만나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그 또한 신선놀음이다.
한겨울인데도 나의 뜰은 가을이 한창이다. 미니정원의 작은 은행나무가 샛노랗게 물들어 있다. 길거리에서 주워와 화분에 묻은 은행이 싹터 우북하게 자랐는데 그것도 함께 물들어 귀물이 되었다. 샛노란 은행잎과 어울린 시클라멘이 진홍과 진분홍, 흰 빛깔로 피어 마치 화사한 공단 옷을 입은 듯 아름답다. 돌확에서는 물의 낙차로 수련이 맴을 돌고, 그 주변을 굽어보는 호접란이 공중에서 나비인양 날갯짓을 한다. 영산홍이 족두리 꽃과 어울려 이른 봄 정취도 느끼게 하고, 거제도에서 씨를 주워와 화분에서 싹틔운 동백이 30cm쯤의 키로 베란다 창문 밖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고 섰다. 이렇듯 식물들의 사계를 한 공간에 거느리고 사노라니 일만 근심이 순간에 녹는다. 여기까지 오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한발 지각해 물든 은행잎이 귀하고 아름답듯, 뒤늦게 마련한 쉼터가 내겐 소중하다.
질 좋은 삶을 지향하며 전원에 사는 사람들을 웰빙족이라고 한다던가. 공기 맑은 곳에서 유기농의 농산물을 먹으며 쾌적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요즘은 부자로 사는 것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어 웰빙족들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란다.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자칭 웰빙족이다.
우리는 벌써 5년째 제초제나 비료 농약 없이 직접 농사지은 유기농 쌀로 밥해 먹고산다. 그 달달하고 맛있는 무공해의 옛날 밥맛을 무엇과 견주겠는가. 음식에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양파로 조리하며 포도주는 직접 담그고, 딱딱한 견과류를 즐겨먹으며, 음료수대신 맹물을 먹는 까다로운 입맛이 웰빙인 것이다. 천연의 멋과 맛을 즐기는, 그래서 정신마저도 천연이기를 희망하니 그 또한 웰빙이 아니겠는가.
대저택이 아니어도 좋다. 이 정도면 족하다. 우선 보잘것없는 내게 이 만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불만이 있어도 참고 지켜봐 준 남편과 식구들이 고맙다. 또 정말 볼품없는 나를 믿어주고 아끼고 사랑하고 인정해준 많은 분들, 문우, 친지, 동료, 사원 등등 모두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다가오는 2004년은 두 천사가 땅에 머무르는 해라니 두 천사의 보호아래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작은 일에 감동할 줄 아는 감성이 살아있고, 부자가 아닌데도 마음이 부자여서 행복하며 모두가 콩 한쪽을 가지고도 나누는 이웃사랑이 있어 따뜻했으면 좋겠다. 나는 하느님과 땅의 두 천사에게 기도한다. 전 세계사람 모두 웰빙족 되게 해주십사고.
내 개인으로는 의미 있는 한해였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올핸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은 불운한 한해였다. IMF때보다 더 힘겨웠던 불경기며 터키의 지진참사 등 그 어느 해 보다 천재지변의 재앙이 지구촌을 강타해 입에 담기도 싫은 인재와 천재가 겹친 불운한 한해가 지금 막 저물어가고 있다.
“2003년이여 어서 가거라. 모든 액을 다 갖고 어서 물러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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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 강의
조 한금
무진장 고을, 전라북도의 남덕유산 자락에 있는 무주 진안 장수군을 통 털어 일컫는 지명이다. 6,25 이전 남도의 삼수갑산 이었던 이 고을을 나는 한 달에도 여러 차례, 그야말로 무진장 차를 몰고 다닌다.
