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은 봄 잔치
정영숙
겨우내 얼어붙었던 육체와 영혼에 봄기운이 살아난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 기운으로 땅 아래서 불을 지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따스한 물이 흙을 버물면서 출산을 하고 있는 이른 봄이 오면 어딘가에 나가고 싶다.
가을은 내가 문밖을 나가야 느끼는 계절이지만 봄은 내가 문을 잠그고 집안에 있으려고 해도 자꾸만 바깥에서 나와 보라고 부른다. 산이 부른다. 들이 부른다. 강물이 부른다. 바람이 부른다. 사람이 부른다.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고 유혹을 하며 부른다.
유혹에 우둔한 내가 봄이 오면 내 정신이 아니다. 그저 홀랑홀랑 흔들며 뛰어 다닌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만나러 가고, 꽃망울이 터질라 하면 터지는 모습을 보러 가고 , 터진 꽃임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면 미친 사람 웃듯이 웃으러 간다. 봄은 가식 없는 웃음을 퍼 올려 주는 두레박이다.
어머니의 고향을 난생 처음으로 찾아갔다. 어머니 어릴 때에 외할머니가 예수를 믿고 하인들에게 경어를 한다고 하여 시집에서 쫓겨나온 후 한 번도 찾아가보지 못했다는 고성군 하일면 최씨 마을이다. 동생 둘과 함께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외가의 뿌리를 찍었다.
납작한 돌 하나위에 흙 한줌, 그 위에 또 흙 한줌. 지금까지 보아온 돌담과는 전여 다른 아주 이색적인 모형이, 커다란 기와집들과 하모니가 잘 되어 왠지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고가(古家)와 이런 유물들을 만나면 역사를 읽는 것 같아 침묵의 묵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친척을 몰라서 아무 집이나 들어갔다. 70을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왔다. 우리들은 촬영을 하며 어렴풋이 들어온 외가의 친척을 물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 말이 이 마을은 타성은 두서너 집뿐이고 모두 전주최씨 일가이니 자기를 보고 형님이나 언니로 불러도 된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한 흐름이 있다. 조금 전에 어색하던 태도와 감정이 외가로 언니가 된다고 하니 뭔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정다움이 생겼다. 그 언니는 우리가 질문 하는 대로 소상이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마을 뒤쪽을 가면 <서비정>이라는 재실이 한 채 있는데 거기 꼭 올라가 보라고 하였다. 음력2월초라서 쌀랑한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언덕을 눈을 밟으며 올라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 옆에 매화꽃이 봉긋이 피어 있다. 매화는 엄밀히 따지면 겨울 꽃이다. 그렇지만 이른 봄을 제일먼저 알려주는 봄꽃이기도하다 우리는 금년에 거기서 처음으로 매화를 보았다. 목판에 새겨있는 글을 읽었다. 일제 36년의 겨울을 대쪽같이 살다가 의를 위해 목숨을 스스로 버린 외증조부의 정신이, 추운 겨울을 뚫고나와 깨끗한 자태로 피어있는 매화처럼 고귀하게 느껴졌다.
몇 일후에 십리 벚꽃이 피어있다는 쌍계사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남해고속도로로 하동에서 화개까지 갔다. 팔십리를 은모래로 펼쳐있는 섬진강을 따라 가면서 놀라게 느낀 것은 강 맞은편과 이편을 가로 질러서 전라도 경상도로 나누었는데 강 하나를 두고 어찌 말씨가 그렇게도 다른지--- 전라도쪽 섬진강변을 따라 쉬고쉬고 가다가 다리를 건너 화개장터로 향해 달렸다.
장터에 도착하여보니, 옛 장터는 닫혀있고 다리 건너편에 장터를 만들어 관광객을 모으고 있었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화개장터>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각종 다양한 문화행사도 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섬진강 재첩 국을 사먹고 차로 조금 올라온 후 벚꽃에 취하여 무작정 걸었다. 벚꽃은 멀리서 보면 하얀 구름이 넘실넘실 떠다가 나무에 앉아 쉬어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바로 옆이나 꽃 아래서보면 분홍 옷 입은 무용수들이 팔을 벌리고 서서 춤을 추는 것 같이 보인다. 특히 야등이 찬란히 켜 있는 벚꽃 길을 걸어보면 황홀황홀 보랏빛 황홀이다. 또 귀를 열고 조용히 들어보면 꽃들이 싸끌싸글 얘기를 하는데 귀가 간지럽다.
왕복 20리를 걸어서 다녀도 피곤치 않다. 노래와 감탄만 나온다. 꽃이 없는 이 세상 무엇을 구경하란 말인가？ 꽃 속을 거닐면 권력도, 명예도, 돈도, 떨어지는 꽃잎과 같이 훨훨훨훨. 건강만 있으면 행복하다.
봄이 오면 꽃 잔치로 즐겁다. 차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 가지런히 피어 있는 꽃을 본다. 깔끔하고 예쁘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앉은 신부의 자태 같다. 수양버들처럼 치렁치렁 늘어져 있는 개나리와 유채꽃은 온 세상을 노란희망으로 인도한다. 산에산에 빨갛게 깔려있는 진달래를 멀리서 바라보면 온 누리가 기뻐서 웃는 것 같다. 앙증스런 풀꽃들이 각양각색으로 들을 얽어매 있다. 작은 꽃일수록 잎과 줄기로 얽혀있다. 약하면 뭉쳐야 산다는 것을 사람만 아는 것이 아니고 식물도 아는가봐! 혼자 걸어가다가 무심코 담장 옆을 보면 민들레가 발길에 짓밟혀 있는데 지금 막 죽은 것 같은데 살아있다. 그 억센 생명력에 인간이 부끄러울 정도다. 돌 틈이나 산등성이에 불꽃같이 타오르는 연산홍은 청춘의 사랑이다. 찔레꽃은 가슴앓이 하는 짝사랑의 아픔이다. 내 아둔한 기억으로 봄꽃의 이름을 어찌 다 기억하리. 그냥 봄꽃이라고 불러줄 뿐이다.
겨울이 있기에 봄은 사랑과 환영을 받는다. 봄이 사랑스런 것은 꽃을 피워주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봄은 나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나는 가져갈 것 하나 없어도 자신만만하게 잔치 집에 들어가 즐거움을 누렸다. 봄봄. 봄 잔치에 초대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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