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억을 위한 비망(備忘) / 정일근
작성자 : 詩情
작성일 : 2001/08/28 09:02
조회수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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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가 돌아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은어가 돌아올 때를 나보다 내 몸이 먼저 느낍니다. 은어가 돌아올 때가 되면 내 몸의 밑바닥에서부터 물냄새가 납니다. 물 속으로 자맥질하던 유년의 강바닥에서 맡았던 내음 같기도 하고, 우물 속에 갇혔던 유배의 시간에 우물벽에서 맡았던 푸른 물이끼 내음 같기도 하고…. 발바닥에서부터 찰랑찰랑 고이기 시작하는 그 물냄새가 차곡차곡 온몸을 채우고 마침내 손금에서도, 손가락의 끝으로도 물냄새가 배어나기 시작하면, 내 사랑을 증언하는 그 작은 강으로 은어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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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컴퓨터 모니터 속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컴퓨터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를 빤히 지켜보는 저 운명의 눈.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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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유(回遊)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회유란 물고기들이 자신들의 일생을 걸고 바다와 하천을 찾아다니는 일을 말합니다. 물고기에게 회유는 타고난 운명입니다. 더욱 운명적인 것은 물고기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운명인 회유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 중국 상하이 남동쪽 바다에서 북상하는 노란 참조기떼는 우리 서해 부안 앞바다로 회유하고, 일본 규슈 남쪽 가까운 바다에서 태어난 정어리들은 홋카이도로 북상했다 우리 동해로 다시 남하한다고 합니다. 깊고 어두운 바다 밑에서 태어나 그 바다로 다시 돌아와 산란을 마친 뒤 죽는 뱀장어들은 20년 동안 회유한다고 합니다.
은어는 봄이 되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 알을 낳고 수정을 마친 은어들은 뼈와 껍질만 남아, 얼마전 자신이 힘차게 거슬러 올라갔던 물살에도 이기지 못해 떠밀려 가다 일생을 마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은어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와 저렇게도 아프게 죽어 가는 것일까요? 왜 단 한 번이라도 회유의 길을 이탈해 먼 바다로 숨어버릴 생각을 하진 않는 걸까요, 저 은빛 은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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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강가에 앉아서 죽기 위해 온몸으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를 보면서, 회유란 은어의 유전자 속에 봄이면 은어를 부르는 뜨거운 사랑의 약속이라고 은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은유를 하다가, 내게도 그런 운명이, 운명적인 사랑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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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작은 강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신라 서라벌이었던 경주에서 신화의 바다인 동해를 찾아가는 길에 만나는 고개인 추령을 넘으면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모여 작은 강을 만들고, 강물은 조용조용 바다로 흘러갑니다.
세월이 드문드문 말라버린 그 강을 사람들은 대종천(大鐘川)이라 이름합니다.
그 곳 사람들은 서라벌의 큰 종 하나가 그 강 속에 숨어 있다는 옛날 이야기를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강 속에 종이 숨어 있다니.
눈을 감고 물이 흘러가면서 종소리를 내는 강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종소리를 담은 물들이 흘러가 바다에 쌓여 만드는 장엄한 소리들을 생각해보세요. 강이 작은 소리로 우는 종이라면 바다는 그 소리들이 모여 내는 거대한 범종소리일 것입니다.
그 곳 사람들은 그 소리를 두고 '바다가 끓는다'고 말합니다. 바다가 운다, 라고 하지 않고 큰 가마솥에 물이 끓듯 종소리들이 바다에서 모여 댕댕댕 끓고 있다고 합니다. 귀로 듣는 소리를 눈으로 확인하려는 무지한 사람들이 탐사대까지 조직하여 그 종을 찾아나선 적도 있지만 종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여전히 바람이 부는 날이나, 태풍이 몰아치는 밤에는 종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4월이 오면 그 끓는 바다에서 겨울을 보낸 은어들이 대종천을 찾아옵니다. 아마 그곳 은어들에게 회유는 서라벌의 종소리를 찾아오는 회향일 것입니다. 은어들은 그 종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 이 작은 강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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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의 맑은 눈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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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들이 돌아오는 길을 따라 서라벌을 찾아가다 보면 동서 쌍탑만 남은 절터를 만나게 됩니다. 그 절터가 감은사터입니다.
처음 감은사터를 찾았을 때 은어가 돌아오는 물냄새를 맡았습니다. 내 코를 의심했으나 분명한 물냄새였습니다. 사막의 낙타가 본능적으로 물냄새를 맡듯이, 그 날의 물냄새는 내게는 본능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냄새가 나는, 그리운 쪽으로 자꾸만 귀가 열렸습니다.