핸들을 잡고 산길을 기분 좋게 달리노라면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에 흠뻑 도취된다. 가는 길목에 펼쳐진 개심촌 호수의 잔 물살 위에 반짝이는 황금 비늘이나, 앞산 준봉에 피어오른 신령님의 요 이불 같은 새벽 안개구름, 흰 눈을 덮고 누운 풀숲에서 이는 찬바람 내음도 다 내 것이다. 노후를 위해 연고도 없는 곳에 우연찮게 땅 몇 평 마련하고 조그만 조립식 주택 하나를 지어 가을걷이로 과수 몇 가지 갈무리하는 재미와, 계절마다 달라지는 산골 정취에 반해 주말이면 별러서 가곤 하는 곳.
오래 전 모 월간지의 여름 바캉스 별책부록에 비경의 마을로 소개된 장수군 천천면 신기마을이 집에서 불과 20여분 거리에 있고, 그곳에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도학자 J선생을 만난 것은 순전히 이웃집 아저씨의 소개였다. 마을 전체를 감돌아 흐르는 앞 내의 청정한 물소리며 갈 숲에 이는 바람소리마저 고즈넉한 산골마을을 우리 부부가 처음 찾았을 땐 검은 얼굴에 베레모를 삐뚜름히 쓴 도토리가 길섶에서 더 먼저 반겨주었다.
그 댁을 찾으니 5척 단구에 턱수염을 길게 기른 50대 후반쯤의 남자 한 분이 방금 목장에서 일하다 온 듯 목부牧夫 차림으로 한복 괴춤에 수건을 꿰찬 채 우리를 맞았다. 그는 사슴우리 앞으로 우리를 안내하고서 30여 년 전 풍수지리를 따져 남원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잡았으며 지금은 사슴사육과 한봉을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노라고, 상투를 튼 옛사람 모습의 자기를 소개했다.
우린 그 날로 둘째딸 시집 밑천을 위한 꽃사슴 몇 마리를 위탁해 사육키로 하고 그 댁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론 가끔씩 그 댁을 방문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곤 했는데, 그 날도 그 댁을 방문한 우리에게
“서울 모 전문대학에서 도덕 강의를 한 학기동안 해달라며 이력서를 써 오라는데 뭘 쓰지요?”
묻는다. 도학자 J선생은 그동안 우리 것만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소신껏 살아온 외길 인생이 드디어 인정받은 것에 대한 은근한 자랑과 함께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이력을 걱정하는 눈치다.
사회가 한창 어지러울 때, 모 사립대에서는 ‘큰 사람 바른 교육’ 이라는 실천방안을 들고 나와 모금하고 있는 때를 같이해 이뤄진 일이니, 어느 기업체의 ‘학력차별이 없는 사회, 세계일류가 되는 길’ 의 캠페인 광고도 한몫 한성 싶다. 어쨌건 대학에서의 파격적인 교수 기용은 우리 후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대단히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일요일, 사슴뿔을 자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녹혈을 마시겠다는 남편의 친지 몇 분과 함께 또 그 댁을 방문했다. 절각이 끝난 후 우리는 별채로 안내 됐는데 방안에는 조그만 흑판 하나가 장지문 사이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한 때는 마을 학당으로 사용했다는 방안에는 학동을 잃은 서당의 쓸쓸함이 배어있었다. 점심이 준비되는 동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그분과의 대화는 대학에서 강의했다는 음양 강의로 시작되었다.
세상 것 모두에는 음과 양이 있다. 하늘은 양이요 땅은 음인데,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것, 심지어 공기까지도 하늘의 혜택이고, 땅은 이것으로 만물을 소생시켜 양육해 내는데, 앞으로 도시의 그 많은 아파트를 철거할 때 썩지 않는 쓰레기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환경오염을 염려했다.
또,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인데 남아선호 사상으로 딸의 낙태를 일삼으니 성비性比의 균형이 깨져 걱정이라면서 지금의 이혼 풍조를 꼬집는다. 정신은 양, 육신은 음이니
“정신이 병들면 그것을 싸고 있는 껍데기인 우리 육신이 어찌 온전 하건능가요?.” 하며 웃는다.
