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환의 수필 강좌]
* 수필의 형상화 방안 / 정주환
형상화란 무엇인가? 형상화를 설명하기 전에 상(象)에 대하여 설명하다 .상(象)이란 하나의 이미지 또는 그림자다. 그리고 형상화란 그 그림자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십자가가 그 상이라면 불교는 염주가 그 상이 된다. 그리고 그 상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형상화다.
글이란 특별한 생각을 담아 놓은 것이 아니다. 최초의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또 세상의 근본 원리들을 통찰한 것, 그것이 바로 글이다. 그러니까 글이란 세상을 통찰한 하나의 수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수필을 쓸 때는 마음을 풀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평이한 언어로 평이하게 서술하는 것이 바로 형상화의 첫걸음이다. 매끄럽게 잘 쓰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졸렬하고 미숙한 언어를 담아낸다는 마음으로 쓰면 된다.
글을 형상화시킬 때 상세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써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글의 형상화란 자신이 체험하는 것들을 작가의 의도대로 신축성 있게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보고 느낀 것들을 유효적절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수필의 형상화다.
아무튼 수필은 충분한 체험 대상에 대한 접근의 깊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체험과 그 깊이를 애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요, 관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애정, 그 관심을 통찰 또는 관조라고도 한다. 이렇듯 글은 이러한 심오한 작가적 관찰을 요구한다.
우리가 어떤 체험을 쓰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랑에 관해 쓰기 어렵고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해 있을 때는 그 처참한 상황을 쓰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 정감이 설익었기 때문이요, 아직 반성을 거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괴로움이 진정된 후에 다시 그 괴로움이 생각을 키우는 것, 그것이 정감이 익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과 오랫동안 희비애락을 나누어 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없으며 어느 지역으로 이사 가서 한겨울을 지내보지 않고 그 고을 이야기를 쓸 수 없는 것이다.
남녀가 애정에 푹 빠졌을 때는 그것은 감정이지 사랑은 아니며, 사람과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 다정하게 지내는 것은 호기심이지 우정은 아닌 것이다. 사랑은 열병 같은 애정이 식었을 때 그 남은 감정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우정은 오랫동안의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았을 때 우정이라 한다. 두보는 자식이 굶어 죽었을 때 결코 봉선영회(奉先詠懷)를 쓰지 못했다.
人間聞號兆 (문에 들어서니 목 놓아 우는 소리 들리고)
幼子息已卒 (어린 자식은 굶어서 이미 죽었더라.)
이 글은 이리저리 궁리하고 뜯어고치고 지우고 다시 덧보탠 글이 아니다. 그의 에너지가 고도로 충전된 상태에 있을 때 토로한 아픔이요, 그의 영혼이 밝게 숨쉬고 있을 때 한꺼번에 폭발한 절규다. 우리는 매일 매일 충실히 이행하는 작품 구상을 통해서 자신이 진실로 부르짖고자 하는 어떤 내용이 어느 날 순간적으로 폭발하게 된다. 두보는 자신이 오랫동안 죽어 버린 자식에 관해 가슴속에 떠오르는 대로 절규 같은 아픔을 간직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정신이 겨울처럼 밝게 깨어 있는 어느 날 생생히 살아 피 토하는 울음으로 나온 것이다. 두보는 그렇듯 자식을 잃고 가족을 헐벗겼으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가난을 지켰고 오직 시만을 위해서 일생을 보냈다.