이 절터와 나는 어떤 운명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요. 동서 쌍탑 사이를 거닐며 운명의 답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이 날은 저물고, 탑과 탑 사이로 만월이 찾아왔습니다. 달이 지나가며 내 발 앞으로 탑의 그림자가 길게 만들어줄 때 문득, 탑의 돌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예감이 엄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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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돌 속에 신라여인아, 네가 남긴 따뜻한
사랑의 체온 한 웅큼, 아직도 남아 있을 것 같다
탑을 바라볼 때마다 불가사의한 사랑
천 년을 몸 속에 담고 나는 너를 따라
너는 나를 따라 윤회해 온 사랑의 유전자가 되살아나고
그날 동해로 달아난 감은사 목어가 대종천을 타고 올라와 운다
법고 운판 범종이 덩달아 깨어 운다
절은 이미 이름만 남기고 무성한 풀 속으로 사라지고
순금으로 빛나던 사직도 흙 속에 묻혀 잠들어 버렸는데
사랑아, 너는 어느 세월 이곳에 머물다 갔느냐
또 지금은 꽃과 별, 그 아아득한 무엇으로 윤회를 되풀이 하며
이 쓸쓸한 일몰의 절터로 나를 찾아오고 있느냐
동해에서 떠오른 붉은 달은
서쪽 기림사를 찾아가다 탑 속으로 숨어 들고
기다려 다오 기다려 다오 사랑아
내 사랑은 저기 저 따뜻한 돌 속의 신라여인
오늘 밤 내가 탑 속으로 돌아간다
내 속으로 내가 돌아간다
-시 '감은사지·2'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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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감(旣視感)이란 말이 있습니다. 현재 보고 있는 것이 이전에 보았거나 체험한 것 같지만 그것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기시감이라 합니다.
만월이 있는 감은사터의 밤은 저에게 기시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학자들은 기시감을 기억의 오류라고 분석하지만, 나에게 그 기억은 내 전생을 찾아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아무리 두드려봐도 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문 뒤편에 누군가가 서있을 것이라는 예감. 물컥 물냄새가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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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마당이 보이고 그 마당에는 탑이 서 있습니다. 탑에는 풍경들이 달려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댕그렁 뎅그렁 풍경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탑을 돌고 있습니다. 나는 자꾸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은어의 눈 속을 들여다보지만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워 소리를 질러보지만 이미 목은 깊이 잠겨버렸습니다. 어느새 나도 우물 속에 갇힌 느낌입니다.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나 우물 속에 갇힌 내가 보이지 않는지 안타까운 눈빛입니다.
은어가 돌아올 때면 내가 자주 꾸는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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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옹관 속에 웅크린 천 년 잠들이
붉은 시간을 굴리며 찾아온다
둥근 시간의 집을 굴리며 감은사로 온다
감은사에는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고
삶과 죽음이 맞닿아 하나가 된다
굴러가는 시간의 저편으로 절은 세워졌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세워진다
감은사에서 오늘을 말하지 마라
흙은 불에 구워져 옹관을 만들고
다시 부서져 흙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담았던 그 흙 위로
또다시 풀은 자라고 풀꽃은 핀다
감은사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탑은 아니다
탑은 그냥 서 있고 시간은 사라진다
시간이 집을 만들고 사랑을 만들고
시간이 집을 허물고 사랑을 깨트려 버리고
작은 금 사이로 사라진다
시간에 갇혀 흘러가는 사람들을 두고
감은사는 천 년째 그 자리에 서 있다
-시 '감은사지·10'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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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전생이 있고 그 전생에는 잊지 못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을 위해 윤회하는 사람들에게 전생에서의 사랑은 잊어버리게 만들어 버리지만 핏속 유전자 속에 스며든 기억은 지우지 못하나 봅니다.
4월입니다. 그 작은 강으로 은어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내 몸에서 다시 물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 정일근 시인의 산문-그 기억을 위한 비망(備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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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도 어김없이 음력 칠월, 기망 붉은달이 감은사 빈 절터위로
두둥실 떠오를 무렵..발목에 와닿는 무성한 풀들의 감촉을 느끼며
또 하나의 무엇과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낭랑한 소리로나마 그 빈 절터를 깨울 수 있게 되기를..천년 전
그 유사의 행간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다시 그윽히 깊어진 나를,
너를 더불어 우주를...
아, 이 고즈넉함을 뭐라고 그래야할까요...;;
from 폭포수 詩情 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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