그의 음양지식은 청산유수였다. 일찍이 원효대사가 스승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어느 날 동굴 속에서 잠을 자다가 하도 목이 말라 머리맡을 더듬어 물을 찾아 마시고 다시 잤는데, 아침에 눈 떠보니 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 속에 담긴 것임을 안 순간 그대로 토해냈다는 것이다. 모르고 마실 땐 아무렇지도 않던 물이 해골 속에 담겼었다는 생각만으로 토하게 된 것이니, 자기의 깨달음이 곧 스승이라 생각한 대사는 스승을 찾아가던 발길을 돌렸다며 “정신이 몸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우리에게 반문했다.
그는 계속해, 눈이 있으되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무엇을 봤는지 기억할 수 없고, 귀가 있으되 마음을 다하여 듣지 않으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조차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이라며 깨달음의 이치를 설명해 주었다.
철학은 양이요, 과학은 음이므로 동양의 학문은 통할 철哲자의 철학이요 서양의 학문은 나눌 과科자의 과학이니, 따로 따로 떼어놓고 내과 외과 하지 않느냐며 병원을 예로 든다. 그러므로 철학은 정신에 비중을 두고 있고, 그런 정신의 바탕엔 반드시 도덕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디 그 뿐인가. 조상은 양이요 자손은 음이니 수입을 3등분 해, 하나는 조상을 위해 쓰고 하나는 자신을 위해, 또 하나는 자손을 위해 써야 하나, 예전에는 분배의 잘못으로 조상한테 둘을 쓰고 자손에게는 별 혜택이 없어 자식들한테 원성을 들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자식에게 둘을 쓰니 조상의 불만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일수록 잘못된 교육으로 자기만 아는 이기심이 커져 자칫 패륜행위까지 저질러 결국은 파멸을 초래하게 된다며, 대학교수가 친부를 살해한 사건을 예로 들어 효 사상이 결여된 요즘 세상을 한탄했다.
또 사랑은 양이요 금전은 음이란다. 금전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게 되지만, 사랑이 없으면 나눌 줄 모르니 나누지 않은 금전은 무슨 소용이 있느냔다. 운수는 양이요 노력은 음으로, 모든 사람이 노력한 대로 다 잘 산다면 어찌 못 사는 사람이 있겠느냐면서, 노력 보다 앞서는 게 운수인데 이 운수는 반드시 적덕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수입은 양이고 지출은 음인데 분수를 모르는 지출은 지식이 허한데서 비롯되고, 공부는 양이고 사업은 음인데, 공부한 머리가 있어야 지혜를 짜내 사업을 잘 할 수 있다는 얘기에 우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음양 강의는 계속 되었다. 땅은 음이나 다시 구분한다면 동양은 양이요 서양은 음인지라, 동양에선 글을 밑으로 내려쓰고 서양에선 옆으로 쓰니 그것이 합쳐져 열 십十자의 이치가 됐단다. 그래서 서양의 문물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게 마련이라며 우리의 것은 토양에서부터 음식까지, 사상에서 풍류까지 모두 우리 체질에 맞는 것이므로 후손들이 이런 걸 알고 지켜 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야기가 태극과 오행, 오음五音, 유불선儒彿仙, 정감록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데 점심준비가 다 됐다는 안채의 전갈에 중단됐다.
안채로 드니 푸짐한 음식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손수 심고 가꾼 무공해 채소에다 앞 내에서 잡은 다슬기 국, 산나물 무침 등 맛깔스런 천연의 귀한 것들이라니…. 식도락을 하는 도회지 남정네들의 찬탄이 그릇마다에 수북하게 담긴다. 산골오지에서 우리 것만을 고집하며 사는 그분의 생활이 우리에게 수구초심의 회귀본능을 더욱 자극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우리 교육의 이상적인 목표였는데 어느새 옛것은 모두 버리고 새것만을 좇아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그러나 이제라도 이런 분들의 정신적인 자산이 더 많이 상속되고 전수되어지기를 바라면서 대학 강단에 선 그의 상투머리와 그의 사상을 신세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하며 탕건 속에 얼비친 그의 상투머리를 한 번 더 흘끔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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