1) 접합의 형상화
여러분들은 박지원의 양반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오늘날은 소설로 구분 짓고 있다. 그러나 연암이 그 글을 썼을 때는 문학의 장르 구분이 없었던 때였다. 말하자면 산문은 있었어도 소설은 없었다. 따라서 <양반전>은 수필은 될지언정 결코 소설은 아니다. 소설이란 말은 그 후에 문학 이론가들이 분류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썼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장안의 한 소년이 경주에 사는 아름다운 기생에게 홀딱 반했다. 이별에 즈음하여 기생은 믿음을 약속하는 물건으로 몸에서 한 부분을 떼어 내어 주길 바랐다. 소년은 머리를 잘라주고 또 이를 뽑아 기생에게 주고 서울로 돌아왔다. 뒷날 그 기생이 다른 남자와 좋아 지낸다는 말을 듣고 심부름꾼을 보내 이빨을 돌려달라고 하니 그 기생은 남자의 이가 든 포대 하나를 던져 주며 소년을 비웃었다.
기생을 아주 낮춰 보는 노 문관이 경차관으로 경주에 이르렀다. 부윤과 기생이 짜고 노 경차관을 시험해 보려고 어린 기생을 촌부로 변장시켜서 경차관에게 접근시켰다. 경차관은 그녀에게 홀려 밤마다 사랑을 나누었다. 어느 날 남편(관가 노비가 남편으로 위장)이 들이닥쳐서 당황한 경차관은 벗은 몸으로 쌀뒤주에 숨었다. 결국 남녀는 쌀뒤주를 동헌에까지 끌고 가서 경차관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
앞의 이야기는 태평한화 골계전에 나오는 <발치설화>(이빨 뽑은 이야기)요, 뒤의 것은 동야휘집에 나오는 (미궤설화(쌀궤이야기)에 전하는 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고대소설 (배비장전에서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두 이야기를 합성한 것이 바로 배비장전이다. (배비장전)은 판소리 각본을 소설화한 것으로 ‘평민문학의 성격을 띤 풍자소설의 백미’라고 평가되고 있다. 설화에서는 양반들이 우스운 인물로 등장하지만 <배비장전>에서는 비장이라는 중인계급의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고 있다. 실제 일반 백성들을 수탈하는 주역은 이들이 맡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계현 외 <이빨 뽑힌 사람, 옷 벗긴 사람>
옛 사람들도 이렇듯 설화를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해 냈다. 한편의 수필도 이렇게 두 개의 종자를 접합하여 새로운 씨앗으로 만들어낸다. 이것이 작가의 재치요, 기술이다. 그 재치와 기술을 다른 말로 수필의 형상화라 한다. 말하자면 종자의 배양이다.
2) 기복과 흥미의 형상화
수필 작품의 내용의 전개는 단순히 사건들의 연결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와 이야기 가운데 전개에 따른 기복이 있어야 하고, 분위기가 있어야 하고, 가락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 발전과정을 표현하는 그 본질적 특징이 있어야 하고, 그 특징에 따른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진실을 보여 주는 데 그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건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건이나 조직은 형상적 의의와 미학적 의미를 죽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수필작품의 사건의 전개는 단순한 사건 전개가 아니라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의 질서적이고 전일적인 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화나 묘사는 진실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을 쓸 때는 종자의 요구에 맞게 작품을 구성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종자에 맞는 내용과 형식을 취하여야 하고 그 전개도 철저하게 종자와 일치하는 개성에 따라야 한다. 구성이라는 것은 종자에 대한 요구를 찾았다는 의미이다. 만일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작품에 체현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직 종자에 대한 개성을 찾지 못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실로 성숙된 종자는 그 작품이 살아날 수 있도록 종자를 잘 형상화시켰다는 이야기며 그것이 완전히 부식되어 꽃이 피어났다는 뜻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주인공이 주인공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주변 환경이나 인물들과 부딪치며 얽혀나가는 이야기에서 나온다. 갈등이 없는 사건이나 갈등이 없는 이야기는 우선 흥미가 없다. 연속극에서도 독자의 인기를 끄는 것은 주인공이 처리해야만 하는 어려운 갈등에서 풀려나가는 이야기가 흥미가 있기 때문이다.
3) 주관적인 형상화
우리들이 역사를 기술할 때 어느 고을의 박 판서와 이 대감이며 큰 도둑, 작은 도둑 등을 다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록자 제 마음대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여기에서 제 마음대로라는 말은 일정한 룰이 없다는 말이 아니요, 기술자(記述者)의 관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기록자가 역사적인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때만 기록한다. 그러나 그 가치성은 사가(史家)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 가치란 하나를 들어 다른 백 가지를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역사란 전봉준이나 박정희의 한 개인의 기록에 불과한 것 같지만 한 국가의 역사가 되듯이 수필도 그것이 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문학이 되고 인류의 관심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수필이란 삼라만상을 다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설계에 의하여 어느 부분은 빼고 어느 부분은 보태어져서 나오는 하나의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것을 형상화라고 한다. 사가(史家)가 보태고 줄이는 가운데 역사를 만들듯 작가 또한 의도하는 바에 따라 삭제하고 보태어지는 가운데 작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작가는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모든 바닷물을 다 마셔보도록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찍어 맛보는 것으로도 다 알 수 있음을 깨우쳐 주는 존재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고 해서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평범하면서도 신비롭다. 누구는 평안하게 살다가 곱게 늙었고 누구는 고생 고생하다가 주름살투성이로 늙었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에는 일치한다. 그가 고관대작을 했거나 진흙 속에서 일생을 살았거나 죽는다는 사실에는 일치한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주 세세하고 자세하게 기록될 때 가치를 발휘한다. 문학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수필은 우리와 더욱 가까운 문학일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틀 속에 이것저것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찍어낸다고 다 사진이 아니듯이 문학도 마찬가지다. 렌즈의 초점에다 작가의 주관성에 의해 햇살을 모으는 일이다.
4) 이미지의 형상화
수필을 포함해서 모든 예술은 실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극단적인 사실주의를 배격하는 일이다. 문학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우리는 영화나 연극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배우들의 연기나 목소리가 어떻던가. 다시 말해서 일상의 사용하던 목소리던가, 아니던가.
그 음성의 톤이나 기교는 실제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배우들의 힘찬 목소리, 몸의 움직임, 얼굴 표정, 걸음걸이 등 일상의 행동이나 표정에서 볼 수 없는 무대 위의 몸짓들을 연출한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서둘러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옆에 놓고 하고 싶은 대사를 다한다든지 칼을 맞고 쓰러지면서 모션을 기이하게 쓰며 쓰러지는 행위 등은 모두 극적 몸짓이다. 그리고 웃음도 모양 있게 웃는다든지 발걸음도 특이하게 걷는 것 등 우리가 일상 쓰는 그러한 몸놀림은 아니다.
조각품에서도 그렇다. <사랑의 신 비너스>상이나 길거리 조각품을 보자. 거기에는 팔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가슴만 부각시키는 등 부자연스러운 것이 많다. 그것은 작가의 솜씨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미술도 실제와는 많은 거리가 있다. 아니, 어떤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정도로 회화되어 있다. 이런 것 등은 형상화와 이상화의 수법이요, 실제와 일정한 거리를 지니게 하려는 데서 나온 수단이다.
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시가 운율성을 굳이 강조한다든지 시조에 있어서 3장 6구를 고집하는 것도 그러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대화나 행동 묘사나 인물의 배치가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은 모두 문학적 형상화의 장치인 것이다.
수필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의상(意像)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시켜 놓는다. 우리가 손님으로 갔을 때나 손님을 대접할 때는 평소와는 다른 거리 있는 행동으로 손님을 모시듯 수필도 그렇다. 그것이 문학 작품이다. 그것은 자기 방에 켜진 등불보다는 ‘건넛집 등불’이 훨씬 밝게 보이고, 자신이 하는 데이트보다는 남의 데이트가 훨씬 아름다워 보이고, 자기 집보다는 남의 집이 월등 행복해 보이는 이치다. 아니, 신비감의 장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이미지의 형상화라 한다.
5) 무관성의 형상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러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여걸 황진이의 작품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두 동강 내어서 따뜻한 이불 속에 챙겨 두었다가 정든 서방님이 밤 깊어 찾아오시거든 그걸 꺼내어서 길고 긴 밤을 보내 보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호탕하고 쾌활했던 황진이는 과연 당시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그 당시 황진이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했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는 신분이 기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벽계수와 계약 결혼을 하는 등 윤리적인 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오늘날은 황진이를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재주에 반하여 사모의 정을 쏟는다. 이것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황진이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게 강하고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 못해 고고하고 청결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시간의 과거성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한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도 같은 이치다. 흘러가 버린 과거성은 모두가 이렇게 아름답다. 수절하지 않고 가출하여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함께 술을 팔며 바람 피웠던 탁문군(卓文君)도 아름답고, 악역을 담당했던 청춘 시절의 배반의 사연까지도 아름다운 것이다. 나와는 무관한 현상 밖의 일은 모두가 매력이 있고 아름답다. 험난한 죽음의 길의 고생이며 이웃의 불륜 사건까지도 흘러가 버린 과거 앞에는 아름답다.
모두가 문학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처럼 우리를 실제생활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기도 하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연을 작품을 통하여 보상해 준이다. 인간은 이처럼 보상심리에 가득 차 있다. 인생은 번민이고 무료이다. 설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때로는 여우나 귀신에게서 정을 기탁하기도 하고 아득한 환상으로 기탁하여 우리들을 그대로 기이한 한 송이 꽃과 무성한 들꽃에 파묻히게 한다. 그것이 문학이다.
이렇듯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글이 맛깔스러운 것은 인생이나 삶에 대한 담박하면서도 농밀함이 경쾌하고도 중후하게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6) 참신성의 형상화
많은 머슴들을 거느리고 사는 여주인이 있었다. 그는 닭울음소리만 나면 아직 어두워도 머슴들을 깨워 일을 시켰다. 머슴들은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닭을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여주인을 깨우는 것이 곧 닭이었기 때문이다. 닭을 없애 버렸더니 옛날보다 훨씬 더 고되게 되었다. 그것은 여주인이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되자 그 전보다 더 어두운 때부터 깨워 일을 시켰던 까닭이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다. 글이란 이렇듯 새로워야 한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우선 흥미가 없다. 밥 먹고 세수하고 잠자다가 책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누가 읽으려고 하겠는가. 어떤 사물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어떤 사건에서 전혀 새로운 참신성을 발견해야 한다.
한 예로 식물이라고 생각해 보자. ‘땅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나무와 풀’이라는 그런 단순한 생각이라면 문학이 될 수 없다. ‘인간과 같이 존재하면서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고 활력을 주는 존재’라는 식으로 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수와 거지의 공통점을 말한다면 똑같이 ‘사람’이라는 말 외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 공통점을 찾아보자.
첫째, 교수나 거지나 항상 손에 무엇을 들고 다닌다.
둘째,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셋째,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넷째, 얻어먹을 줄만 알지 대접할 줄은 모른다.
다섯째, 되기가 어렵지 일단 되고 나면 밥은 먹고 산다.
여섯째, 일단 되고 나면 전직(轉職)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발견이다. 단순한 통념의 사고에서 벗어나 공통점을 찾은 데서 우리는 어떤 신선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사물에서 새로운 인상을 찾아내는 것이 문학이다. 재미있는 수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사물의 궁극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 표피적인 것만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타인들의 눈은 흥미롭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의 눈은 따분한 것으로 여기곤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일상 통념의 것만 사고하는 바람에 신선감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 흡사 굶주린 허깨비처럼 밝은 동공의 시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넓은 마음으로 우리 자신 밖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7) 형상화에 있어서 시점
지금까지 시점은 소설에서만 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수필에서도 당연히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만치 화자나 시점은 작품의 내용, 즉 작품의 본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작품 속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자를 말하고, 시점은 화자가 어디에 있느냐를 따져서 하는 말이다. 요컨대 화자가 ‘보는 위치’ 또는 ‘관찰되어지는 지점’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점과 화자는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은 작가가 쓰지만 이야기를 이끄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작품 속의 화자(발화자)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은 작가가 아니라 바로 화자다. 화자는 작품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야기꾼, 즉 화자가 작품 속의 인물인 경우를 1인칭 시점이라 하고, 화자가 작품 속의 인물이 아닌 경우를 3인칭 시점이라고 한다. 1인칭 시점으로는 주인공(화자)이 얘기 속에 등장하여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하고, 주인공(화자)이 얘기 밖에 있어서,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1인칭 관찰자 서술이라고 한다. 그리고 3인칭 시점으로는 화자가 밖에 있더라도 이야기를 다 아는 듯이 쓰는 것을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하고, 화자가 관찰하듯이 쓰는 것을 ‘관찰자 서술’이라고 한다. 현대 소설은 화자가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얘기처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 다음 글을 한 편 읽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옛날에 아래윗집에 사는 총각, 처녀가 있었대. 김 정승네 김 낭자, 이정승네 이 도령, 두 사람이 열댓 살쯤 되었을 때, 말하자면 이팔청춘인 때였어. 여자가 좀더 조숙해서인지 정이 더 많아서인지 김 정승네 딸이 이 도령을 사모하게 된 거야. 초당에나 있고 보라는 책이나 볼 일이지 이 정승네 도령을 사모하여 과년한 처녀가 정을 억제 못하고 훌쩍 담을 넘어 이 도령 방에 떡 하니 와서 서 있네. 야, 이런 변고가 있나? 이 도령이 한참 생각하다가 훈계를 했대.
“양반 체면에 이런 방자할 데가 있나? 여자가 월담하여 남자 방을 틈입하다니……, 남자 방을 찾아다니는 여자를 누가 정숙하다 하라. 회초리가 있으니 맞으시오.”
찰싹, 찰싹, 찰싹. 석 대를 맞고 돌아온 처녀는 이 도령이 밉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갈래갈래 마음속을 헤매다가 끝내 죽고 말았네그려. 죽었다고 하니 이 도령 또한 심정이 오죽할까. 허 참 내가 너무 과했던가. 이러고 있는데 살며시 문이 열리고 죽은 여자가 들어오는 것 아닌가.
“호호호호 깔깔깔깔. 아이구 도련님이 여전히 공부하시는군요.”
밤새 이 도령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못살게 구는 것 아닌가. 밤이면 밤마다 이러니 이 도령은 빼빼 마르게 되었지. 결국 이 도령은 절로 피해 갔는데, 귀신이 그 곳은 못 찾았는지 나타나질 않았어. 살도 찌고 살맛 난 도령이 내일이면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날 밤 또 그 귀신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아이고 호호호호 깔깔깔깔.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네요”
이 도령은 밤새 시달려 또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려.
다음날 이 절의 중이 도령의 꼴을 보고 웬일이냐고 물어, 높디높은 산 위에 올라가 이러저러한 속얘기를 털어놓으니 이 중이 하는 말,
“야, 미친놈아. 굴러온 밤을 그리 회초리질하면 어떡하니? 제 발로 들어와 죽자 살자 사랑한다는 여자한테 회초리질이야? 에라, 이놈아! 내말 좀 들어 봐라. 내가 한번은 동냥을 갔다가 평소에 맘에 적어 둔 처녀가 동냥을 주러 나오기에, 발 동냥 말고 손목 동냥 좀 다오 하며 좀 완력으로 나서려고 하니, 아 이게 글쎄 앙칼지게 나서네 그려. 그냥 입막음하려고 칼로 찌르고 도망 온 나야. 그래도 이렇게 시치미 떼고 잘 살고 있다만. 나 같으면 회초리가 뭐냐. 어서 오십시오지. 바보같이 그 여자를 왜 죽여서 이 고생이냐? 쯧쯧…….”
“아이고, 동냥 주려던 그 처녀가 불쌍하지 않니?”
“불쌍하기는 나하고 살면 될 것을 그 짓을 하니 죽어도 싸지. 으아아악”
마지막은 죽는 소리였다. 분노한 도령이 이 땡초 중을 발로 차서 절벽 아래로 굴려 버린 것이다. 이래저래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와 누워 있으니 그날 밤 그 처녀 귀신이 또 오는데 이게 웬 걸 두 명이 오네. 하나도 힘든데 둘이라니, 이 두 귀신은 한참을 싸우더니 그 중 한 귀신이 이웃집 처녀 귀신을 올라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
“나는 죽은 땡중한테 동냥 주려던 그 처녀다. 그만 성가시게 하고 썩 물러가라.”
이렇게 해서 이 도령은 그 뒤로 귀신한테 시달리지 않고 잘 살았단다.
-교실 밖의 국어교육 <'내'가 귀신 처녀라면>
옛날이야기는 대부분 화자가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속내를 다 알고 있는 전지자적 입장에 있다. 그래서 대개 "옛날에 한 혹부리 영감이 살고 있었는데……”라는 식이다.
아무튼 <내가 귀신 처녀라면>은 김 낭자와 이 도령간의 못다 이룬 사랑에 대한 얘기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시점을 바꾸어 읽어 보자.
(1)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이웃집 낭자였다. 나는 너무나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2) 나는 이웃집 이 도령을 처음 본 순간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었다. 애타는 이 심정을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1)번은 화자가 이 도령이요, (2)번은 화자가 낭자다. 따라서 (1)번은 이 도령 자신이 ‘나’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때문에 이 도령 자신의 마음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그릴 수 있고,
(2)번은 김 낭자가 ‘나’가 되어 이야기를 해 나가기 때문에 김 낭자 자신의 처지를 실감 있게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도령이 화자라면 귀신에게 시달리다가 다른 귀신의 원수를 풀어 준 이 도령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겠고, 김 낭자가 화자라면 귀신 처녀의 입장에서 못다 이룬 사랑의 슬픔을 전개할 수 있겠다.
이렇게 시점은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 전반적인 내용의 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시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글의 주제도 달라진다. 왜냐하면 시점에는 지은이의 사상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음 예문을 읽어 보고 시점을 살펴보자
(1) 그녀는 먼 산을 바라본다.
(2) 울창한 숲이 빽빽이 서 있다.
(3)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4) 나는 네가 좋아.
(1)은 3인칭 시점의 서술이요, (2)는 3인칭인가 아니면 1인칭인가 하는 구별이 어렵다. 왜냐하면 “울창한 숲이 빽빽이 서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라고 하면 3인칭 서술시점이 되겠고, “거기에 울창한 숲이 빽빽이 서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라고 하면 1인칭 시점이 된다. 이렇게 화법의 전개에 따라 시점이 달라진다. 그리고 (3)의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이 생각나는 체험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1인칭 시점이 되겠고, 전달자인 ‘그’의 입장에서 보면 3인칭 시점이 된다. 또한 (4) “나는 네가 좋아.” 는 3인칭 전지자 시점에서 1인칭 주관적 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전달방식의 직접화법이냐 간접화법이냐에 따라서 시점이 달라진다. 요즈음에는 이런 시점을 넘어서 ‘말하기’가 강조되는 메타픽션적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작가가 중립적 화자만으로 작품의 진행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고, 다시 논픽션적 화자를 끌어들여 요약, 주석, 생략 등에 특별한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다. 따라서 하나의 작품에는 하나의 단일한 시점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의 작품에는 이중화자를 동원할 수도 있고, 일인칭과 삼인칭을 동시에 병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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